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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829]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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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비극적 사유와 충실성

: 충실성 시험하는 비극…웃으며 떠나게 하는 희극

초월적 존재자·가치는 모두 지배원리이기에 충실한 복종 요구
불교는 삶을 걸라 말하지만 충실성 증명하는 희생 요구 안 해
초월성의 구도에서 희극·웃음은 방치할 수 없는 불온성 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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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셴코의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왼쪽)과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의 한 장면(오른쪽)

 

모든 초월자들은 충성을 요구한다. 왕은 신하나 백성들의 충성을 요구하고, 초월적 신은 인간의 충성을 요구한다. 초월적 지위를 갖는 이념이나 가치 또한 충성을 요구한다. ‘충실성’이라 명명된 철학적 충성을. 플라톤이 그렇듯 초월적 모델로서의 ‘이데아’는 현실적인 존재자들에게 충실한 복제가 되기를 요구한다.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정치적 이념도, 시장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경제적’ 이념도 이념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

초월적 존재자나 초월적 가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고한 원리이기에, 충실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역으로 복종이야말로 그런 존재자나 가치에 초월적 지위를 유지하고 보장한다. 신하들의 복종 없는 왕이란 더이상 왕이 아니며, 신도들의 복종 없는 신은 신이기를 그친다. 충실한 복제이기를 그치고 원본과 반대방향으로 가려는 ‘허상(simulacre)’들은 이데아의 지위를 무력화하고, 신용·믿음을 잃은 화폐는 종이쪼가리나 무의미한 숫자가 되고 만다.

이 때문에 초월자나 초월적 이념은 충실성을 시험하며, 시험을 견뎌낸 이들에게 위대함의 미덕을 부여하고, 영웅의 지위를 제공한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다. 충실성이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마저 바치는 기꺼운 희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충실성의 시험은 이겨내야 할 시련이라기보다는 감수하고 견디어내야 할 시련이다. 이는 비극의 성격을 갖는다.

비극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위해 치르는, 그와 비교될 법한 어떤 거대한 대가나 희생을 통해 신이나 이념, 대의, 운명 등 대한 충실성을 가시화하는 드라마다. 판결의 부당함을 이유로 탈옥을 권하는 지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철학적이고 법적인 원칙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받았던 소크라테스 또한 그러했다. 그는 그런 죽음 자체가 영혼의 구원이라며 친구들을 설득한다. 소중한 것을 거는 희생의 고통은 더없이 크지만,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며 지고한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 바로 비극의 힘이고 비극이 주는 감동이다. 그런 영웅을 보고 공감하고 감동하며 우리는 그런 삶에 한 걸음 다가간다. 지고한 것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초월자나 초월적 가치는 어떤 조건과도 무관하게 지고한 것이다. 따라서 충실성은 무엇보다 우선 그 지고하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충실성이다. 반면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조건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연기적 사유에 그런 불변의 지고한 것은 없다. 부처는 모든 걸 지배하는 신이 아니라 앞서 깨달은 스승일 뿐이다. 그렇다고 충실성이란 덕목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맞다, 그럴 순 없다. 가르침이든 배움이든, 보시든 정진이든 삶을 온전히 건 충실성이 없다면 크게 이룰 수 없다. 어쩌면 삶 전체를 건 충실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선에서 모든 것을 ‘화두’에 대한 의정 하나에 걸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화두는 모든 준비된 답들을 깨며 던지는 물음이다. 그러니 화두에 대한 충실성이란 언제어디서나 답을 주는 원리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모든 답을 깨는 물음에 대한 충실성이다.

‘대원’이라고 명명되는 서원에 대한 충실성이 있고, ‘대신심’이란 말로 요약되는 스승에 대한 충실성이 있지만, 이 또한 저기 멀리서 내게 명령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공부나 수행, 깨달음이나 삶을 위한 것이다. 내재적 충실성이다. 이는 삶을 걸라고 가르치지만 충실성을 증명하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충실성은 심지어 남을 위한 것일 때조차 그 이상으로 자기를 위한 것이다. 자신의 해탈, 자기 삶의 평온함을 위한 것이다. 남들을 위한 헌신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때조차,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중한 것을 바침으로써 증명해야 할 충실성 같은 것은 없다. 충실성을 요구하는 지고함도 없다. 깨달음에 대한 욕망조차 탐심이니 내려놓고 가라 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렇기에 불교에도 위대한 인물은 있지만, 견디어낸 시련의 크기로 규정되는 위대한 영웅들은 찾기 힘들다.

비극이 최대의 대가를 치르며 초월자를 향해 상승하는 영웅적 충실성으로 주위로 모든 진지함을 끌어들인다면, 희극은 웃음의 이유가 되는 것을 엮어 최대치로 증폭시키며 어딘가에 빠져들며 끌려가는 걸음을 멈추게 한다. 위반과 어긋남, 의외성 등이 야기하는 웃음을 통해 가던 길을 멈추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묻게 한다. 소크라테스 식의 조롱조차 이점에선 다르지 않다.

초월성의 구도에서 희극이나 웃음은 방치할 수 없는 불온성을 갖는다. 가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공중에 매달린 바구니에 앉아 있는 소크라테스를 무대화한다. 이는 좀더 높은 곳, 아니 가장 높은 지고한 곳에 이르려는 그의 철학적 시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희극은 지고한 가치를 웃음거리로 만들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웃음에 대해 해명하고자 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웃음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악덕을 겨냥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령과 나란히, 자신의 무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에 대한 적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웃음은 열등한 자를 모욕하는 농담과 짝짓는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들을 모방하려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인간들을 모방하려한다.”

18세기 영국 사상가 허치슨이나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은 웃음의 이유를 ‘부조화’에서 찾는다. 과장이나 어긋남, 어색함 등을 동반하는 부조화가 웃음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열의 위계를 벗어나 웃음을 해명하려는 시도란 점에서 오래된 고전적 전통과 다르지만, 여전히 웃음은 ‘조화’라는 긍정적 개념과 반대로 부정적인 어떤 것과 짝지어 있다. 그러나 웃음이야말로 기쁨과 유쾌함이라는 긍정적 감응의 표현 아닌가?

웃음은 부지중에 작동하는 어떤 통념이나 상식, 규칙이나 예상을 깨지만 나름 수긍할 이유를 갖는 어떤 작은 위반이나 미시적인 어긋남에서 발생한다. 의외성이라 해도 좋을 이런 위반이나 어긋남은 작은 이탈이나 분리, 뜻밖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여기서 굳이 ‘작은’이나 ‘소소한’, ‘미시적’ 같은 말은 개념어에 덧붙인 단순한 관형어는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개념적 명사만큼이나 중요한 성분이다. 왜냐하면 그 이탈이나 어긋남이 거대하면 의외성과 이탈은 당혹과 숙연함의 심연이 되고, 거기서는 무거운 비장함의 대기가 솟아오른다.

중요하다 믿는 것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던 눈을 옆으로 돌리게 하는 어긋남, 지고한 것에 짓눌려 엄숙하고 비장해진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는 의외성은 그렇게 작을 때에만 반감 없이 작용한다. 따라서 그 ‘작음’과 ‘소소함’은 결코 ‘사소한’ 것, 별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종종 지고한 가치 전체를 웃어버리며 떠나는 것이 그리 작은 이탈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을 뜻한다.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그 작은 이탈이나 의외성이면 충분할 만큼 쉬운 것이다. 그러니 이 ‘작음’은 이탈하고 벗어나려는 자에겐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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