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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2-0524]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o398

휴머니스트의 인질극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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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냐 인간이냐” “곰이냐 인간이냐”는 반문은
휴머니즘을 벗어나 생각하려는 이들마저 ‘시험’에 들게 한다
이런 선택지에서 인간은 일종의 인질이다.

맞은편의 인질 또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불모로 한 휴머니스트 인질극을 보게 된다
인간 세상서 ‘인간의 죽음’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처럼,
아주 다른 세계의 분기점이 거기 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프랑스에는 철학책이 ‘모닝빵처럼 팔렸다’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런 책 가운데 하나인 푸코의 <말과 사물>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에 허덕대며 ‘꼭 이렇게 써야 하나?’ 투덜대게 하기도 했지만, <돈키호테>를 비롯한 다양한 저작들에 대한 참신한 해석이나 근대 서구의 지식 전반을 꿰는 탁견으로 인해 감탄하게 하는 멋진 책이었다. 그 책은 어쩌면 지금 여러 영역에서 현행화되었다 해야 할 어떤 새로운 사고방식의 도래를 예언하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어떤 사고방식의 ‘죽음’을 선언하는 바람에 커다란 논쟁에 말려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그가 ‘인간의 죽음’이라고 명명했던, 휴머니즘을 떠받치는 근본 범주의 와해가 그것이다.

‘아니 인간의 죽음이라니!’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을 썼던, 당대 가장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가 강한 비판을 퍼부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신예에 불과한 철학자가, 바로 2년 전인 1964년 노벨 문학상을 거절하여 더욱 저명해진 이름의 무게에 눌려 몰락하지 않았던 것은, 그 선언이 이미 몇몇 영역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서 감지되었던 것을 하나로 응집하며 예각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년 마르크스를 성숙기 마르크스에서 잘라내며,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 철학자 알튀세르가 그랬고, 그보다 먼저 사고방식의 차이를 우열이나 서열을 함축하는 미개, 야만과 문명으로 대비하며,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인간이라면 마땅히 동일화되어야 할 문명으로 간주하는 서구의 멘털리티를 비판했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그랬다.

인간이 단일한 종으로서 동일하다는 관념은 ‘인간’이란 말에 생물학적 실체성을 부여한다. 여기에 ‘생각하는 동물’로서 유일하다는 관념이 더해지면 가장 지고하고, 가장 진화된 동물로 승격된다. “인간이란 모든 것의 가치척도”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은 모든 것의 가치를 산출하는 유일한 기원이 된다. 이로써 휴머니즘은 어디서나 발견되는 주관적인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연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라는 객관적인 지위를 표시하는 말이 된다. “인간이란 언제나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으로 다루어져선 안 된다”는 칸트의 ‘인간학적 요청’은 이런 이념의 실천 원리가 된다.

브라질 대통령 보우소나루가 전 세계의 비난을 웃어넘기며 당당하게 아마존의 숲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휴머니즘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인간의 죽음, 휴머니즘의 죽음이 단지 이론적 논쟁의 대상일 뿐 아니라 현실적 논쟁의 주제임을 보여준다. 이는 사실 숲이나 동물의 문제 이전에 인간과 관련된 문제로 제기된 바 있다. 19세기의 인간학처럼 정연한 체계를 갖추기 훨씬 이전인 16세기에 벌어진 ‘휴머니즘 논쟁’이 그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끔찍한 착취에 대해 비난하며 “인디언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했던 라스카사스 신부에게,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언이 인간이라니, 무슨 소리냐?”라고 반박하며 시작된 게 그 논쟁이다. 과라니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 <미션>에서 잘 보여주듯이, 인간이 아니라는 판단은 동물처럼 사냥되고 매매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는 ‘인간’이란 범주가 단지 백인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인간중심적 사유가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들에게 얼마나 끔직한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덧붙이자면, 당시 ‘흑인도 인간’이라고 주장한 휴머니스트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인디언이나 흑인을 인간에 넣어주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평등한 존재로서 태어났음을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간의 시대를 열었던 게 프랑스혁명이었다지만, 프랑스에서 여성들이 의회연단에 올라갈 권리를 얻은 건 2차대전이 끝난 뒤였다. 혁명 이후 150년간, 여성은 아직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도 충분히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한’ 교육이지만, 교육받는 방식을 자신들이 결정할 권리가 없다. 인간인 어른들이 결정하는 대로 교육받고, 부지런히 인간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흑역사 주역 겨냥한 ‘인간의 죽음’

누가 인간인가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수직적 위계가 있다는 생각, 인간은 목적이어야 하기에 인간을 위해서라면 인간 아닌 것에 대해 어떤 처분을 해도 정당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을 참혹한 역사의 주역으로 만든 것 아닐까? ‘인간의 죽음’이 겨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 곧바로는 아니었지만, 해변 모래사장에 써놓은 ‘인간’이란 이름을 지우는 물결들이 밀려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먼저 인간이란 범주를 선점한 장년의 백인남성들을 향해 밀려든 물결이 그것이다. 서구의 식민주의는 물론 ‘문명화’란 이름 아래 비유럽인들 자신이 내면화한 유럽중심주의를 비서구의 문화를 통해 상대화하고, 인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유를 비서구 인간들의 사유를 통해 전복하려는 탈식민주의가 거기 속한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을 ‘종차별주의’ 비판으로 밀고 나가, 인간이라는 종의 특권적 지위를 동물들을 통해 허물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기계의 발달을 따라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는 지점에서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시도 또한 그렇다. 그들은 사이보그가 하나의 통제시스템 아래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것이라면, 그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역사 전체가 사이보그의 역사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한편 전 지구적 차원의 기후위기를 야기한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선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고 하는 이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휴머니즘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이런 시도들은 방금 나열한 것들에 그치지 않고 빠르게 증식되고 있다. 그 시도 가운데 일부에서 나온 말이지만, ‘포스트 휴머니즘’이란 인간이란 이름의 특권적 범주를 지우려는 이런 시도 전반을 하나로 묶는 말이라 하겠다. 이런 시도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발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어쩌면 ‘포스트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 생각하고, 휴머니즘을 벗어나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일까?

그러나 인간이 휴머니즘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인공지능이나 기계의 발전을 인간 신체의 확장, 정복능력의 확대라며 예찬하는 이른바 ‘트랜스 휴머니즘’은 인간이 뇌를 복제하여 신체를 바꾸어가며 사는 새로운 영생을 약속한다. 지구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근심과 반성에서 태어난 ‘인류세’란 말조차 ‘인간이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능력의 증거’라며 환호하는 울트라 휴머니스트도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이 허용하는 이런 몽상들에는 그래도 아이들 같은 순진함이 있는 듯하다. 난감한 것은 역시 전통에 충실한 엄숙한 휴머니스트들이다. 멸종으로 몰려가는 동물과 생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 맞서, 일자리가 없어 궁지에 처한 빈민들을 불러내 “펭귄이냐, 인간이냐”고 묻는 분들. 전 지구적 기후위기에 대한 대책을 실행하자는 이들 앞에, “그보다는 발전이 절실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세워 놓고 “이들에겐 석유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분들.

동물·생태 도외시한 그들의 난감함

“빙하냐, 인간이냐” “곰이냐, 인간이냐”는 그들의 반문은 휴머니즘을 벗어나 생각하려는 이들마저 ‘시험’에 들게 한다. 이 선택지에서 ‘인간’은 일종의 인질이다. 이는 이미 심각한 상태로 접어든 위기 앞에서조차 사람들을 망설이게 한다.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가던 길을 가게 한다. 멸종이나 기후위기가 마치 인간의 문제와 무관한 양, 아니 인간의 생존에 반하는 것인 양 제시되는 이 선택지가 터무니없다는 것마저 잊게 하는 것은, 맞은편의 인질이 ‘인간’이란 점 때문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에게 고통을 감내하라며 무언가를 밀고 나가도 좋은 것인지, 동물이나 지구를 위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해도 좋은 것인지 묻게 하기 때문이다. 생태적 소모를 함축하는 성장주의 비판에 맞서 경제축소로 고통받을 사람들을 환기시키는 경제학자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볼모로 한 휴머니스트의 인질극을 여기서 보게 된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의 죽음’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처럼, 아주 다른 세계의 분기점이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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