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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후기] [바깥의 문학] 진은영, <문학의 바깥, 삶의 바깥>

수유너머웹진 2019.02.24 08:52 조회 수 : 180

진은영, <문학의 바깥, 삶의 바깥> 강의 후기 




남승화(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7시 16분. 버스 안이었다. 지나는 곳은 합정. 홍대입구역을 지나고 동교동을 지나야 수유너머가 나온다. 도로는 퇴근으로 분주하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 버스 손잡이를 쥐기도 하고, 놓기도 했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다. 뛰기 시작했다. 시를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뵙고 싶던 분이셨는데 늦을 수는 없다. 이때 아니면 아마 뵙기는 힘들것 같으니까. 28분에 도착했다. 나는 이 강좌에 있다는 것을 어제 알게 되었다. 부분 수강료인 이만원을 빠르게 냈고 물 한 컵과 강의 자료를 가져왔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는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삶과 문학을 나누고(강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에서 문학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심리학적 접근을 한다. 또한 고통이 문학을 통하여 즐거움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이면서, 여기서 파생되는 문학적 탁월함에 대한 고찰한다. 탁월함에 대한 반대급부의 예시로서‘패터슨’이 동원되고 롤랑 바르트의 ‘아마추어 활동’, 과 장자로 논의가 뒷받침된다. 강의록에 아주 조그마한 오타가 하나 있다. 잠깐 언급된 커트 보거네트는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일 것이다.

 


서두에서 ‘작가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부단한 자기 실험의 욕구나 작가에게 부여되는 예술가적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에서 슬펐다. 듣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질문 시간에 요새 진은영님의 문학의 공간은 어떠신지 여쭤볼까 싶었지만, 내가 저런 질문을 받게 되면 쓸데없이 곤혹스러울 것 같고, 또한 진은영님의 신작시를 읽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훨씬 더 정확한 답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질문을 드리지 않는 편을 택했다.

 


강의 부분 부분마다 인용문들이 재미를 더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인용문은 다시 한번 숙고할 만하다. 수강을 안 하신 분들을 위해 먼저 해당 텍스트를 옮긴다.




 


위험한 정치인


옛적에 청동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즐거움, 한순간 머무르는 즐거움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한 조각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모두 써 버렸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무덤 위에 있는 한 덩어리의 청동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인 아내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직접 만든 조각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슬픔의 조각상이었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슬픔의 조각상이었죠.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슬픔의 조각상, 영원히 지속되는 슬픔의 조각상을 가져와 부서뜨려 불에 녹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한순간만 머무르는 즐거움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와일드가 말하는 오스카』, 박명숙 옮김, 민음사, 2016, 156면)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는 전형적인 애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우화가 아주 재미있는 것은 애도의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바뀐다는 것이다. 청동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그’에게 애도의 대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청동이다.(*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한 조각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애도의 대상을 아내로 놓으면, 그는 아내를 위한 슬픔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애도 행위 중에 하나이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애도가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문득 한순간 머무르는 즐거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지경이다. 왜 이렇게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을까? 아내의 부재는 슬픔의 조각상으로 굳건함에도 그는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애도가 완료 되었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잊혀져버린 것이다. 그러다 그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저토록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애도를 제대로 완료지어야 한다는 내면이 요동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슬픔의 조각상을 한순간만 머무르는 즐거움의 조각상으로 만들었고 그의 애도는 완료된다.

 


하지만 애도의 대상이 청동이라면 그에게는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의 조각상마저도 청동의 애도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것은 잘 가공된 청동일 뿐이다. 그러하다면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청동이다. 이번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착각이다. 그는 청동을 위해 한순간만 머무르는 즐거움의 조각상을 만들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것은 청동을 위한 애도 행위 중에 하나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애도가 완료 되었는지, 완료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에게 또 다시 자신의 어떤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어떤 종류의 애도는 절대로 완성될 수 없을지도.

 


인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다. 바가바드 기타 인용문이 인상 깊다. 진은영님은 해당 인용문을 읽으시곤, 한 개 두 개 (……) 여타 등등.’이라는 농을 하셨다.‘여타 등등.’ 이라는 말에서 진은영님이라는 실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든 환이겠지만, 그것이 참 좋았다. 나는 이 말을 듣기 위해 여기에 왔다.

 


강의와 나와의 생각이 다른 부분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예술가가 하얀 종이나 물감통에 자신을 감금하는 것을 세상과의 완전한 유폐, 단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찬란한 예술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상실, 세계상실에 이르러도,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위하고 있는 것은 ‘자기’다. 또한 그 ‘세계’ 속의 ‘자기’다. 완벽한 이분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시인이 쓰는 언어마저도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고한 상실상태라면 어째서 언어는 상실되지 않았을까?

 


"순수/참여, 깊이/넓이" 라는 논의는 헛되다. 예술가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통하여 그것의 수용자에게 어떤 행위를 자극시킨다. 앞선 문장이 훨씬 더 중요하지만, 간략하게 쓴다면, 예술가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뛰어들면 그것은 사회 운동이다. 예술가가 개입하는 영역은 작품이다. 그러니 예술가에 있어서 넓이란 종이 한 장, 물감통의 지름이면 충분하다.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넓이를 담당한다.

 


예술가를 사회적 참여도로 판단하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넓이, 참여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품이 가진 넓이의 위력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 예술가들이 사회적 문제에 직접적인 ‘참여’를 해야 하는 급박한 순간이 온다면, 당연스럽게도, 그것은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참여다.

 


강의는 ‘눈 내린 평원처럼 세상의 끝으로 이어지는 종이들, 바이칼 호수처럼 푸른 거대한 물감통을 들고서.’로 끝을 맺었다. 강의록 맨 앞의 릴케의 요청에 대한 진은영의 대답이다. 나는 신작시를 찾아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의는 동굴 안을 비추는 맑은 샘처럼 느껴졌다. 빛 없이도 비춰지는.

 


강의 내용을 아우르기도 하고 이 수강 후기와도 연관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 마무리하겠다. 수유너머에 좋은 배움이 있기를.

 



시의 아마추어

 

 

내 진정한 생각을 문득 들여다보게 될 경우, 나는 인칭도 태생도 없는 이 내면의 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에 쉬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이 하루살이 같은 형상들을, 자신의 편의로 중단되며 또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서로를 탈바꿈시키는 이 무한의 시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이처럼 겉보기와는 달리 일관이라곤 없으며, 우발적으로 발생하여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생각에, 애당초 양식이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게는 매일 꼭 필요한 몇몇의 존재들에게 집중할 힘도, 지긋지긋한 도망 대신 시작과 충일과 결말의 모습을 갖추는 정신적 장애들을 가장할 힘도 없다.

 

한 편의 시란 하나의 지속으로, 독자인 나는 그것을 읽는 내내 앞서 마련된 하나의 법칙을 호흡한다. 내 숨을, 내 목소리에서 비롯된 장치들을, 아니면 침묵과 양립할 수 있는 이들의 힘을 내밀 따름이다.

 

나는 근사한 걸음걸이로 빠져들어 단어들이 이끄는 곳을 읽고, 산다. 단어들의 발현은 기록되어 있다. 그 울림은 계획되고 그 진동은 앞서 행한 관조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단어들은 절묘하거나 순수한 무리를 지어 공명으로 몸을 던지리라. 감탄마저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감탄이란 미리 숨겨놓은, 이미 셈에 들어 있는 것이기에.

 

숙명적인 문체에 이끌린 나는, 언제나 미래일 운율이 영영 내 기억을 얽매기만 한다면, 말 하나하나를, 내가 무한히 기다렸던 그 온전한 힘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나를 실어 나르기도, 또 내가 색칠하기도 하는 이 운율은 나를 진짜와 가짜로부터 지켜준다. 의혹이 나를 분열시키지도, 이성이 나를 다듬지도 않는다. 결코 우연이란 없으니, -오직 하나의 비상한 기회가 견고해질 따름이다. 아무런 노력도 않고서 이 행복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니, 나는 기교를 통해 생각을 생각한다. 온전히 확실한 경이로울 정도로 앞을 내다보는, -빈틈마저 계산된, 본의 아닌 막연이라고는 없는, 움직임이 내게 명하고 그 분량이 나를 채워주는, 기이하게도 완성된 하나의 생각을.

(폴 발레리,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최성웅 옮김, 읻다, 2018,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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