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미시적 무의식의 철학적 자원으로서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과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내포하는 미시성ㆍ복수성을 살펴보았다. 라이프니츠와 니체는 모두 의식에 드러나는 것은, 정신 내지 신체를 구성하는 지각과 의지의 매우 일부분일 뿐임을 입증한다. 거시 지각의 배후에는 그를 ‘파생시키는’ 미세 지각들이 있으며, 의식적 행위와 사고 및 판단의 배후에는 이성을 ‘지배하는’ 힘에의 의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이해의 근본적 심급으로서 무의식을 조명하는 가운데, 무의식에 자리한 것들이란 단일한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 충동과 의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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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들이 주목하는 무의식은 억압이나 결핍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그 자체가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나 욕망이라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무의식은 ‘생산적’이라는 점을 전면화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 니체와 달리 들뢰즈ㆍ가타리는 무의식에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특성을 덧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무의식이 ‘기계’라는 주장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핸드폰이나 컴퓨터와 같이 무의식도 기계라는 것이다. 통상 기계는 외부에서 동력을 받아 일정한 운동을 함으로써 유용한 일을 산출해내는 장치를 뜻한다. 수송기계인 자동차나 선박, 생산기계인 방직기나 컨베이어, 농업기계인 경운기나 탈곡기, 건설기계인 굴착기나 불도저 등은 모두 기계다. 가타리가 처음 제안했던 ‘기계’ 개념 역시 이러한 일상의 용법과 다르지 않다. 무의식은 외부에서 동력을 받아 일정한 운동을 한다. 그런 점에서 사실 ‘무의식은 기계다’라는 주장은 ‘무의식은 생산적이다’라는 주장과 동어반복적이다. 기계로서의 무의식은 언제나 생산과 결부된다. 더욱이 기계의 산물이 ‘유용성’이라는 척도로 계산될 때에, 그것이 결과적 유용성이 아니라, 과정상에 있어서 무언가를 산출해낸다는 의미 자체에서의 ‘유용성’이라면 통상적인 기계 개념은 무의식 기계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다만 우리는 들뢰즈ㆍ가타리의 기계 개념은 기계를 단순한 도구로 삼지 않고, 그 자체를 보다 능동적인 동력장치로 사유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개발자 내지 사용자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서만 작동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의 발명품이 뜻밖의 발견에서 이뤄졌듯, 기계는 주입되어야 할 것이 아닌 이질적인 것과 결합될 때 예기치않은 방식으로 또 다른 용모를 드러낸다. 미 해군에서 무전병으로 근무하던 퍼시 스펜서는 군사용 레이더를 점검하던 중 주머니 속에 있던 초콜릿이 녹은 것을 발견하고 마이크로파를 음식을 데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를 고안한다. 담배 공장의 노동자였던 마비 스톤은 1888년 당시 위스키를 빨어먹는 용도로 제공되었던 지푸라기가 그 특유의 향 때문에 위스키 본연의 맛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말았던 종이담배에서 담뱃잎만을 제거해서 최초의 빨대를 고안한다. 빨대가 지푸라기와 동일한 단어인 ‘straw’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3M의 전신인 미네소타광업제조의 연구원이었던 스펜서 실버가 잘 떨어지기에 실패작으로 여겨졌던 접착제로부터 포스트잇을 발명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군사용 레이더와 먹을 것의 접속, 둥그렇게 말은 담배종이와 음료의 접속, 점성이 약한 접착제와 임시성 내지 가변성의 접속은 그렇게 새로운 결과를 산출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동일한 사태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군함의 거리를 측정하던 레이더가 군함과 절단하고 음식과 접속한 것, 마른 잎을 담아냈던 둥글게 만 종이가 담뱃잎과 절단하고 음료와 접속한 것, 접착제가 강력한 접착성과 절단하고 임시성과 접속한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기계가 기존의 용도 내지 원재료들과 ‘절단’하고 전에는 결부되지 않았던 이례적인 항들과 ‘접속’할 때 어떻게 새로운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된다.

들뢰즈ㆍ가타리가 무의식에 기계라는 명칭을 부여할 때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수의 항간의 ‘접속’과 ‘절단’이라는 측면이다. 살폈듯 기계가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동력원과 원재료들이지만, 그것들에 따라 기계는 그 자체가 상당히 가변적인 속성을 갖는다. 달리 말하면, 어떤 외부적인 항들과 접속하고 또 절단하는가에 따라 기계는 언제나 상이한 결과로 연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무의식 역시 어떤 외부의 항들과 접속하는가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결과를 도출하는 기계로서 작동한다. 만찬을 그린 동일한 한 점의 그림을 마주하더라도 소묘법에 관심을 갖는 이가 붓의 흔적을 살피는 눈길로 나아간다면, 굶주린 이는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식사의 사유로 나갈 것이고, 화상(畫商)을 직업으로 갖는 이라면, 그는 작품의 시장 가치를 따져보는 사유로 옮겨질 것이다. 이들은 모두 ‘소묘법’, ‘허기’, ‘자본’ 이라는 저마다 상이한 것으로부터 한 점의 회화와 접속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강렬한 하나의 욕망이 외부적 요소들을 그 욕망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킬 수도 있다. 화가의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캔버스와 접속할 수도 있지만, 간이식당의 냅킨이나 평평한 흙바닥과도 접속해 작품을 생산해낸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ㆍ가타리는 기계로서의 무의식에서 단일하게 구획지어지지 않는 욕망의 무한한 전개의 가능성을 중요하게 포착한다. 이들이 어떤 곳에 고착되지 않는 무의식의 유동성을 전경화하는 가운데 ‘무의식은 흐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된다. 언제든 무의식은 복수의 욕망과 충동에 따라 다른 항들과 접속되어 복수의 방향으로 유동할 뿐이다. 무의식이 생산적인 동시에 기계이기에, 무엇과 접속하는가에 따라 어떤 예상치 못한 전개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의식에 보다 많은 것을 걸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장 속에서 나도 모르는 나가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의미 찾기로부터 사용의 문제로

연애에서 센스는 중요하다. 같이 거리를 걷다가 유심히 지켜보았던 것을 기억했다가 기념일에 꺼내든다거나 혼잣말로 감탄했던 음악가나 시인을 기억하고는 열심히 듣고 읽어보았다고 말하는 연인은 기대치 않았던 감동을 준다. 우리는 그럴 때 절감한다.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센스를 겸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센스는 노력과 의지만으로 개척될만큼 호락호락한 영역이 아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는 세심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일만큼 차분하지 못한 성격일 수도 있고, 혼잣말의 작은 데시벨을 캐치하지 못하는 약한 청력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경험이 축적될 때 사랑의 무게를 측량한다. 연인의 센스 없음은 곧 나에 대한 무관심의 징후로 해석된다. 그리고 결론짓는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 헤어지자. 상대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 내 센스가 부족했던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을까? 상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가늠하지 말고 차라리 센스가 없는 너랑은 사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해줘.”

연인의 센스없음으로부터 우리가 곧바로 사랑의 부재로 그리고 이별선언으로 이동할 때, 적어도 상대는 그처럼 짝지어진 인과성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의 인과관계를 따지는데 익숙하다. 그것이 유용했기 때문일텐데, 가령 질병이나 범죄처럼 인간에게 위협적인 것들의 원인을 아는 것은 생존과 결부된 문제들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질 이유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 편재하기에 인과성을 논할 수 있는 전지적 작가시점이란 소설의 작법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한된 시공간에 사는 우리는 언제나 일부의 원인에 기대에 결과를 도출하고는 그것이 원인이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도출해낸 인과성은 많은 경우 대단히 ‘부분적’인 사실성만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우리의 인과성에 너무 많은 기대와 확신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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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유사한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의식은 자신이 판단하는 인과성에 강한 확신을 갖지만, 사실 의식이 알 수 있는 인과성이란 대단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방향은 상이하더라도 모든 무의식 연구는 의식에 떠오른 것이 얼마나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인가를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언급하듯 은연중에 드러나는 내심의 욕망이든, 라이프니츠가 언급하듯 미세한 지각과 욕구들의 연합적인 활동이든, 혹은 니체가 언급하듯 작은 이성을 지배하는 큰 이성인 신체이자 신체에 거주하는 힘의 의지들이든 무의식 탐구는 의식 이하의 것들로 중심추를 이동시키면서 의식의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의식이 포착하는 것은 이미 의식 이하의 수준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립적인 원천과 동력을 계기로 전개된 활동의 결과들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브로이어는 6주 동안 물을 삼키지 못했던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엄청난 갈증에도 물을 삼키지 못하는 자신의 증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브로이어는 그로부터 그녀의 병든 아버지와 아버지를 전담하는 고약한 간호사, 그리고 간호사가 기르는 강아지가 게걸스럽게 핥아대던 물을 목격하던 경험을 들으면서, 의식은 해명하지 못했던 인과관계를 밝혀낸다. 혹은 앞서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총괄적 허기’와 ‘수많은 작은 허기들’의 사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우리가 ‘배고파!’라고 외칠 때, 그 ‘총괄적 허기’는 의식 이하의 수준에 자리한 나트륨이나 칼슘에 대한 허기 등 ‘미시적인 허기들’이라는 추동력에 의해 형성된다. 미시적인 허기라는 미세지각들, 이 지각들간의 이행인 작은 욕구들로써 우리는 최종적으로 거시적 욕구인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다. 의식이 단지 결과만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정작 자신을 추동시킨 원인에 대해서 의식은 무지하다는 점을 뜻한다.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수용한다면, 즉 의식으로 포착하는 인과관계에 담긴 것은 사실 ‘결과’일뿐, 그곳에 원인이란 없다는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왜 정신분석이 전념했던 무의식 탐구가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브로이어가 분석했던 물을 삼키지 못했던 여성의 사례처럼, 결과밖에 모르는 의식의 배후에 그 원인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의식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은 옳은 방향을 지시한다. 의식에 포착되는 것들이 단지 결과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가 원인을 알기 위해서 주의를 돌려야 하는 곳은 다름 아닌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가졌던 원인 분석에 대한 야망은 대단히 집요한 것이었다. 서양 지성사의 원인에 대한 탐구가 단 하나의 원초적인 ‘아르케’를 찾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전개했듯, 정신분석은 복수의 원인을 다시 정초하는 단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 가령 이 젊은 여성(Anna. O양으로 알려진 파펜하임)은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착과 동시에 병간호에 따르는 육체적 피로 속에서 그의 죽음을 기대했다는 데 대한 죄책감이 복잡하게 뒤얽힌 무의식적 충동들로 인해 물을 삼키지 못하거나 환각을 경험하고, 사지 마비를 겪는 증상이 일어났다고 보고된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이 사례로부터 집요하게 부친에 대한 금기된 욕망, 즉 근친상간의 성충동을 읽어낸다. 때문에 모든 증상은 물론, 고된 간호 속에서 지친 신체를 건강하게 보존하고 싶다는 욕망이나 그와 상충하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등은 모두 성충동의 상상적인 유사 내지 상징적인 관계의 유비로 환원된다.

이처럼 원초적인 욕망이 단일한 것으로 규정되는 도식 속에서 복수의 욕망들은 그 하나의 이름 아래 유사성을 획득하거나 유비적으로 사유될 수밖에 없다. 모든 욕망은 성충동을 ‘위하여’ 봉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면 우리는 성충동이 모든 욕망들의 근원적 원천이라는 점에서 ‘진짜 욕망’이고, 그 이하의 것들은 그에 봉사하는 ‘가짜 욕망’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D 96; 국144) 이처럼 성충동을 중심축으로 회전하는 규정된 배치 속에서 가짜 욕망들 중 단 하나일 ‘참된’ 욕망 찾기의 놀이는 계속된다.

예감하듯, 이때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참ㆍ거짓을 구분하는 판관의 자리를 자처하게 된다. 원인을 찾고 그로부터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그처럼 자신의 욕망을 분별하고 재판하는 일이 된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이 가정하듯, 참된 욕망의 자리에 있는 것이 오직 성충동뿐이라면, ‘문화인’에게 그것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정신분석이 욕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욕망을 견인할 심리적 층위로서 ‘법칙’이나 ‘문화’를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정신분석은 정신의 심연에 위치한 것들의 비이성 내지 비합리성을 폭로함으로써 그를 통제할 권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욕망은 그 자체로는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성적 욕망일 뿐이라고, 그렇기에 그 욕망들을 적절하게 체념하는 법을 익히는 것,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인간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일이라고 정신분석은 안내한다. 들뢰즈가 “정신분석가들은 한없는 체념을 가르치는 최후의 사제들”(D 100; 국151)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들뢰즈ㆍ가타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분석이 제안하는 배치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욕망’과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망’이 구획되고,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 그러한 배치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고3인 학생이 대학에 가지 않고 시만 쓰겠다거나 음악만 하겠다고 할 때, 아무런 주저없이 그를 적극적으로 응원해줄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까”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말리는 쪽을 택한다. 혹은 미래를 상상해 본 자신이 스스로 그 길을 접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욕망’을 스스로 삭제하면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욕망’쪽으로 자신의 힘을 쏟는다. 관련하여 가타리는 이러한 욕망의 구분이 직접적으로 재화의 가치와 결부됨을 지적한다.

재화의 가치는 (...) 욕망이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을 결정하는 구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본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착취기계에 연결할 수 있는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 및 생산기계입니다. 즉 만약 당신이 청소부라면 당신의 팔, 당신이 기술자라면 당신의 지능, 당신이 표지 모델이라면 당신의 유혹 능력, 자본주의는 그 밖의 것에 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 밖의 것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질서를 방해할 뿐입니다. 따라서 비록 욕망하는 기계가 산업사회와 사회기계에 득실거린다고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서로 감시당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보내지고, 구획된 채 있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인간의 사회적 조건에 고유하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소외적 통제양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역, 푸른숲, 34쪽)

우리가 청소부라면 튼튼한 팔, 기술자라면 그에 상응하는 지능, 표지모델이라면 매력적인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시장에 판매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표지모델이 되기 위해 아름다운 신체를 가꾸는데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모든 생산적인 의지와 욕망을 투자하고, 기술자로서 주어진 과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들여 전문성을 갈고 닦을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ㆍ가타리가 주목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무의식이란 그 자체가 가시적인 행위와 직결되는 대단히 실질적인 문제를 지시하는 것인 동시에 그처럼 다른 모든 의지와 욕구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 생산적 힘이 투여될 수도 있음을 드러낸다. 자본가의 욕망을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 밖의 것에 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자본가의 욕망은 “돈이 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현대인이 공유하는 자본에 대한 욕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들뢰즈ㆍ가타리가 정신분석이 제안하는 성충동이라는 ‘단일한’ 방향성을 문제삼는 것은 이처럼 일정하고 단일하게 구획된 욕망의 흐름이 전체를 덮쳐오는 방식으로 현대에서 그대로 재상영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일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욕망의 참ㆍ거짓을 구별하는 판관을 자처하고, 체념을 가르치는 정신분석과 결별하기 위해 들뢰즈ㆍ가타리는 무의식의 ‘의미’를 따져묻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을 ‘사용’을 탐구하자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제 무의식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무의식은 앞서 강조되었듯 철저하게 ‘생산’과 직결된 것이기에, ‘주어진’ 무의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생산하는’ 무의식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하는가가 된다.

 

욕망은 흐르고 절단한다

무의식을 ‘생산’의 문제인 동시에 ‘사용’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의 욕망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물음과 결부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부터 “무의식은 욕망하고, 또 오직 욕망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DR 2장 4절)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단적으로 그에게 무의식은 욕망이고,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들로 구성된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들뢰즈ㆍ가타리가 무의식을 분열분석의 관점에서 정신분석의 그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재조명되는 것은 ‘욕망(désir)’ 개념이다. 우리는 앞선 절에서 이들이 다루는 무의식이란 생산과 동어반복적인 의미에서 ‘기계’이며, 그것이 뜻하는 것은 매번 상이한 항들과의 ‘접속’ 및 ‘절단’을 감행하는 유동적인 ‘흐름’이라는 점을 보았다. 욕망 역시 이러한 무의식의 규정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선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AO 12; 국29) 결코 철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전복적인 스타일로 악명 높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첫 구절,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AO 8; 국23)는 것은, 욕망이 이처럼 제멋대로 흘러넘치며 오직 유동적으로 존재할 뿐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것(ça)’은 프로이트가 ‘id(Es)’로 지칭한 ‘무의식’의 불어식 표현이다.1) 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인다면,2) 들뢰즈가 제시하는 ‘그것’은 어떤 원칙에 구속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유동한다. 들뢰즈ㆍ가타리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무의식에 대한 독자적인 규정을 제시한다.

한편으로 욕망은 ‘생산적(productif)’이다. 욕망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 또는 정신분석에서 제시하는 욕망은 결핍과 짝하는 것으로 사고된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을 동반한다. 음식을 향한 식욕과 멋진 이성을 탐하는 성욕,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권력욕은 모두, 어떤 것을 ‘향한’ 것 내지는 ‘위한’ 것이라는 의미의 욕망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쉽게 욕망은 대상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자, 그러한 결핍의 충족이라는 도식으로 단순화된다. 그러나 배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생산해내고자 하는 욕망, 성욕과는 무관하게 이성과의 만남을 만들려는 욕망, 권력욕과 무관하게 맡은 바를 충실히 해내려는 욕망이 다른 한 편에 있다. 이 때 욕망은 결핍된 대상과 결부되기를 그친다. 욕망은 오히려 거꾸로 대상을 산출하도록 ‘의지’하게 하고, 그에 따른 행위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욕망은 필요들에 기대고 있지 않으며, 역으로 필요들이 욕망에서 파생된다.”고 말하면서 “필요들은 역-생산물들”, “결핍은 욕망의 역-결과”(AO 35; 국60-61)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어떤 ‘하고자 함’이라는 것으로서의 욕망은 언제나 무언가를 ‘행위’하게 하고, 때로 그로부터 ‘필요들’이 이차적으로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들뢰즈ㆍ가타리는 ‘욕망=결여’라는 등식을 거부하고, ‘욕망=생산’이라는 새로운 등식을 제안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욕망의 생산적인 속성이 ‘결핍’이기는커녕, ‘주는 미덕’에 가깝다는 점에서 ‘은혜’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저마다 다르게 욕망을 이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은혜(grâce)라고도 할 수 있고요. 욕망하기는 쉬운 일이 전혀 아니지만, 그것은 결핍되는 것이기는 커녕 주는 것이기 때문이 ‘주는 미덕(vertu qui donne)’입니다.” (D 109; 국165-166) 들뢰즈는 이 때 니체를 떠올리는 것일 텐데, 그는 『들뢰즈의 니체』에서 니체의 텍스트를 선별ㆍ제시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 바 있다. “오, 누가 이러한 동경에 걸맞는 세례명과 덕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증여하는 덕(Vertu qui donne)’이라고 불렀다.” Z 불281; 국313(ND 88-89; 국141-142 재인용)

다른 한편으로 ‘욕망하는 생산’은 ‘기계(machine)’이다. 가타리로부터 연원하는 ‘기계’ 개념3)은, 앞서 살폈듯, 흐름들간의 접속을 통해 ‘절단’되고, 다시 그 흐름의 ‘채취’를 통해 무한히 새로운 배치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유선(乳腺)의 흐름을 절단하여 양분을 채취하는 젖먹이, 태양의 흐름을 절단해 유기물을 채취하는 식물, ‘말벌(guêpe)’의 흐름을 채취하여 수분(受粉)을 절단ㆍ이동케하는 ‘서양란(orchidée)’(MP 291; 국453)은 모두 이러한 ‘기계’의 흐름을 나타내는 사례들이다. 아이가 젖을 빨 때 “욕망되는 것은 강렬한 배아적 흐름(flux germinal) 내지 생식질의 강도(germinatif intense)”이지, “어머니 등으로 분간될 수 있는 인물들”(AO 191; 국282)이 아니다. 어머니의 젖은 어머니라는 개체 전체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를 ‘배아 내류(l’influx germinal)’(AO 191; 284) 또는 ‘배아적 임플렉스(implexe germinal)’(AO 191; 국283)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들이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하나의 ‘배아적 흐름’이자 ‘기계’로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 욕망을 ‘인격적(personnel)’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주의이다. 무의식은 무엇보다도 “전-개체적(pré-individuelles)”이고 “전-인물적(pré-personnelles)“(AO 387; 국537)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욕망하는 생산이 ‘기계’라는 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라고 강조(AO 43-44;74-75)하는 것도, 욕망의 주체를 어떤 단일한 ‘생명’이나 ‘유기체’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기계’로 보는데서 출발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가령 항문-기계와 장-기계, 장-기계와 위-기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 떼의 흐름. 요컨대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AO 44; 국75)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욕망은 어떤 것과 연결되고 절단되는가 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주체들 간의 관계가 아님은 물론, 이 담당자들은 인물들이 아니다. 이 관계들은 바로 생산관계들”(AO 55; 국90)이다.

무의식은 관념적인 것도, 일말의 개념적인 그 어떤 것도, 따라서 인물적인 그 어떤 것도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왜냐하면 인물(personnes)이란 자아(ego)와 마찬가지로, 의식적 또는 정신적-주관적 자아(moi)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분석들은 인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요, 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이른바 인간관계들은 전혀 상관이 없다. 최초의 관계는 인물적인 것도 생물학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이 파악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사실이다.(AO 137; 국207)

 

 

욕망의 수동적 종합과 비인격적 욕망

앞서 니체가 ‘자아(moi)’라는 ‘작은 이성’의 통치자는 ‘신체(corp)’ 내지 ‘자기(soi)’라는 큰 이성이라고 주장했음을 보았다. 여기서 들뢰즈ㆍ가타리 역시 ‘자아(ego)’ 내지 ‘의식적 또는 정신적-주관적 자아(moi)’의 배후로서 ‘인물(personnes)’과는 전혀 무관한 무의식에 주목한다.

여기서 들뢰즈ㆍ가타리는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이 파악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사실”이라고 지적하는데, 정신분석은 저자들이 “정신분석의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 오이디푸스라는 “초월적”(AO 89; 국139) 기준을 통해 욕망을 의인화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욕망하고, 그에 대한 금지로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오이디푸스’는 정확히 인물화된 욕망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상하게 추리해서, 이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욕망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AO 84;132) 이로부터 욕망을 ‘결핍’으로 재현하는 비극적인 서사가 비롯한다.

그에 반해

분열분석이 제시하는 욕망은 비인칭성 내지 비인격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한편으로 욕망이란 단지 생산기계이자 흐름이라는 점에서 어떤 유기적인 주체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는 비인칭적 욕망은 그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전개양상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욕망이 흐름으로서 자신이 정향되어 있는 방향을 그대로 따라갈 뿐 어떤 주체의 명령과도 상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체의 의지에 따라 작동하는 ‘능동적 종합’과 변별적으로 이러한 욕망의 자율적인 작동 양상을 ‘수동적 종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수동적 종합은 들뢰즈가 박사논문으로 제출했던 『차이와 반복』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개념인데, 이는 그가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충동에 주목하는 데에서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미시적인 충동들이 작동하는 무의식의 양상이란 의식적 주체의 ‘능동적’활동과 무관한 내재적인 ‘수동적 종합’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눈이라는 기관의 형성을 사례로 살펴볼 수 있다. 통상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보는 것’이라고 한다. 눈에 맺힌 상을 그대로 인지한다기보다는, 뇌가 ‘재종합’한 영상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눈에 비친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뒤집힌 세계를 지각할 것이다. 더욱이 시각정보가 형성되는 최종 과정은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인 해마를 거친다. 기존의 기억과 비교하여 지각된 시각상을 판단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다. 가령 무지개의 색깔이 언어권에 따라 다르게 지각되는 것은 이러한 판단의 결과일 것이다. 안구를 통해 입력된 정보보다, 뇌를 통해 출력되는 시각정보가 5배가량 많다는 점은 이를 입증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시각정보는 ‘의식적’으로 뇌가 조정한 결과, 즉 ‘능동적’인 종합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들뢰즈는 눈이란 수동적 종합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동물이 스스로 눈을 형성해낸다면, 이는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빛의 자극들을 자기 신체의 특권적인 한 표면 위에서 재생되도록 규정하기 때문이다. 눈은 빛을 묶는다. 눈은 그 자체가 어떤 묶인 빛이다. 이 예를 통해 보더라도 종합이 얼마만큼 복잡한 것인지 족히 알 수 있다. 사실 묶어야 할 차이를 대상으로 하는 어떤 능동적 재생의 활동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깊은 심층에는 어떤 수동적 반복의 정념이 있다. 새로운 차이(형성된 눈이나 바라보는 자아)는 바로 이 수동적 반복에서 유래한다. 차이로서의 흥분은 이미 어떤 요소적 반복의 수축이었다. 이번에는 흥분이 다시 반복의 요소가 되므로 수축하는 종합은 어떤 이차적 역량으로, 정확히 말해서 묶기나 리비도 집중에 의해 대변되는 역량으로 고양된다. 리비도 집중들, 묶기나 통합들, 이것들은 수동적 종합들이자 이차적 등급의 응시-수축들이다. 충동들은 묶인 흥분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각각의 묶기가 일어나는 수준마다 어떤 하나의 자아가 이드 안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이 자아는 수동적이고 부분적이며 애벌레 같은 자아, 응시하고 수축하는 자아이다.’(DR 128-129; 국222)

 

우리 신체에는 차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질적인 것들이 세포차원에 존재한다. 이 세포들에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빛의 자극들’이 가해진다. 세포들 중 몇몇이 이 자극에 반응한다. 이 세포들은 ‘자기 신체의 특권적인 한 표면 위에서’ 빛이라는 자극을 ‘재생’한다. 자극-반응의 과정이 반복된다. 이로써 ‘빛을 묶는’ 기관, 즉 ‘요소적 반복의 수축’으로서 ‘눈’이 출현한다. 이러한 자극-반응의 반복을 묶는 주체로서, 들뢰즈는 자아 이전에 ‘애벌레 같은 자아(sujets larvaires)’를 상정한다. ‘봄’이라는 목적과는 무관하게, 들뢰즈는 특정한 자극에 반응하는 세포들이 응결된 것이 곧 눈이라는 기관을 출현시킨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눈은 바로 이 수동적 반복에서 유래한다. 이렇게 반복의 결과, 일단 눈이라는 기관이 형성되면, 이제 눈은 빛이라는 자극을 기다린다. 즉 빛이라는 자극을 향한 일관된 ‘충동’을 형성한다. 때문에 들뢰즈는 ‘각각의 묶기가 일어나는 수준마다 어떤 하나의 자아가 이드 안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최초의 차이나는 것들이 프로이트식의 ‘이드’라면, 그를 일관된 충동으로 묶어내는 수동적 종합물로서 출현하는 ‘애벌레 주체’가 ‘자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미 반복의 결과 수축의 산물로서 출현한 ‘애벌레 주체’는 다시금 반복하고자하는 단일한 ‘충동’을 형성함으로써 ‘이차적 역량’으로 고양된다.

들뢰즈는 상세한 추가설명을 덧붙이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시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는 수동적 종합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시한다. 가령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의 경우, 시각정보가 뇌의 능동적인 지각작용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흰 색 옷을 선수들이 공을 몇 번 튕기는지 세어보라는 요구를 받은 피실험자들은 검은 털투성이인 고릴라가 농구장의 정중앙에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타나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동일한 영상을 보았을 때, 피실험자들은 고릴라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 즉 주의집중의 여부와 관련해 ’능동적‘으로 형성되는 시각정보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를 갖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인간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자신의 후면을 보지 못한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뒷면은 인간에게 사각(死角)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초식동물은 사각이 없기 때문에 전방을 볼 수 있다. 가령 토끼의 사각은 0˚, 말의 사각은 3˚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종마다 상이하게 ‘수동적’으로 종합된 시각기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각기관이 형성되는 과정 역시 전적으로 ‘수동적 종합’이라는 점이다. 시각정보가 형성되는 과정은 적어도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1)각막이 파장으로서의 가시광선을 지각한다. 2)망막의 시신경이 가시광선을 전기신호로 변환한다. 3)후두엽으로 전달된 전기신호가 약 15개의 시각영역에 따라 색과 형태, 움직임, 깊이 등의 정보로 처리되어 하나의 영상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망막에서 전기신호로 변환되기 전부터, 유리체 안의 세포들은 색깔을 지각한다. 색각을 담당하는 ‘원뿔세포’는 각각 특정 파장 영역에 해당하는 색의 빛에 반응한다. 망막은 이미 색의 정보를 계산한 다음에 뇌에 전달하는 셈이다. 앞선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파란색이라는 자극에만 반응하는 세포들, 빨간색에만 반응하는 세포들 각각이 1)에서부터 ‘파란 원뿔세포’, ‘빨간 원뿔세포’ 등으로 수동적 종합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망막에 이 각각의 원뿔세포가 없는 경우, 이러한 세포적 수준의 종합이 일어나지 않아 선천성 색각 이상이 일어난다. 반면 1)에서는 입력되지 않았던 정보가 3)의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종합되기도 한다. 가령 한쪽 눈의 맹점은 다른 한쪽 눈의 시야에 포함되기 때문에 두 눈으로 보는 경우에 우리는 맹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한 쪽 눈을 감아도, 시야에 구멍은 생기지 않는다. 이른바 ‘망막 충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상의 생리학적인 과정은 다소 기계적인 작동처럼 보인다. 자동연산과정처럼, 어떤 입력값을 정해진 도식에 따라 오차없이 정확하게 출력해내는 ‘자동적인’ 과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가령 클로소프스키는 “비생물에게는 오해가 없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기적 세계에서 오류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수소 두 개에 산소 한 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한 이 결합을 통해 물(H2O)을 만들어내는 원자간의 배합과 달리, 인간만큼 짝을 찾는데 무능한 동물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즉 의식이 없다고 간주되는 무기물의 세계에서는 결합의 법칙이 정확하게 이뤄지는 반면, 의식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는 그에 따른 오류가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를 다시 수동적 종합과 결부지어 생각해본다면, 수동적 종합은 말하자면, 오차가 없는 무기물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자동적 종합과 같다. 달리 말하면, 수동적 종합이란 의식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어떤 오류나 지연을 보이지 않는 종합, 그렇기에 ‘자동적 종합’ 내지 ‘기계적 종합’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종합인 셈이다.

이처럼 세포 수준에서의 수동적 종합과정을,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어 “수축(contraction)”(DR 129; 국222)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가령 ‘빠바바밤’이라는 선율을 들을 때, 우리는 ‘빠’, ‘바’, ‘바’, ‘밤’이라는 4음절로 그것을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선(旋)율이라고 지칭한다. 즉 우리는 그 소리를 하나의 선율로 수축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직접 제시하는 사례는 시계의 틱톡거리는 초침 소리이다. 우리는 ‘틱톡틱톡틱톡...’이라는 반복되는 시퀀스 안에서 ‘틱톡’이라는 쌍을 자연스럽게 수축하고, ‘틱’ 후에는 ‘톡’이 올 것을 기대한다. 마치 쥐불놀이때 빠르게 돌아가는 불붙인 마른 풀에서 원환운동을 지각하듯, 우리는 비연속적인 자연물리적현상을 연속적으로 ‘수축’하여 감지한다. 이때에 수축 자체가 자연물리적 현상 자체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 수축작용은 인식의 주체로부터 기인하고, 다시 그 주체는 통일된 유기체이기 이전에 세포 차원에서 성립하는 미시적인 지각작용 내지 종합작용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이러한 수동적 종합을 강조하는 것은, 의식 이하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종합들에 먼저 주목하길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성장발달의 각 단계에서 형성되는 어떤 “주체성”이 “정신에 대한 지배의 충동과 경쟁하는 무의식적인 시도”를 구성한다는 니체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한다.

이처럼 통일된 유기체이기 이전에 세포 차원에서 성립하는 미시적인 지각작용의 주체를 들뢰즈는 “응시하고 수축하는 자아”(DR 128-129; 국222) 내지 ‘응시하는 자아’(DR 103; 국181)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차이는 ‘즉자적’인 반면 반복은 ‘대자적’이라고 표현하는데, 반복이라는 행위를 ‘수축’하는 ‘애벌레 주체’의 ‘응시’가 있을 때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DR 96; 국169)

바꿔 말하면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는 것이고, “행위와 능동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DR 103; 국181)인 셈이다. 이 부분에서 들뢰즈는 ‘수동적’ 종합과 ‘수용적’ 속성은 분명 구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외부자극에 따라 인상이나 감각을 ‘수용’하는 층위에서 주체는 “변용들을 겪는 능력”에 불과하다. 반면,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DR 118; 국205)된다. 들뢰즈가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오로지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mille témoins)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런 역할은 언제나 합성된 행위 주체의 기저에 놓인 어떤 응시하는 영혼과 관련해서 주어진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오로지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말하는 것은 항상 어떤 제삼자이다.(DR 103; 국18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전체를 걸쳐서 ‘의식적 주체’라는 용어를 삼가는데, 이러한 ‘수많은 목격자들’인 ‘애벌레 주체들’ 내지 ‘응시하는 자아들’에 의해 이차적으로 구성ㆍ출현하는 것이 그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통상 ‘주체’라는 의미에 담고 있는 ‘의식적’임을 표현할 때, 들뢰즈는 차라리 “재현의 주체”(DR 247; 국416)라는 표현을 선택한다. “재인과 분리 할 수 없”는 “심사숙고”의 수행주체이자 “사유하는 주체”(DR 247; 국416)라는 점에서 “재현의 주체”는 “의식의 명제”(DR 248; 국417)에 관여하는 다름 아닌 ‘의식적 주체’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의 어떤 ‘총괄적 적분’으로서 출현하는 ‘능동적 자아’가 ‘작은 자아들’ 내지 ‘애벌레 주체들’과 대립하고 제한한다기보다는 ‘여전히 같은 발걸음 안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정신분석을 따라 의식 이하의 수준을 지배하는 것이 ‘쾌락원칙’이고 그를 ‘묶어내는’ 것이 의식 수준의 ‘현실원칙’이라면, 이 두 원칙은 ‘여전히 같은 발걸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수동적 자아들은 이미 어떤 통합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국소적 적분(積分)들에 불과하다. 반면 능동적 자아는 총괄적 적분을 시도한다. 정립된 현실의 위상을 외부 세계에 의해 산출된 어떤 효과에, 심지어 수동적 종합이 마주친 실패들의 결과에 결부시키는 것은 결코 정확하지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현실검사는 자아의 모든 능동성을 동원하고 부추기며 고취한다. (...) 현실원칙이 마치 쾌락원칙에 대립하고 쾌락원칙을 제한하며 쾌락원칙에 포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역시 결코 정확하지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두 원칙은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넘어서는 것이라 해도 여전히 같은 발걸음 안에 있다. (...) 현실원칙은 단지 선행의 수동적 종합들에 정초를 두고 있는 한에서의 능동적 종합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DR 131; 국225-226)

 

 

이로써 우리는 무의식에 거주하는 복수의 충동과 욕망들이 어떻게 전의식적인 차원에서 수동적 종합을 이뤄내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각각의 세포들이 저마다 욕구하는 바에 따라 미세충동을 갖고 그러한 충동이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 일종의 쏠림을 만들어낼 때, 그것이 곧 기계적 종합 내지 수동적 종합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복수의 충동과 욕망들 수준에 주체가 관계한다면, 그것은 오직 작은 자아 내지 애벌레 주체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미시차원의 것, 그리고 동시에 의식과 무관하다는 수동적인 것들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 종합 양상은 어떻게 욕망이 단일한 유기체 내지 의식적 주체와 구분되어야 하는가를 드러냄으로써, 그 비인칭성의 의미를 전면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비인칭성 내지 비인격성은 욕망기계들이 관계하는 대상 역시 유기적인 것일 수 없다는 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들뢰즈ㆍ가타리는 욕망기계들의 대상이라는 말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부품’이라고 쓰길 원하는데, 이는 욕망의 반대편에 대상을 위치짓는 사유에 반대하기 위함이다. 기계로서의 욕망은 다른 욕망기계들을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기 보다 그것들과 접속되고 절단되는 가운데 만남과 종합 내지 뒤섞임, 해체와 분리를 반복하길 그치지 않는 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욕망기계의 ‘부품’으로서의 ‘부분대상(objets partiels)’(AO 385; 국535)이다.분열분석이 제시하는 욕망은 비인칭성 내지 비인격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욕망기계들을 구성하는 ‘부품’으로서의 ‘부분대상(objets partiels)’(AO 385; 국535) 개념이다.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이 정식화한 개념인 부분대상은 본래 아동에 대한 정신분석에서 비롯한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구순기-항문기-성기기’4)의 시기별 특성에 따르면, 구순기의 유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빨 것’으로 표상한다. 이 때 엄마의 젖조차, ‘엄마’라는 인칭성과는 무관한 하나의 ‘빨 것’으로만 존재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처럼 어떤 유기체적 통일성과 무관하게, 오롯이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파편적인 것들을 부분대상이라고 칭한다.5) 들뢰즈가 제시하는 유기체적 통일성 이전에 스스로 작동하고 종합하는 욕망기계 역시 이러한 부분대상이라는 부품을 통해 작동한다. 파편화된 욕망들의 흐름들과 이에 대한 절단과 채취, 그 과정 속에서 수동적 종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모든 부분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방출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이 흐름도 마찬가지로 다른 부분대상에 연합되어 있으며, 이 부분대상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다양한 퍼텐셜을 지닌 현전의 장을 정의한다. (...) 부분대상들의 연결적 종합들은 간접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분대상은, 장(場) 안에서 현전하는 각 점에서, 다른 부분대상이 상대적으로 방출하거나 생산하는 하나의 흐름을 언제나 절단하며, 또한 이 다른 부분대상 자체도 또 다른 부분대상들이 절단하는 하나의 흐름을 방출할 태세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는 머리가 둘인 흐름과도 같아서, 이 흐름들을 통해 우리가 분열-흐름 내지 흐름-절단이라는 개념으로 고찰하려고 했던 그런 생산적 연결 전체가 행해진다. 그래서 흐르게 하고 절단한다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은, 수동적 종합이 상이한 두 기능의 상대적 공존과 이전을 보증하는 한에서, 이 수동적 종합 자체에 있다.(AO 338; 국538-9, 강조는 인용자)

 

흐름들간의 접속, 이것들간의 절단과 채취가 발생하는 사태를 들뢰즈ㆍ가타리는 “머리가 둘인 흐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의 두 머리”를 “중화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들은 수동적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기관 없는 신체의 정립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이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기관없는 신체의 정립을 내포한다. 이는 기관 없는 신체가 부분대상들-기관들의 반대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신체 그 자체는 욕망의 두 활동, 욕망의 두 머리를 중화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으로서, 연결의 최초의 수동적 종합에서 생산된다. (...) 부분대상들-기관들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 매달리며, 그 위에서 포괄적 분리와 유목적 결합, 즉 유기체와 유기체의 조직화에 끊임없이 반발하는 겹침과 교체라는 새로운 종합들 속에 들어간다. 욕망은 바로 신체를 지나가고, 기관들(organes)을 지나가지, 결코 유기체(organisme)를 지나가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부분대상들은 조각나고 파열된 유기체의 표현이 아닌데, 이 유기체는 하나의 해체된 전체성 내지 하나의 전체에서 해방된 부분들을 전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필경 자신의 부분들을 넘어설 다시 접착된 또는 ‘탈-분별된(de-différencié)’ 하나의 유기체의 표현은 더더욱 아니다. 그 바탕에서, 부분-기관들(organes-partiels)과 기관 없는 신체는, 분열분석에 의해 그렇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하나의 같은 것, 하나의 같은 다양체(multiplicité)이다. (...)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신체는 분열증적 욕망 기계들의 두 질료적 요소이다. 전자는 일하는 부품들과 같고, 후자는 부동의 모터와 같으며, 전자는 미시분자들과 같고 후자는 거대분자와 같으며, 이 둘은 한데 어우러져 욕망의 분자적 사슬의 두 끝에서 연속성의 관계를 이룬다.(AO 390; 국541-542)

 

들뢰즈ㆍ가타리는 부분대상들이 “일하는 부품들”이라면 기관 없는 신체는 “부동의 모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신체는 분열증적 욕망 기계들의 두 질료적 요소이다.”(AO 390; 국542)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는 “흔히 얘기되는 몸, 또는 신체의 이미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지 없는 신체”(AO 14; 국33)로서 “흐름의 생산을 전유하는 받침대”(OA389; 국541)로 정의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어떤 ‘기관들(organes)’에 종속되어 제한된 기능만으로 작동하는 유기체에 반하여 모든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 무한한 역량을 내포한 원시적 동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홀랜드는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는 “신체가 어떻게 기관들로 구성되어있는지(organized), 그리고 다른 종류의 구성체를 생산하기 위해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해체될 수 있는지 등등의 질문을 효율적으로 던지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한다. 분열분석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다수의 ‘기관들(organes)’로 구성된” 일종의 “조립(assemblage)”6)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동의 모터’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에 의해 끊임없이 자양분을 받아 ‘작동’하고 ‘일하는’ 것은 부분대상들이다. 정신분석이 인격적 자아에 소유된 것으로서 무의식을 상정하는 데 반해, 들뢰즈ㆍ가타리는 이 둘, 즉 기관 없는 신체와 부분대상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는 “욕망의 분자적 사슬”을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기관 없는 신체라는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덧붙는다.”(AO 389; 국541) 이러한 ‘어우러짐’을 통해 부분대상이라는 ‘국지적 흥분’이 결국 ‘총체적 반응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저자들이 의미하는 무의식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자아와는 무관한 수동적 종합인 셈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멜라니 클라인의 논의처럼, 부분대상을 “온전한 인물들에서 채취된 것”(AO 53; 국87)으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부분(part)은 흔히 전체(whole)로 오해되기 일쑤이며, 심지어 주체(subject)로 인식되는 실수가 저질러”지기도 하지만 “사실 주체는 자기 자신을 형성하기도 바쁘며, 다른 맥락에서 선택되고 생산된 주체성의 형성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7)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ㆍ가타리가 상정하는 충동이란, “충동의 대상들과 함께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향해 가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충동들의 진화란 없”으며, “충동들이 파생되어 나오게 될 원초적 총체성이란 것도 없다.”(AO 52; 국86) 자아를 “하나의 개념적인 종합에 불과”(VP 251; 영199; 국232, BM 불36; 국38)한 것으로 여기는 니체와 같이, 들뢰즈ㆍ가타리에게 ‘유기체(organisme)’란 그러한 부분대상의 국소적 종합을 통해 사후적으로 ‘종합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에 대응해, 부분대상이 기관 없는 신체의 정립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와 같은 전체성을 내포하지 않는 한에서, “강도의 이런저런 등급으로 공간을 언제나 채우고 있는 질료”이자 “내공=0”을 가리키는 “부분대상들의 원료”로서, 부분대상들은 언제나 이 “질료에서 출발한다.”(AO 390; 국542)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이 2)기관 없는 신체를 부분대상 내지 그것들의 국지적 종합의 산물인 통합적 유기체를 ‘낳는’ 모태적인 근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들뢰즈ㆍ가타리는 “기관 없는 신체는 신(神)이 아니다, 차라리 정반대다”(AO 20; 국40)라고 말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생산 전부를 끌어당겨 기적을 낳는 마법적 표면 노릇을 하”지만,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즐겨 쓰듯, 경제학적인 리비도의 투자에 관여되는 ‘투자’이자 ‘기입’의 한 표면을 나타낸다. 들뢰즈ㆍ가타리가 기관 없는 신체를 “마법적 기입” 내지 “등록 표면”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때문인데, 욕망이 기관화된 흐름을 절단하고, 다른 새로운 흐름으로의 채취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그 생산과정을 기입하는 등록 표면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관 없는 신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관 없는 신체에 역시 어떤 실체성을 부여해, ‘기관 없는 신체‘로부터 ‘부분대상’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체란 것이 있다면 오직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욕망 밖에 없다. 기관 없는 신체는 이런 점에서 오히려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욕망이 기관화된 흐름에서 벗어나 다른 새로운 흐름으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완전한 미규정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어서

 

1)프로이트와 들뢰즈는 그것(ça)의 ‘분화’ 내지 ‘파생’으로서 자아(Ich, moi)를 동일하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같은 견해를 형성한다.

2)Freud, 「무의식에 관하여」, 『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189-190쪽을 참조하라.

3)가타리로부터 제안되었지만, 당시에 가타리는 아직 ‘구조’, ‘기표’ 등과 결부시켜 ‘욕망하는 기계(machines désirantes)’ 개념을 사유하고 있었다. 들뢰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펠릭스는 나에게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에 대하여 얘기해주었습니다. 기계적 무의식적, 정신분열적 무의식을 이론적ㆍ현행적으로 개념화하고 있는 그 말을 그는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기계적 무의식을 여전히 구조라든가 기표, 팔루스 등과 같은 용어로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나 역시도 그랬지만) 많은 것을 라캉으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창시자 라캉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리로부터 나온 용어들을 사용하는 대신, 적당한 개념들을 찾아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 개념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빚지게 된 셈입니다.”(PP 24-25; 국 39-40)

4)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96-97쪽을 참조하라.

5)들뢰즈는 부분대상의 발견이라는 클라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부분대상을 ‘전체에 종속된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부분대상들에 대한 심오한 발견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관점에서 흐름들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흐름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그녀는 모든 연결을 합산한 것이다.’(AO 44;75)’이하 들뢰즈의 부분대상 개념 수용과 변형작업에 관한 논의는 ‘김재인, 「들뢰즈의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론」, 『미학예술학연구』 41집, 2014’의 36-39쪽 참조하라.

6)Holland, lbid, p.28

7)Holland, lbid,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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