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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위해 목을 맨 아버지

 

 

 

 

고병권/수유너머R 회원

 

 

 

 

2010년 10월, 한 아버지가 여의도 공원 나무에 목을 매고는 숨을 거두었다. 유서에는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에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한 일용직 노동자가 장애인 아들에게 기초생활급여와 장애아동수당 같은 걸 받게 해 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지난 2년간 여기저기를 떠돌던 나는 이 중요한 ‘사건’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신문 기사를 읽었을 때, 유서로 남겨진 짧은 두 개의 문장을 이루는 모든 단어들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아들, 나, 때문에, 못 받는 것, 죽으면, 동사무소, 혜택…’ 낱낱으로 떼어놓고 보면 평범한 단어들인데, 이 평범한 말들이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숨겨진 골들을 따라 저 말들이 쭉 늘어서니, 장애에서 복지, 가족,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형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때문에 아버지가 목숨을 끊은 ‘아들’, 아마도 평생을 ‘나’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짐을 지고 가야 할 그 아들은 누구였는가. 겨우 열두 살. 한쪽 팔을 잘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끔 발작이 일어났다. 병원에서는 뇌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 그의 가난한 아버지는 300만원이 찍힌 치료비 영수증을 받아들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아버지가 목을 매고 죽었다. 이 죽음은 아마도 열두 살의 어린 아이에게 평생 떨쳐내기 힘든 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그에게 짐이 되기 이전에, 그는 먼저 아버지에게 ‘짐’이었다. 장애인으로서 그의 존재는 이 사회에서 이미 ‘짐짝’과 같았다. 아버지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부탁하며 ‘혜택’이라고 불렀던, 그런 사회의 동정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고, 그 동정을 구하며 아버지는 ‘나’를 위해 죽었다.

 

그럼 장애인 아들이 나 때문에 죽게 생겼기에 나를 죽여야 했던 아버지인 그 ‘나’는 누구였는가. 그는 1988년 구속되어 1994년에 출소한 전과자다. 용접공으로 일한 적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로 불리는 ‘잡일’을 하기도 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나중에는 아예 좀처럼 구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아내는 딸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딸들이라도 살려보려고. 아들이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이런 저런 수당과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받으려면 기초생활수급자여야 했다. 그래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보았는데 본인에게 노동 능력이 있기에 신청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하필이면 내가 노동능력이 있어 아들이 살 수가 없다.’ 일자리는 없고 아들의 의료비는 너무 높고, 그는 ‘내가 죽어야 아들이 산다’는 정신 나갈 정도로 비극적인,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과히 틀리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말도 안 되는 그의 선택이 우리 체제에서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체제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유서에 ‘나 때문에’라고 썼다. ‘때문에’라는 말. 한번 물어보자. 누구 때문인가. 누가 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생존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공원에서 목을 맨 아버지는 ‘나 때문에’라고 말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그의 실직과 가난 때문일까? 또 그의 실직과 가난이 정말 그 자신의 어떤 잘못 때문일까? 2000년대 이후 불과 십여 년 만에 절대적 빈곤율이 두 배 가까이 늘고(2002년 5.2%에서 2009년 11.5%로) 여섯 명에 한 명꼴로 상대적 빈곤층이 급증한 것은, 정말 목을 맨 그 아버지 때문인가.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자유주의시장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19세기 이후 사람들이 망각해버린, 원시 공동체의 귀중한 진실을 이렇게 들려준 바 있다. “궁핍이란 있을 수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는 누구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움을 얻는다.… 생존의 한계선에서 생활하는 사회에도 굶주림이란 없다. 공동체 전체가 궁핍에 빠지지 않는다면 개인이 굶주릴 위험에 처하는 법이 없다. ” 다시 말하자면 사회 전체가 먹고 사는 게 아슬아슬할 지경이라도 개인이 굶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원시공동체에서는 모두가 굶어죽을지언정 개인이 굶어죽지는 않는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즉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절대빈곤층이 두 배 넘게 증가한 똑같은 시기에 금융소득 10억이 넘는 부자도 두배 넘게 증가했다(2002년 5만 5천명에서 2009년 13만 2천명으로). 누군가 일자리를 잃고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시점에 누군가 막대한 부를 축적해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공동체, 사회, 국가 같은 것이 사라졌다는 말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물어보자. 누구 때문인가. ‘때문에’라는 말 앞에 놓여야 할 존재는 누구인가. 폴라니 식으로 말해보자면, 그것은 그 말 앞에 마땅히 놓여 있어야 할 어떤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로 공동체, 사회, 국가 말이다. 공동체가 없기에, 국가가 사라졌기에, 개인이 굶어죽는 것이고, 개인이 장애로 고통 받는 것이고, 개인이 목을 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악랄하게도, 자기의 부재에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국가가 책임에서는 빠지고 무슨 시혜를 베푸는 천사인양 행세한다. 죄악은 너와 네 가족에 있고 구원은 내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상징적인 예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다. 이 법은 국가가 마땅히 국민의 기본생계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담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 들어 있는 ‘부양의무제’를 보면 생계 부양의 의무가 개인과 가족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이른바 ‘가족부양원칙’). 부양의무자에서 국가는 빠지고 개인과 가족이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다. 국가는 그저 돕는 자로서 행세한다. 그래서 우리의 ‘목을 맨’ 불쌍한 아버지는 ‘동사무소’(국가)에 읍소해야 했다. 자기가 죽었으니 제발 자기 아들에게 ‘혜택’을 달라고, ‘은혜’를 베풀라고.

 

이 비극적 사건의 주범이 이 사건의 은혜로운 구원자로 등장하게 된, 이 악랄한 사건 조작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국가의 부재, 공동체의 부재는 장애로 한 아이가 겪게된 고통, 그리고 실직과 가난으로 아이의 생존을 위해 한 아버지가 생을 단념해야 했던 사건의 일차적 원인이며, 이는 우리에게 ‘우리’라는 말을 불가능케 한, ‘우리’에 대한 국가의 배반이자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배반과 배신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그리스의 한 늙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긴 말로 대신하고 싶다. 금융위기로 연금을 날려 생계가 막막해진 디미트리스 크리스툴라스(Dimitris Christoulas)는 의사당 바깥에서 자살하며, 자기 자신과 자식들의 삶을 망친 배신자들에게 이런 유서를 남겼다.

 

“정부는 내 삶의 모든 길들을 지워버렸다. 내가 국가의 도움 없이 지난 35년간 적립해온 연금에 기대서 구축해온 존엄하게 살아갈 모든 길들을….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 세차게 저항할 수가 없으니(그리스인 중 누군가 정말 총을 들고 일어선다면 나도 거기 동참할 텐데), 내 삶의 존엄한 끝을 스스로 맞이할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무런 미래가 없는 젊은이들이 언젠가 무기를 들고 이 나라의 배신자들을 신타그마 광장에서 처형시키리라 믿는다. 1945년 이탈리아인들이 무솔리니를 그렇게 했듯이.”

 

 

※ 이 글은 계간 <함께웃는날>에 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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