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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리뷰]


슬픔의 순도 100%인 유가족은 있다?!? 없다?!?

(정혜신·진은영,<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2015, 창비)

 




임당 / 수유너머N 회원 









1박 2일이 예정된 노동절 집회에서 여러 차례 최루액 물대포를 맞은 후 잠잠해진 시각은 대략 12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연구실 사람들은 자리를 펴고 각자 싸온 먹을거리들을 펼쳐 놓고 앉아 허기를 달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보송보송 머리가 자라난 반삭의 한 유가족 엄마가 생글생글 장난기 가득한 동자승 같은 표정으로 껌을 들고 다가왔다.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다. ‘유가족이 껌을 파나?’ 유가족이 껌을 판다면 당연히 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긴 했으나... 그럴 일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지?’하고 어리둥절한 찰나였다.

 

“아니? 여긴 먹을 게 많잖아~? 껌 씹으면 다 소화되니까 여긴 안줘야겠다!”

 

그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는 또 아이처럼 팩 하고 돌아서서 생글생글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실상은 물대포와 장렬히 혹은 반쯤 빗겨 서서(?) 맞서 싸운 우리들에게 뭐라도 나눠주고 싶으셨던 게다. 이상한 오해를 했던 게 우습기도 하고, 유가족의 밝은 모습을 보니 괜시리 웃음이 느물느물 새어 나왔다. 그런데 그 유가족 엄마가 뒤를 따라가던 약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유가족 엄마가 저러고 다니니까 이상하죠?^^;”

 

라며 걱정하는 기운을 내비쳤다. 순간 복잡한 생각이 지나갔다. 그 아저씨의 걱정을 알 것도 같았다. 세월호 유가족을 둘러 싼 수많은 시선들, 기자들의 날 선 펜대들,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이들의 말, 말, 말들... 그것들이 그들을 못살게 굴었던 거다. 유가족이 울 때, 웃을 때, 화를 낼 때, 절망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렸고, 작년 4월 16일 이후부터 유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은 아이돌의 그것 못지않게 낱낱이 까발려졌다. 그를 통해 유가족은 힘과 용기를 받기도 했지만, 비난과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보냈을 그들의 복잡한 일 년이 그 아저씨의 걱정스러움 속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트라우마와 이웃되기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고통은 삶을 어렵게 할 만큼 차고 넘친다. 그런데 고통은 다른 방식으로도,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온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 죽어갔을 아이를 상상해 내고야 마는 고통.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서 오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또 내가 내 자식을 사지로 내 몬 것 같은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도 있다.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고통은 아니지만 유가족 부모들은 스스로를 죄책감의 바다로 밀어 넣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이다.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거리며 유가족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시선들, 한동안 슬퍼했으면 이제 그만 울고 좀 조용히 해 주었으면 하는 시선들, 어디 가서 웃거나 술이라도 마실라 치면 ‘유가족이 뭐 저렇게 신났어?’ 하며 내내 ‘순도 100%의 슬픔’만을 요구하는 시선들. 이 시선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유가족의 상을 보길 원하고, 그것이 어긋날 경우에는 말도 못할 비난을 퍼 붓는다. ‘유가족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말이다. 이처럼 이중 삼중고에 놓인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한번은 류현진 선수가 나오는 야구경기 중계가 나왔는데, 아빠들이 무심코 보다가 재밌어진 거예요. 그러다 류현진 선수가 너무 잘 던지니까 어느 순간 환호를 했대요. 그러고 나서 서로를 돌아본 거죠.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고요. 그 아빠가 그 얘기를 하면서 ‘세상에, 애를 잃어 놓고는 야구를 보다가 환호를 하다니, 내가 인간입니까’ 하고 괴로워하시더라고요. 네, 인간이죠. 인간이니까 그러는 거죠. 유가족이라고 이십사시간 내내 유가족으로 사는 건 아니에요. … (중략) … 그러니까 우리가 머릿속에 유가족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틀을 가지고 보면 그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폭력이 돼요.”(35)

 


치유공간 ‘이웃’을 운영하고 있는 정혜신 박사를 시인 진은영이 인터뷰한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에서 정혜신은 이를 유가족이 겪게 되는 2차 트라우마 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는 이들을 두고, ‘당신 트라우마요. 자 이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게 쉬어 보세요, 당신은 괜찮아 질 겁니다.’ 하며 멀찍이 관조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유가족 개인이 겪은 문제로 환원해 질병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유가족의 트라우마를 삶의 문제로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 트라우마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엮인 죽음과 삶을 온통 들쑤시고 다닌다. 안산에 위치한 치유 공간 ‘이웃’은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정혜신 박사는 여기서 유가족들과 치유 모임을 열기도 하고,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밥을 해서 나눠먹기도 한다. ‘제대로 울 곳조차 없는 이들을 위한 장소에요’ 정혜신 박사가 ‘이웃’을 소개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잃고 돌아온 밤, 부모가 통곡을 하니 옆집에서 따라 울었다. 밤마다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100일쯤 지나자 옆집에서 신고를 했다. 야박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 잃은 부모를 생각하면 여전히 안됐고 아이가 그리된 것도 한없이 가엾지만, 출근도 해야 하고 내 아이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밤새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이웃의 고충을 알기에 부모들은 목 놓아 울지 못하고 숨죽이며 흐느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방해받지 않고 아무 때나 달려와서 실컷 울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했다.”(10)

 

 







죽음 이전의 삶을 넓게 꾸려보는 것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정혜신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은 모두 삶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했을 때는 당연히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죽을 번했던 경험의 강렬함, 가까운 이의 죽음을 보고 겪은 그 강렬함이 시간을 붙잡아 둔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다른 점은, 스트레스는 어찌됐건 적정 수준 이하에서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하지만, 트라우마가 생기면 삶이 깨져 버린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그 경험을 중심으로 시간이 멈추는 것, 곧 삶도 정지해 있는 것이 지금 유가족들 대부분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트라우마를 깨어 나가도록 돕는 것이 정혜신 박사가 ‘이웃’에서 주로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이의 죽음 이전의 삶을 이야기하며 죽음과 대면하는 일이다. 애도를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 이야기가 가장 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또 세상에서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 쉬쉬하고 피하면 누구하고도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잖아요. 갑자기 단절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밖에 할 수가 없는데, 아무도 아이에 대해서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삶이 그 순간에 정지된 채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거죠.”(37)

 


그래서 희생된 아이의 생일에는 생일 모임을 연다. 그 생일 모임에 부모님들은 아이들 생전에 어떤 아이었는지 이야기를 해주고, 시인들은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시를 써 보낸다. 희생 학생의 친구들이 모여 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들은 희생 학생과의 소소한 기억들 경험, 추억들을 이야기 해주고, 이러한 일들은 부모님들에게도 희생 학생의 친구에게도 좋은 치유의 경험이 된다고 한다. 아이를 중심으로 관계들이 다시 연결되고, 서로의 기억들이 연결되어 한명의 죽음 이전의 삶이 풍부하게 꾸려지는 것이다.

 


“어떤 기록은 다른 면에서도 부모에게 위로가 돼요. 대개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지 못하니까, 부모로서는 아이의 삶이 너무나 허무하게만 느껴지죠. 제대로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꽃이 피지도 못하고 져버렸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아이와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되면 ‘내가 몰랐지만 내 아이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낸 순간들이 있었구나. 이런 관계가 있었고, 이렇게 적극적인 삶을 살았구나’하고 실감하게 되는 거죠. 그게 위로가 돼요.”(40)

 



각자의 방식으로 이웃 되기

 

진은영은 정혜신에게 꼬리표를 붙여 준다. ‘사랑의 과학자’.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감상적인 접근이 아닌,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피고 행동하기 때문이란다.

 




“이웃에 대한 환대와 사랑은 아둔할 정도로 희생적이고 선량한 마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의 신비가 강조될수록 우리는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는 이웃에 가닿을 만큼의 신성을 가지고 있기는커녕 생계 때문에 사랑의 순결을 유보해야 하는 무력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그녀는 이웃집 천사가 되기 위해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변하지 않았다. 다만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가가고 사랑하는 일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1)

 



이를 읽은 독자들은 진은영 시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 이전 세월호에 대한 작가들의 기록이었던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그는 니체의 표현을 빌려 선량한 연민을 버리고 용기 있는 자의 수치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었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는 진은영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간 어떤 움직임이며, 잔해 속에서 들어 올린 또 하나의 벽돌이었던 것이다. 브레히트의 시에 등장한, 자신의 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하는 사람, 그리고 집이 무너진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 진실과 용기가 살아 있음을 믿고 싶은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 말이다. (진은영 시인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하며, 세월호 문제에 대항해 행동하고 있는 유가족의 모습을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묘사한 바 있다.)

 

정혜신 박사의 벽돌은 유가족들 안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트라우마를 치유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유가족들 각각, 희생 학생들 각각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말 걸어주고 이야기를 끄집어내 주는 것, 그것이 정혜신 박사가 이웃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아이들의 생일 모임을 하고, 유가족들에게 좋은 음식을 정성껏 해 먹이는 이유일 것이다. 치유의 힘은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힘, 진실을 밝히는 힘으로 고리를 꿴다. 그리고 이를 곁에서 열심히 살피고, 희생 아이들을 위해 시를 짓던 진은영은 정혜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웃’이 되기 위한 또 다른 결을 독자들에게 열어 보인 것이다.


미류와 같은 인권 활동가는 인권 활동의 방식으로, <눈먼 자들의 국가>에 참여한 작가들은 글을 쓰는 방식으로, 세월호 집회에 연대하는 시민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해 이름을 적고 국화 한 송이 놓는 시민들은 또 그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세월호 사건해결의 이웃으로 서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정혜신 박사가 가장 잘 할 수 있으면서도 유가족에게 정말 필요했던 일은 바로 치유였다. 그리고 이제는 진은영과의 인터뷰를 빌어 독자들의 곤란함에 또한 선뜻 손을 내민다.

 

이 책에는 단원고 유가족뿐만 아니라, 생존 학생, 살아남았던 트럭 운전기사, 희생 학생의 친구들, 세월호를 타고 몇 주 먼저 수학여행을 다녀 온 학생, 그리고 세월호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그렇지만 고통을 함께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있다. 이들 각각의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는 지의 문제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 맺고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차가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위한 전제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기에 세월호 트라우마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이웃 되기, 그를 위해 어떤 벽돌을 집어 낼 것인가?






 

글을 다 쓰고 보니 유가족 엄마가 왜 껌을 나눠줬는지에 대한 농을 치고 싶어졌다. 그 엄마는 경찰은 껌이라고, 데모는 껌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껌처럼 질겅질겅 씹히는 것이 유가족의 운명임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한번 밑창에 붙으면 어지간히도 떨어지지 않는 질척한 연대를 꿈꾸고 있었던 걸까??! (흠, 벽돌도 잘 붙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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