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적 퍼스펙티비즘과 코로나사태
정 웅 빈 / 수유너머 세미나회원
[1] 니체의 퍼스펙티비즘Perspectivism
퍼스펙티브의 해석 :: 개구리와 인간의 생존조건
개구리의 근시안적이고 고정된 회색빛 관점은 오직 움직이는 사물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개구리의 관점은 원거리에 있다거나 고정된 사물은 없는 것으로 처리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개구리의 특이한 관점1은, 사실 자신의 눈앞에 날아가는 파리를 사냥하기 위해 최적화된 개구리의 생존조건인 것이다. 만약 개구리가 색맹이 아니고 근시가 아니며 모든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개구리는 파리사냥에 실패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명체의 관점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생존조건으로 이해했을 때, 인간의 관점이라는 것도 결국 개구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조건(또는 생명력;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힘을 표현하고 의식하는 것)과 관계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생존이라는 극단의 상황 외에도 그러한 인간의 생명력은 언어, 계급,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기후와 섭생, 생리적인 상태(신체의 신진대사의 속도, 내장의 상태) 등과 같은 여러 상황과 조건들2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한 상황과 조건은 그만큼 다양하고도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퍼스펙티브의 위계 :: 귀족과 노예의 위계질서
이처럼 니체는 모든 생명체의 관점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하나의 불가피한 생존조건으로 간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능동적이며 긍정적인 것인가, 그리고 반동적이며 부정적인 것인가에 따라, 전자는 고귀한 것으로, 반대로 후자는 비열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특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귀족적인 유형의 인간과 노예적인 유형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점의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니체의 관점에 따르면, 고귀함(noble)은 귀족적 인간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능동적인(행동하는) 존재들이었고, 스스로를 강하고 아름답고 축복받은 존재로 긍정하였다. ‘좋음’이란 그들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의미했다. 반면에 비열함이란 노예적 인간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반동적으로, 항상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존재했으며, 반동적인 감정(Ressentiment; 원한)의 화신이었고, 능동적이고 강한 자들을 저주하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력했기에 상상을 통해서 복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상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의지’를 맹수와 맹금에게, 능동적인 인간에게 투사하고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하였다. 행위자의 ‘자유의지’가 있어야만, 그러한 ‘의도적이고 악한’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의 논리 속에서, 귀족적 인간은 악한(Evil) 자들이 되었고, 반대로 노예적 인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선’한 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선’한 자로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타인의 ‘악’을 필요로 하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은 노예들이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각주] .........................................................
1. “이것은 개구리 눈의 고유한 오류이면서 덕성이고 생존 조건이다.”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천년의 상상, 2016, 77p.
2.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 되어야만 한다. -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변화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책세상, 서문 345p.
[2] 코로나에 대한 퍼스펙티브Perspectiv 차이
코로나의 경우, 약자적 퍼스펙티브 :: 원인과 사태를 다르게 볼 줄 모르는 것
그런데 이러한 강자와 약자의 태도는 즉 그러한 관점의 차이는, 질병과 사태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약자적인 태도는, 모든 사태와 부정적인 결과들의 원인을 오직 타인에게, 신천지에게, 정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찾고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태도에 있어서 사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타인과의 거리두기, 그리고 그러한 타인으로부터의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마스크’에만 존재할 것이다. 이들에게 우한이라는 지명은 그저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전파된 진원지가 아니라, 공포와 혐오의 정서와 함께 동반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약자들의 태도로부터 ‘타인혐오증’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서양인은 동양인을, 동양인은 중국인을 혐오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의 힘과 의지는 언론이 조장하는 공포심3에 의한 자극에 의해서만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반동적인' 것이고, 오직 외부와 타인에게만 책임을 돌리며 더욱 중요한 것은 사태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본다는 점에서 독단적이며 약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관점과 힘의 유형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관점에 대한 태도4를 통해서 드러난다. 즉 이들의 근본적인 약함과 독단성은, 원인과 사태를 다르게 바라볼 줄 모르는 것에 존재한다.
코로나의 경우, 강자의 퍼스펙티브 ::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아는 것
사실 "그럼에도 그 덕분에"5 모든 개인은 철저한 위생관리가 생활수칙으로서 습관화되었고(특히 식당에서, 바이러스와 상관없이 종업원들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일하는 것은, 매우 위생적인 것처럼 보였다), 외식이 줄어든 만큼 몸에 해로운 조미료와 항생제, 합성첨가물 등의 섭취는 줄어들 것이다.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환절기만 되면 유행하는 감기는 현저히 감소했다. 한국의 선진의료기술과 빠른 위기대처 능력은 한국의 세계적 위상을 그만큼 높이게 되었다. 또한 온라인 중심적인 생활은 4차 산업혁명(이에 대해서도 극명한 관점에 차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을 가속화시고, 이는 모든 대학과 교육의 생존경쟁을 통해 학습자에게 선별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많은 물리적 이동시간과 비용이 절약되었고, 과도한 노동과 업무로부터 해방된 시간은, 독서나 운동과 같은 여가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맑은 하늘과 대기는, 지구적 관점에서 바이러스는 인간이고 코로나가 백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관점의 차이는 강자적 태도의 산물이다. 모든 사태와 위험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들을 볼 줄 아는 것,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6 아는 것은 니체적 관점에서 진정한 건강을 의미할 것이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7
약자들과 달리 코로나사태에 있어서 강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힘(면역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회적 운동에 동참하기 위함이지,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반면 미국인들이 휴지를 맹목적으로 사재기하는 모습은 하나의 관점의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마스크와 휴지를 사재기하기에 앞서, 운동과 식습관 관리, 양질의 수면과 같은 보다 중요한 생활습관 전반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자신의 힘(면역)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닐까? 사망률의 99% 이상이 치명적인 기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평상시의 건강상태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강자의 힘과 의지는 코로나 이전부터 항상 자신의 건강을 향하고 이를 위한 실천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며, 모든 사태와 위험 속에서도 긍정적인 것들을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건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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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미네소타주의 의사인 스캇 젠슨 박사에 따르면, 미국의 질병통제센터 사망자 집계 가이드라인에 따라, 의사는 확진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황상 의심이 가는 모든 환자를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환자가 입원하면 병원은 보험사로부터 13,000달러(한화로 약 1585만원)를, 산소호흡기를 달게 되면 39,000달러(한화로 약 4759만원)를 지급받게 된다.
4.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에서 더 중요한 것은 ‘퍼스펙티브적인 것’에 대한 태도이다. 즉 다양한 퍼스펙티브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긍정하는지가 중요하다.”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천년의 상상, 2016, 80p.
5. “쇼펜하우에 대한 글은 정력적이고 본능적인, 긍정의 정신이 염세주의자에게조차 가장 유익한 충동을 취하는 법을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천년의 상상, 2016, 81p 각주 참조.
6.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35p.
7. 위의 책, 335p.
[3] 건강에 대한 강자적/약자적 퍼스펙티브
건강에 대한 약자의 퍼스펙티브 : 질병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며, 치료와 관리 역시 외부에 맡기는 자
이러한 힘과 태도의 차이는 한국인의 질병으로 인한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는 암8(이라고 하는 하나의 재난 : 암을 ‘재난’으로 보는 것도 하나의 관점일 것이다)의 경우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암은 코로나와 달리 타인으로부터 감염되는 전염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암을 바라보는 태도, 암을 진단받은 경우에 있어서 대처하는 방식은, 그가 어떠한 유형의 인간인지를 나타낸다. 수동적이며 관념적인 약자적 관점에서 암은 유전적인 질병이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걸릴 사람은 걸리고, 걸리지 않을 사람은 걸리지 않는다’는 식의 유전적 허무주의는 어쩌면 건강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기에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이다.
굳이 유전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한 원한9이 자신에게 암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도덕의 계보] 3논문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혹은 인류의 ‘죄’에서 그러한 고통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의 모든 원인을 자신의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이러한 모든 약자적인 태도에 따르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 예를 들면 그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떠한 생활습관에 따라 사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니체가 ‘인간’을 위해 ‘신’에 대한 개념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는 그와 반대되는 가치를 폄하하고 경시하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10
또한 모든 치료와 관리는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겨질 것이다. 그는 본인 스스로 보다 의사가 자신의 몸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은 절대 빼먹지 않고 복용하며, 의사가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않는다.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유일한 목적은 오직 항암과 방사선 치료(표준치료)를 통해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이다. 항암치료를 통해 암세포가 모두 제거되고, 향후 5년간 암세포가 또다시 자라나지만 않으면, 환자는 완치판정을 받게 된다.11 그러나 암세포는 인체가 정상적인 세포의 기능을 유지하지 못해 생겨난 하나의 증상이고 결과이지12, 암세포가 암의 원인이 아니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을 치료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당뇨병의 원인을 혈액 내 과도한 혈당수치로 보고 이를 조절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과 유사하다.13 인슐린 투여는 일시적으로 혈액 내 과도한 당을 처리해주지만, 근본원인인 인슐린 저항성14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혈당조절과 상관없이, 모든 당뇨병 환자에게 “심장마비, 뇌졸중, 시력과 관련된 눈의 합병증들, 신부전 등이 예외 없이”15 동일하게 발생했다는 대규모 연구결과도 있다.)
그런데 그저 증상만을 완화하고자 하는 현대의학의 환원주의적 치료법16은, 병의 근본원인이 아니라 증상을 완화하고 마비시키는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치료법17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즉 근본원인은 암세포가 자라날 수밖에 없었던 환경, 예를 들면 장기간에 걸친 부족한 영양상태, 급격한 면역력의 저하, 망가진 수면습관, 과도한 스트레스, 환경적인 오염18 등과 같은 망가져버린 “건강을 결정짓는 5가지 요소”19에 있을 것이다.
건강에 대한 강자의 퍼스펙티브 :: 자기 건강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
반면에 능동적이며 자기 삶의 '주권적 개인' 강자적 인간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건강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하고자 할 것이다. 그는 문제를 자신의 외부, 즉 타인이나 ‘죄’와 같은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상생활 속에서, '영양 섭취, 장소, 풍토, 휴양'20과 같은 것에서 찾고 이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은 믿지 않을 것이다. 질병은 아주 천천히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결과로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며, 생리적인 자기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현대의학의 환원주의적 증상완화식 치료법에 반대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한다.21 그는 불가피하게 의학의 도움을 받는다하더라도, 소위 ‘표준치료’만을 정답으로 여기지 않고 다양한 치료법들의 비교를 통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즉 자신에게 좋은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22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대해 스스로 알고자 하며, 자신의 몸에 고유한 ‘좋음’, 즉 가장 좋은 영양성분과 여러 요법들, 그리고 유익한 생활습관을 찾아 이를 복용하고 실천할 것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강자는 그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삶’을 재앙이자 불행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럼에도 그 덕분에” 그의 의지는 전적으로 돈이나 명예가 아닌 ‘건강’을 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죽음의 기로 앞에서,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을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을 '인식하는 자'23가 되고, “자신의 자연적 성향을 ‘나쁜 눈’”24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삶을 통해 병자의 관점을 몸소 체험하고, “관점을 전환할 근거”25를 획득한 그에게, 모든 삶의 가치는 전도될 것이다. 결국 그는 삶의 고통의 의미를 ‘대지’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 니체가 자신이 겪었던 모든 고통을 ‘건강한 삶’에 대해 숙고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던 것처럼, 그는 오히려 다시 한번 모든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 .........................................................
8. 통계청 보도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인의 사망원인 1위는 암으로, 이는 36년째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암의 질환별 순위는 폐암, 간암, 대장암, 위암, 췌장임 순이다.
9. “내가 불쾌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은 모든 병자의 특징이며, 실상 그들이 느끼는 불쾌함의 참된 원인, 즉 생리학적인 원인은 더욱 그들에게 감추어진 채 있게 된다.”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책세상, 494p.
10. “‘영혼’ 개념, ‘정신’ 개념, 결국에는 ‘영혼의 불멸’ 개념도 고안되었다. 몸을 경멸하고, 몸을 병들게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삶에서 당연히 중요한 것들 모두를, 즉 영양 섭취, 주거지, 정신적인 섭생, 병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들에 형편없이 경솔하게 대처하도록 하기 위해서!”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467p.
11. 조한경, 『환자혁명』, 에디터출판사, 2017, 256p.
12. 위의 책, 266p.
13. 위의 책, 36p.
14. “인슐린의 주 역할은 혈당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 혈당이 올라가게 되면 췌장에서 자동으로 인슐린이 분비된다. 그래서 혈액 중에 있는 포도당을 세포에 넣어주는 일을 인슐린이 감당한다. [..] 인슐린 저항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슐린이 할 일을 제대로 못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조한경, 『환자혁명』, 에디터출판사, 2017, 154p.
15. 위의 책, 155p.
16. “환원주의는 관찰 가능한 사물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생략] ‘대증요법’의 유일한 목적은 말 그대로 ‘증상 완화’일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다.” 위의 책, 35p.
17. “이 치료법이 의도했던 바는 병을 치료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의 불쾌와 싸우고, 그것을 완화하고, 마비시키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511p.
18. 다큐멘터리 영화 ‘다크워터스’에 따르면, 최대 화학기업 듀폰사가 만든 프라이펜코팅제 ‘PFOA’는 기형아 출산, 각종 암, 고혈압, 갑상선 질환 등을 유발하는 독성폐기물질인데, 전세계 인구의 99% 이상이 이 물질에 이미 오염되어 있다고 한다.
19. 조한경, 『환자혁명』, 에디터출판사, 2017, 제4장 건강을 결정짓는 5요소.
20. “그 사소한 사항들은 -영양 섭취, 장소, 풍토, 휴양, 이기심의 결의론 전부는-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졌던 모든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71p.
21. “내 위의 통증은 그것이 아무리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몸 전체가 소진한 결과이고, 내장 조직 전체가 극도로 약화되어서이지 위 그 자체만이 원인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보지 못할 정도의 위험에 이르기도 하는 내 눈의 통증도 단지 결과일 뿐이지 그런 위험의 원인은 아니다: 내 생명력이 증대됨에 따라 시력 또한 다시 좋아졌으니 말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33p.
22. “왜냐하면 누구한테나 똑같이 효과가 나타나는 암 치료법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체질이 제각각이고, 개인이 처한 환경이 다르며, 같은 간암이라 해도 암마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3기 간암이 똑같이 진행되지 않는다.” 조한경, 『환자혁명』, 에디터출판사, 2017, 253p.
23.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서문 337p.
24.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제2논문 446p.
25. 니체는 자신이 몸소 경험한 “병자의 광학”과 “삶의 충만과 자기확신”이야 말로, 왜 자신이 모든 가치를 전도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33p 참조.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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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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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의미 있는 댓글 같은데 너무 짧아 오해하는 듯한 분들이 눈에 띄어 주제넘지만 옹호 입장에서 약간의 부연을 행합니다.
우선, 결론에서 별 이론의 여지 없을 소박한 개인건강생활을 주장하는 본문에는 겉보기와 달리 동원하는 논거와 논리전개방식에 있어 의외로 심각한 문제들이 배후에 얽혀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하 몇 가지에 관해선 꼭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1. 관점주의의 범위와 한계, 제약 조건
모든 문제에 대한 싸구려 만병통치약으로 전락해버린 관점만능주의의 과잉과 남용 문제
ex. 阿QQ. 최근 ebs 지식채널e 등에선 阿Q와 정신승리법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주장을 펴기에 이르렀는데 과연 그는 초인입니까 말인입니까?
2. 니체 사상의 결정적 공백으로서의 '사회'적 사유 부재
거시적 결과에서 초인과 말인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쌍동이 형제.
'위대하고 건강한 개인'의 역설 :
너무 건강해서 감염돼도 전혀 증상조차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작은 변화를 약자들처럼 '예민'하게 자각할 수 없고 따라서 의도치 않게 초래된 무심과 무감각으로 조심 없이 방심하게 되어 오히려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무증상 수퍼 전파자'가 되어버리기 쉽거나, 아니면 너무 건강한 면역력 때문에 각종 면역물질의 폭발적 과다 방출에 의한 과잉면역으로 Cytokine 폭풍 등 심각한 급성자가면역질환에 의한 사망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체와 질병의 관계 양상도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패턴과는 정반대로 1918 스페인 독감처럼 취약한 노년층보다 건강한 젊은 청년층을 주로 사망시키는 병원체 등이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학 및 공중보건(역)학에선 개개인의 건강이나 면역력 차이는 안전한 원격근로나 병휴생활이 불가능한 사회경제적 취약계층 및 (생활)지역 격차 등 보다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정규분포상태를 가정합니다.3. 혐오의 실증심리
현실에서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고 코로나의 위험을 무시하여 마스크 착용조차 절대 거부하면서 총기까지 들고 나와 lockdown을 당장 철폐하라고 무장시위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 가장 격렬한 중국인 및 동양인 혐오자들이라는 역설과, 반대로 왜 강한 중국인 혐오를 보였던 일부 한국인은 물론, 거기에 한국인 혐오까지 더했던 일본인들이 사망자 수가 이미 오래 전에 중국을 초월한 미국, 유럽 등의 백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혐오를 나타내지 않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상상과 달리 혐오는 일반적으로 강자 심리의 전형적 발현물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한 좀 더 정교한 현실심리학을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각성이 필요할 것입니다.또한 이런 혐오정서까진 아니더라도 상기의 건강한 개인들이 사회적 다수나 적어도 지배층을 형성할 경우 스웨덴처럼 질병을 과소평가하거나 약자 및 소수자들의 건강을 경시하고 경제 등 다른 가치들을 우선하여 집단면역법 같은 정책을 채택할 위험이 매우 높아질 수 있습니다.
4. 귀족 심리의 기반
귀족적 관점과 태도란 순전히 개인이 숭고한 노력만 하면 누구에게나 하늘에서 내려 주는 선물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자기 생활 기반에 조응하여 형성되는 정신적 결과물이며, 정신적 고귀함과 능동적 주권의식 때문에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귀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주변 모든 것이 결정 및 통제 가능한 자신의 소유였으므로 결국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연스레 그런 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으로 노예가 아무리 그 관점과 태도만 열심히 따라 해봐야 자신의 일상과 생활경험 속에서 계속 조응되지 못하고 마찰과 충돌만 반복하다 감히 주인을 흉내 내는 시건방진 노예라고 죽도록 두들겨 맞은 후 정신에 파열구가 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체로 귀족들이 가장 참지 못하는 게 바로 그런 유형의 노예이며 이것이 바로 혐오심리의 한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Uncanny Valley의 심리기제를 참조할 것)5. 종합하여 니체 철학의 문제들
먼저, 니체 공부의 전반적 문제로 니체 철학을 절대적 완전태로 환상하면서 이에 대하여는 어떠한 비판이나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채 훈고학적 경전숭배를 계속하며 그의 흉내만 내고 있는 니체 좀비 같은 사대 근성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 행태의 근저에는 우선 철학사의 완전한 오해가 기반하고 있는데,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관점주의는 니체만의 독창적 저작물도, 최초의 발명품도, 또 근사한 최신의 사조도 전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전체적 형태가 이미 철학사 이전, 소위 최초의 철학 이전에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 등을 통해 창궐할 대로 창궐했으며, 서양 최초의 철학은 오히려 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진절머리와 역겨움 때문에 출현한 것입니다.
니체 자신의 철학도 이제 막 등장한 최신의 첨단 사조가 아니라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불려 나와 신물 나도록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제는 시대적 사명을 다한 채 저물어 가고 있는 체계이며, 철학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시면, 이러한 현상은 세기말과 시대 전환기에 나타나는 반복적 현상임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둘째, 동양사상 전통
그의 철학이 가진 여러 장점과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상승욕망에 절어있는 귀족지향과 반동성, 고통받는 타인과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소승적 개인주의 등 여러 한계와 난점, 부정성들까지를 가감없이 함께 파악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서양철학사 내부에서 (특히 새로운, 동양적 사유 방식을 수려하게 전개한) 그에 대한 평가는 서양철학사 외부에서의 그것과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전자가 과대하고 과잉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관점주의의 첫 번째 실천이 될 것입니다.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며, 니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뒤집고 해체한 것이어서 이것은 곧 모두 절대선이라는 단순한 관념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이분법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분법에 대해서 설명한 좋은 글이 있어서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조금 맥락이 다르기는 하지만 위의 댓글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설명이 될수 있을것 같아서 인용합니다. 참고 바라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원론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구성해야만 하는 고정적 틀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일원론'을 실현하기 위하여 통과해야만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적 개념들 중의 어떤 것에도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되며, 이원론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해서도 안된다. 니체와 들뢰즈가 사용하는 이원론적 개념들은 대립적이기보다는 차이를 표시할 뿐이다. 니체는 모든것이 권력에의 의지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실체 및 주체들로부터 실체 및 주체들 '사이의 관계' 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힘들의 관계이다."기원은 기원속에서의 차이이고 기원속에서의 차이는 서열, 다시 말하자면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의 관계이며 복종시키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바로 이러한 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적 과정인 것이다.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이진우 지음/책세상 243쪽~244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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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우선 Oracle 선생님이 오해하시듯 '반대자를 제거하고 싶은 욕구'(???) 따위가 전혀 아니며 진지한 협력적 논의 시도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제가 첫 댓글을 옹호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매우 짧은 글임에도 니체 철학의 가장 핵심적 모순 중 하나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진우 선생님은 니체 자신도 여전히 이분법을 전개하고 있음은 깨끗하게 인정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만 변론의 요지와 달리 니체는 그것을 단순한 차이 기호로만 사용하는 것을 넘어 분명히 매우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전적으로 귀족-강자-초인이라는 한 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그 차이를 서열화, 위계화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 서열화와 위계화의 기준이 힘/권력이라는 매우 편협한 단 하나의 "가치", 단 하나의 point de capiton으로 니체 철학에서 이것은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고 직접 사망까지 선고한 바로 그 신의 자리에 정확히 대신 올라 앉아 있다는 점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니체의 환상과 달리 자신이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았던 대상들과 구조적으로는 완전한 동형일 뿐 아니라 아주 전형적으로 속물화된 물신적 근대 종교이며 초인이란 그 사제와 주교에 불과할 수 있다는 "관점"도 함께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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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여러가지를 말씀해 주셔서 전부 다 제가 답변은 못할 것 같습니다.
두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맥락이 없는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니체 스스로가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했을 때 크게 세가지의 흐름속에서 플라톤 철학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야기 했다고 봅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적 가르침에서 감각적 인식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사고를 통한 인식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그리고 실제적.정치적 인식(즉 윤리)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니체전집1/프리드리히 니체 지음/김기선 옮김/책세상 참조)
저는 니체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 철학 그리고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니체의 계승자' 라고 평가되고 있는 들뢰즈는 플라톤 스스로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소피스트의 사상을 발견했다고 그의 책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에서 참조)
저는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나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왜 계승하지 못하고 이데아로 대표되는 객관적 실체론의 철학으로 발전해 나갔는지? 궁금하고 앞으로의 연구과제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속에서 어떤 부분을 계승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함으로써 니체가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알다시피 니체 당대의 현실(근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망가진 개인적 삶의 복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극단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로 증대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것인가?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을 철학과 예술로 제어할수 있는가?라는 니체 자신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독단주의자는 사물의 매력이 독특함에 있다는 걸 모른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그는 다른 이의 고유성이나 독특성에 무관심하다. 그는 보편적 진리 하나만 믿는다. 그리고 자기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가 ‘퍼스펙티브적인 것’임을 부인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올바른 것’이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진리를 위해 단 하나의 올바른 눈, 단 하나의 퍼스펙티브만을 허용한다.이런저런 견해가 경쟁하겠지만 결국 옳은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퍼스펙티브적인 것’은 “모든 생명의 근본조건이다” 즉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퍼스펙티브로 파악한 세계속에서 살아간다.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5쪽~36쪽에서 인용함
선생님께서 어떤 근거로 니체가 극단적인 이분법을 추구하는 철학자라고 생각하셨는지? 조금 더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니체는 오히려 객관적 실체론자인 플라톤을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이야말로 이분법주의자이고 또한 초월론 철학의 대표가 아닌가요?
어떤 면에서 보면 대립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칸트와 니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실 니체는 칸트의 사상에 상당한 부분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외부의 권위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자발적인 내면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이는 칸트가 말한 사상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철학가나 사상가의 이론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어떤 면에서는 대립되고 있는 사상가가 어떤면에서는 서로 빚지고 빚을 주는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다각적인 면에서 어떤 사상가를 분석하고 평가할 때 우리는 진정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할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제가 인용한 글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진우 선생님이 니체 자신도 여전히 이분법을 전개하고 있음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선생님께서 이해하셨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원론과 이분법은 다른 것입니다. 어느 한쪽을 고정시키고 절대화시킬 때 이분법은 생겨납니다.이진우 선생님도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란 자신의 책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신 것 같습니다.(이진우 선생님이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란 자신의 책에서 이분법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니체의 사상은 한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사상이 아닙니다. 니체는 자신의 글에서 여러번 강조하면서 말하고 있듯이 친구(?)보다는 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시키고 서로 발전하는 관계로서의 적을 말하는 것입니다.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려고 안달이 날 때 우리는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고 이분법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니체 철학의 서열화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각자가 경쟁하면서 발전할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설정해 놓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 이분법은 발생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아라는 확고 부동한 실체를 두고 세상의 변화를 외면할 때 이분법이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니체는 그의 사상에서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내면에 자아라는 실체를 만드는 태도 양자를 모두 비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분법의 예로 저는 조국 사태의 예를 들고 싶은데요.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서 왜 싸우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사상이 현실화된 것이 조국 사태가 아닌지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설정해 놓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도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은 이분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의 철학적 사유의 부재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분법적인 사태로 인식한다면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부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급하게 답변을 하느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글이 되었습니다. 이점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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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속적 논의를 위해서는 매우 적절치 않은 공간과 저의 개인 일정에 비할 때 방식이 다소 장황하고 쟁점 없는 반복에 논점 간 긴밀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는 점 때문에 계속 답변은 어렵겠다는 말씀 드리는 점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1a. "첫 번째는 역사적인 맥락이 없는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이것이 바로 저의 첫 댓 5번2~4절 논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서양철학사를 말씀드린 것이고, 그 안에서의 니체를 말씀드린 것이며, 동서양사의 차이도 고려할 것을 제안드린 것입니다.
1b. "니체 스스로가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했을 때 크게 세가지의 흐름속에서 플라톤 철학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야기 했다고 봅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적 가르침에서 감각적 인식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사고를 통한 인식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그리고 실제적.정치적 인식(즉 윤리)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니체전집1/프리드리히 니체 지음/김기선 옮김/책세상 참조)"
: 소크라테스 철학의 영향만 절대화된 대중적 통념과 달리 우수한 고전학자로서 니체의 선찰이 돋보였던 부분이며 사상사적으로도 이미 검증되고 이젠 거의 상식화된 부분입니다. 다만, 플라톤은 일찍부터 다양한 소피즘들과의 대결을 통해, 그리고 스승의 사후 훨씬 더 많은 지역을 떠돌며 다양한 학파들에 유학하여 당대 주요 사상들에 거의 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종합했습니다.
1c. "저는 니체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 철학 그리고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이것도 바로 제 1댓5번2~3절 주장과 일치합니다.
1d.
1d1. "특히 '니체의 계승자' 라고 평가되고 있는 들뢰즈는 플라톤 스스로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소피스트의 사상을 발견했다고 그의 책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에서 참조)"
1d2. "저는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나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왜 계승하지 못하고 이데아로 대표되는 객관적 실체론의 철학으로 발전해 나갔는지? 궁금하고 앞으로의 연구과제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부분은 들뢰즈와 플라톤을 오해하고 계신데, 먼저 들뢰즈의 논지는 플라톤이 당대 개별 사상가들과의 치열한 대결과정에서 자기 사상을 정립하면서, 개별자들의 종합을 통해 그 전도 형태로서의 '소피즘'이란 개념범주를 처음으로 발명해 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자연히 1d2의 이유도 해결될 텐데, 당대는 소피스트들의 영향으로 지금보다도 훨씬 더한 각종 궤변, 가짜 뉴스와 선동들이 창궐하여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민주정이 완전히 타락하면서 붕괴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플라톤은 나름의 해결책으로 그들에의 동조와 야합 대신 치열한 대결을 택하고 자신의 철학을 그러한 방향으로 정립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e.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 굳이 긴 설명까진 필요없을 것 같고 다음의 인용으로 답변을 갈음하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본능과 이성에 대해 "이는 먼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게서 나타나 그리스도교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분열시킨 오래된 도덕적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전력을 기울여 이성과 본능은 자연히 하나의 목적을, 선을, 신을 향하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는 같은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정신(본질)과 육체(현상)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절대 우위에 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전통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플라톤주의가 '신의 죽음' 이후에도 면면히 살아오면서 현대성에도 그 '흉한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1f.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속에서 어떤 부분을 계승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함으로써 니체가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a와도 동일한 논지이자 그 실질로, 이것이 바로 제가 철학사와 동서양 차의 문제를 제기한 실천적 핵심 사유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심지어 플라톤 철학도 무조건 악마화시킬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일정 정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것은 온달 선생님이 2b에서 제기하신 극단적인 이분법의 예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태도입니다.)
1g. "선생님도 알다시피 니체 당대의 현실(근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망가진 개인적 삶의 복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극단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로 증대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것인가?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을 철학과 예술로 제어할수 있는가?라는 니체 자신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 결국 이 부분이 역사 및 시대와 현실 인식에 지둔하고 실천적 문제의식이 없으며 허영에 들떠 사상가의 명망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나 범박한 통상적 니체주의자들의 문제들이 집약되는 시작점이라 생각됩니다. 정말 지금 현재 이 시점이 니체 당대의 현실과 닮아 있고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고통받는 시기입니까??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안타깝지만 이미 그런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이고 지금은 벌써 Post-truth의 시대여서 누구든 자신의 관점과 입맛에 맞는 지식만 골라 믿고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어떤 궤변도 끝까지 고집할 수 있는 시대 아닌가요????
이것이 바로 제가 역사적,실천적 이해의 중요성에 대해 그토록 강조한 이유이고 충분히 강조했다고 생각되어 더이상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부족하다면 죄송하지만 1댓5번4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2a. 이원론↔이분법???
이 문단은 상대 논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매우 궁박한 논리로 사적 재정의와 반대측 논거까지 갖다 쓰며 동어반복만을 행하므로 굳이 답변을 하기 좀 그렇습니다만, 일단 이진우 선생님 본인과 104 내 다른 니체주의자 분들이 '이원론'과 '이분법'을 동의어로 혼용하는 사례들을 적시합니다.
"이진우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라는 제목의 10월 6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낙인찍는 운동권 출신들을 비판하면서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분법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선악의 이원론에 갇혀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이진우의 주장대로 당연히 이원론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수세력의 진보비판에는 이미 그 내부에 은폐된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한다."
"선악 이원론은 멀리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양 형이상학에서 이원론이 굳어진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된 관념론 철학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로고스(logos)적 질서'를 기본 토대로 하고 있다. 로고스적 질서는 남자와 여자, 선과 악, 해와 달,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 등의 이항대립과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경계를 설정한 뒤 그 둘에 대해 좋고 나쁨의 가치를 대입해왔다. 이런 근대의 로고스적 질서와 흐름에 정식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는 선악 이원론에 포집된 본능과 이성의 대립에 대해 그 기원을 소크라테스에 두고 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정신(본질)과 육체(현상)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절대 우위에 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전통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2b. 조국 대전
그러나 이 문제만은 원래 논의들의 출발 계기였고, 이에 대한 104 입장의 핵심논거로 니체주의가 동원되면서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에 한 가지만 첨언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극단적인 이분법의 예로 저는 조국 사태의 예를 들고 싶은데요.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서 왜 싸우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사상이 현실화된 것이 조국 사태가 아닌지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설정해 놓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도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은 이분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의 철학적 사유의 부재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분법적인 사태로 인식한다면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부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여기서 특히 비판의 주 대상에 해당하는 것은 소위 '진영논리'로 무조건적 조국수호를 주장해서 반조국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양 측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은 서초동계이며,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조국을 옹호하고자 했었기 때문에 여기 선생님(들)도 사회 각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비판과 재옹호 논거로 갑자기 니체를 동원하면서 비판이 재점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온달 선생님은 반드시 104 내 다른 선생님들과의 논리적 충돌을 먼저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이 조국 사태도 단순히 보편 진리의 추구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진리의 개인화, 다양화 때문에 폭발한 것으로 봅니다.
시한이 없고 실천 문제가 아니며, 온전히 개인 영역에 관한 것이라면 다양한 관점이나 이견이 많을수록 좋겠지만, 단지 진리나 인식에 관한 게 아니라 끊임 없이 밀려 오는 촉박한 실천적 결정 및 결단의 문제들과 특히 개인을 완전히 초월하는 공통 문제들 때문에, 어차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 원칙이나 공통 진리란 아예 없다고 상정됨으로써 어떠한 궤변도 끝없이 고집할 수 있고 그래서 종국적으로 어떤 합의도 불가능해진 이 Post-truth 시대, 관점 및 진리의 다양성과 이견들의 충돌은 결국 그 어떤 것도 언어나 논리 같은 대화를 통해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언제나 곧바로 세 대결과 실력 행사로 치달아 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옳은 의견을 가진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의 의견이 옳은 것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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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속적인 논의가 어렵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답변을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어떤 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그 시대에 어떻게 탄생했는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지금 시대에 비추어서 어떤 철학자가 그때 사용한 개념을 현재에 어떻게 사용할지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제 글을 통해서 아시겠지만 이때 2가지가 요구됩니다.
첫째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고 철학자의 발명품인 개념의 사용 방법을 이해할것
둘째 우리 시대에 있어서, 철학자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유효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을 파악하고 사용할것
저는 선생님의 글이 위의 두가지 내용에 적합한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위의 두가지 지점에 유의해서 니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상세한 답변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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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누히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바로 제가 계속 강조해 온 핵심 논점인데, 마치 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기 주장을 하는 것처럼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시니 아까운 시간들을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솔직히 이 점이 가장 힘듭니다.
최종결론으로 그 두 가지에 더욱 중요한 한 덕목을 추가하자면, 대상을 절대적 완전태로 환상하면서 이에 대하여는 어떠한 비판이나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채 훈고학적 숭배를 계속하며 앵무새처럼 그의 흉내만 내고 있는 니체 좀비 같은 사대 근성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니체의 공백과 한계들도 스스로 찾아 내어 그를 넘어서려는 노력도 반드시 함께 경주하시어 꼭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혹 다른 글들에도 다시 답변 없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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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하시지 마시고, 기회가 된다면 같이 니체 공부를 해보시는게 어떤지 감히 권유드립니다.
저도 현재 공부를 하는 중이라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미숙합니다.
어쨌든 공부를 하는 목적이 개념을 올바로 사용하는데 있다면 같이 소통을 하다보면 도움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선생님께서 니체에 대해서 다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워낙 니체에 대한 내용이 방대해서 전부 이야기 해드릴순 없지만,
예를 들어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문제는 분명히 니체의 관점주의를 통해서 해결될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탈진실의 문제가 저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이나 진리의 문제가 삶의 모습을 억압하는 측면에 더욱 주목하고 싶습니다.
니체나 들뢰즈 스피노자를 삶의 철학자라고 명명하며 칸트,헤겔,플라톤과 같은 인위적인 철학의 흐름에 맞서는 흐름을 저는 지지합니다.
어쨌든 제 주장을 명확히 해야 다른 분들과 소통이 되겠지요.^^
많은 부분이 있지만, 결국 니체 철학을 인간들이 어떻게 사용할것인지의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니체 철학의 공백에 대해서는 저도 고민하여 보겠습니다.
여러가지 흐름과 다양성들을 종합적으로 고민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부족한 제 의견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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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종합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진리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인용하면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부족한 제 댓글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조를 가득 채운 물은 그와 같은 환멸 속에서 다시 시작되었던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흔적과 같다. 물은 곧 역사 자체를 구성하는 보편적 가치의 체계들이었다. 그것은 주체에게 거대한 환영을 강요하며 그가 수조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방해하는 '깊이'인 동시에 숨 쉴 수 있도록 그를 다시 수조 바깥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기도 하다. 물(보편적 가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닥에 한번 가라앉은 정신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
라캉이 생각하는 진리의 형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덧없는 삶의 환영들을 해체하면서 기필코 도달해야 하는 공백의 지점(색즉시공)이지만 결코 끝이 아닌, 아니 오히려 시작으로 간주해야 하는 지점(공즉시색)이다. 주체는 진리를 하나의 절대적 수렴점으로 생각하기 보다 모든것이 다시 시작될수 있는 보편적 시작점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시작이 아무렇게나 발생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의 모든 환영을 제거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마치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공백으로서의 진리 앞에는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만일 공백만 있고 역사가 없다면 주체는 물 없는 수조의 밑바닥에 갇혀 죽음충동의 허무주의에 매몰될 것이다.물 없이는 수조 밖으로 나올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
역사는 다양한 가치(물)을 제공한다. 따라서 주체는 수조 밑바닥에 도달한 이후에도 물의 존재, 즉 역사가 남긴 눈물로서의 다양한 가치들의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수조 바깥으로 다시 나올수 있다. 정치에서라면 이러한 물에 대응하는 역사적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개념들과 이를 위해 투쟁했던 혁명의 역사가 될 것이다(정치적 진리 개념 발명의 역사). 인간의 역사가 정치라는 실천들을 통해 생산해낸 가치들이 '정치의 진리'라는 수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백상현 지음/책세상 199쪽~200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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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님의 댓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며, 니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뒤집고 해체한 것이어서 이것은 곧 모두 절대선이라는 단순한 관념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이분법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달님의 댓글: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속에서 어떤 부분을 계승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함으로써 니체가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알다시피 니체 당대의 현실(근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망가진 개인적 삶의 복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극단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로 증대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것인가?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을 철학과 예술로 제어할수 있는가?라는 니체 자신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Q님의 댓글:
1e.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 굳이 긴 설명까진 필요없을 것 같고 다음의 인용으로 답변을 갈음하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본능과 이성에 대해 "이는 먼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게서 나타나 그리스도교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분열시킨 오래된 도덕적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전력을 기울여 이성과 본능은 자연히 하나의 목적을, 선을, 신을 향하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는 같은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정신(본질)과 육체(현상)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절대 우위에 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전통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플라톤주의가 '신의 죽음' 이후에도 면면히 살아오면서 현대성에도 그 '흉한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위의 세글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은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03 현대성에 대한 비평
-가능한 시대에 밀착해서, 가능한 시대로부터 멀리
(중략:중간글은 생략합니다.)
당대 비평
(중략:중간글은 생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플라톤 비판이 어떻게 철저한 현대성 비판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대의 사상가로서 플라톤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현대성비평과 관련해 플라톤의 위치는 시간적이라기보다 위상적이다. 즉 니체는 과거로 이동했다기보다 뿌리 내지 근거로 이동했다(시간적 이동이 아니라 위상적 이동). 그는 고대가 아니라 현대의 뿌리에서 플라톤을 만난 것이다. 비평이란 이처럼 당대 사유의 '뿌리'까지, 그 '근거'까지 내려가 그것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때문에 비평은 당대에 커다란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이를 '활시위'에 비유했다. 커다란 정신의 활을 상상해보자.비평이란 활시위를 뿌리를 향해 한없이 끌고 가는 일이다. 당대의 활시위를 그 뿌리까지 당기는 것, 니체는 이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다이너마이트라 부른다. 핵심은 폭발이 아니라 응축에 있다.폭발력을 한없이 응축하는것, 관건은 우리가 활시위를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이다. 우리가 활시위를 당기는 만큼 화살은 반대편으로, 다시 말해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목표물을 먼곳에 두었다면 활시위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야 한다. 우리 시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시대로부터 가장 먼 곳에 도달할 힘을 얻는 것, 시대에 가장 밀착해서 시대에서 가장 먼곳을 겨냥하는 것 그것이 비평이다.
화약과 신문
이 팽팽한 긴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가 또한 플라톤이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독특한 덕을 주조해내는 '건강한 귀족제'를 알지 못했다(이는 제9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아테네 민주주의 몰락기에 그가 본 것은 제멋대로 날뛰는 본능들의 무정부 상태였다. 플라톤은 이 상태를 종식하기 위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줄 본을 세우려 했다.이것이 '이데아론'의 기본 동기였다.
따라서 그는 경쟁을 유도할 때조차 경쟁을 제거하려 했다.경쟁이 유발하는 긴장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니체가 파악한 현대성의 핵심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성이란 팽팽한 긴장을 자기 안에 품지 못하고, 긴장과 더불어 무르익지 못하며, 긴장 속에서 독특하게 변형되지 못하는 것이다.말하자면 긴장,강렬함,에너지를 품고 조직할 능력이 쇠퇴한 것이다.현대인은 단지 '오늘만을 위해' 살며, 작은 긴장을 곧바로 내뱉거나 겨우 하루 이틀 참았다가 엉뚱한 곳,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 발산해버린다.그래서 현대사회에는 미래를 낳을 능력이 없다
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8쪽~41쪽에서 인용함
위의 글(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8쪽~41쪽에서 인용함) 을 읽고 아래와 같은 주장을 계속할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며, 니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뒤집고 해체한 것이어서 이것은 곧 모두 절대선이라는 단순한 관념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이분법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니체의 책을 읽어도 니체의 깊이는 감히 제가 가늠하기 힘든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을 정직하게 읽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석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안전하게 고통 없이 니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1.포스트모던 시대의 니체의 탈마법화
우리는 이제 니체를 읽을수 있다. 어떤 위험과 파국에 관한 담론도 더 이상 위험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불감증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애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 역시 단명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냉소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수 있다.우리 삶의 중심이었던 신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은 계몽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영성을 오직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추구할 수 있는 철두철미하게 세속화된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니체의 위험한 사상이 더 이상 우리를 감염시킬 독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는 비로서 니체를 읽을 수 있다.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진우 지음/책세상 19쪽에서 인용함
위의 글이 아직도 유효한가? 그래서 지금 니체를 읽어서 위험하지 않은것이 부끄러워 할 일인가?
그동안 제 댓글로 말미암아 피로감을 느꼈을 모든 분께 사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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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종심 깊은 지구력은 깊이 배울만한 좋은 덕성인 듯 합니다. 이진경 선생님께서도 이번에 니체 강해서까지 출간하셨군요. 일단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여러 맥락을 고려할 때 여기선 제기하신 인용들에 대하여 압축된 필수최소한의 요지만 피력하며 예의 상으로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부적절한 공간 제약 상 후속 논의는 일단 출간된 자료들도 충분히 검토하면서 상호 숙고 후 다음을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백 선생님에 대해선 이미 유의미한 비평들이 있어 왔다고 생각되므로 참고하시기 바라며, 직접 관련하여는 단순히 역사 이외에도 '실재'라는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제약조건이 항상 선행합니다. 따라서 빈 수조나 황량한 밑바닥은 이미지적 환상일 뿐이며 실상은 매우 시끄럽고 붐비는 꽉 찬 세계이고, 이 왜상(歪像)이 이 시기 그의 염세적 우울증의 원인이자 또한 알지도 못한 채 니체를 계속 좌절시킨 영원회귀의 숨은 인력(引力, 因力)이기도 합니다.
고 선생님은 당시 자기 주장이 실은 극우적인 시장근본주의 Libertarianism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으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의 착종교란 및 포섭에 의한 결탁공모'라는 시대적 문제인 것입니다.
사상도 노동집적 구조물로서 그런 식으로 일종의 상품으로 본다면 '완전'자유경쟁시장이란 한낱 이상주의에 불과하고 그런 시장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이 바로 "각종 궤변과 가짜 뉴스, 선동들이 창궐하여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민주정이 완전히 타락하면서 붕괴하는" 자유민주주의 위기의 심급 내 원인이고 역사적으로 반복됩니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히 제가 플라톤(주의)을 옹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만, 일부 니체주의자들 또한 플라톤 대 니체라는 선악 이분법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는 전도된 거울쌍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이는 국가주의 대 자유(지상)주의 대립을 사상사적으로 반영/재현하는 한 반복적 저질 판본에 불과한, 이야말로 전형적인 말 그대로의 '영원회귀'이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반드시 우리만의 제3 출구로의 돌파구를 개척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진우 선생님의 이 인용구는 이중적 함의 속에 깊이 있는 균형을 구현하고 있어 언급을 생략하고자 합니다.
그간의 논의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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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환상을 만들지 않고서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부여잡을수 있는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그리고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니체의 관점주의와도 통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니체가 자신이 발명한 개념들을 어떻게 자신이 사는 당대의 현실을 극복했는데 사용했는지 먼저 이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그리고 그러한 이해와 방법론을 우리 시대에 맞게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셨으면 합니다.그런 연후에 니체 사상의 공백에 대해서 비판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댓글을 통해서 이미 이야기한 내용이지만 위의 관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토론과 논의도 소모적이 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께서는 니체가 이분법주의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를 근거를 들어서 구체적으로(위의 관점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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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만, '쟁점 없는 반복'과 어떤 집착은 다소 아쉬운 점이라 하겠습니다. 도대체 끝이란 것이 있을까...싶기도 하고요.
일단 주요한 쟁점이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외부'는 없고, '프레임의 외부'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배후에 숨은 거대한 디폴트 프레임과 눈에 띄어 들킨 조각 프레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백 선생님은 실재와 가치를 뒤섞어 가치체계를 진리라 오명하며 여기에 난 작은 구멍을 엄청나게 과장하면서 세계 전체가 공백 그 자체이자 무의 공간인 것처럼 고독과 우울에 빠져서 예술을 세계의 자유로운 창조이자 건설이며 축제가 아니라 단지 거짓의 세계를 겨우 버티고 견뎌 내기 위한 땜질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실재계는 인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꽉 찬 세계이며, 또한 그래서 이를 완전히 무시하려야 할 수도 없고 그런 예술은 공허한 뜬 구름이자 인간을 추락사고로 이끄는 속임수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에서 진정한 논점은 니체 철학의 최대 아포리아가 자신이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시대 정신이 되어 버린지 오래라는 것을 처절하게 절김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니체가 더 이상 위험한 사상이 아니고 전혀 독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를 통해 팽팽한 긴장을 되살릴 수 없는 절대적 이유인데 누누히 말씀드려도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시는 것이 이 모든 반복의 숨은 근본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니체의 활시위는 이제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뿌리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 선생님 또한 '현대성'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자기비판적인 재검토를 더 일찍 착수해 내실 수 없었고 자신도 모르게 시대와의 공모에 참여하게 되신 것입니다.
(니체(주의자들)의 이분법에 대하여는 이미 말씀드릴 만큼 충분히 말씀드렸고, 강조한 대로 전 플라톤주의자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그를 경멸하지만 여담으로, 온달 선생님 당부는 플라톤에 대하여도 먼저 솔선하셔야 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최소한 우리의 합의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면 아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숨겨진 이분법도 보이시리라 생각됩니다. 그것을 진정되게 부인하시고 싶다면 더 이상 공허한 주장을 반복하실 것이 아니라 양자를 대립시키는 택일의 문제틀을 벗어나서, 각자 자기 시대 고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사상가들로 상대화시키면서 그 과정과 결과에서 드러난 양자 모두의 문제점과 한계, 공백들을 드러내고 그 모두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우리 시대 고유의 실천적 현실 문제들에 대한 자기 사유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
입장은 정말 충분히 알았다고 판단되므로 이 정도에서 답변은 사양하겠습니다. -
-Q선생님의 댓글(아래의 글)
그러나 우리의 대화에서 진정한 논점은 니체 철학의 최대 아포리아가 자신이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시대 정신이 되어 버린지 오래라는 것을 처절하게 절김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니체가 더 이상 위험한 사상이 아니고 전혀 독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를 통해 팽팽한 긴장을 되살릴 수 없는 절대적 이유인데 누누히 말씀드려도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시는 것이 이 모든 반복의 숨은 근본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Q선생님의 댓글에 대한 저의 마지막 답변.
니체의 사상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위험한 사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니체 자신의 잘못은 아닌듯 합니다.
니체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니체 자신이 아니며 니체를 읽고 있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덧붙이는 글
니체주의자 혹은 플라톤주의자란 말은 지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화하지 않는 사상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니체나 플라톤이 서로에게 상관없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이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주의자' 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뇌피셜의 정신승리법 오지네요.
완전히 상상된 강자와 약자, 편견에 가득 찬 귀족과 노예, 긍정과 부정의 선악 이분법들이나 극복하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