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칼럼입니다!


온달

-Q님의 댓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며, 니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뒤집고 해체한 것이어서 이것은 곧 모두 절대선이라는 단순한 관념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이분법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달님의 댓글: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속에서 어떤 부분을 계승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함으로써 니체가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알다시피 니체 당대의 현실(근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망가진 개인적 삶의 복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극단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로 증대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것인가?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을 철학과 예술로 제어할수 있는가?라는 니체 자신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Q님의 댓글:

1e.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  굳이 긴 설명까진 필요없을 것 같고 다음의 인용으로 답변을 갈음하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본능과 이성에 대해 "이는 먼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게서 나타나 그리스도교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분열시킨 오래된 도덕적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전력을 기울여 이성과 본능은 자연히 하나의 목적을, 선을, 신을 향하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는 같은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정신(본질)과 육체(현상)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절대 우위에 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전통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플라톤주의가 '신의 죽음' 이후에도 면면히 살아오면서 현대성에도 그 '흉한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위의 세글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래와 같은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03 현대성에 대한 비평

-가능한 시대에 밀착해서, 가능한 시대로부터 멀리

(중략:중간글은 생략합니다.)

당대 비평

(중략:중간글은 생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플라톤 비판이 어떻게 철저한 현대성 비판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대의 사상가로서 플라톤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현대성비평과 관련해 플라톤의 위치는 시간적이라기보다 위상적이다. 즉 니체는 과거로 이동했다기보다 뿌리 내지 근거로 이동했다(시간적 이동이 아니라 위상적 이동). 그는 고대가 아니라 현대의 뿌리에서 플라톤을 만난 것이다. 비평이란 이처럼 당대 사유의 '뿌리'까지, 그 '근거'까지 내려가 그것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때문에 비평은 당대에 커다란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이를 '활시위'에 비유했다. 커다란 정신의 활을 상상해보자.비평이란 활시위를 뿌리를 향해 한없이 끌고 가는 일이다. 당대의 활시위를 그 뿌리까지 당기는 것, 니체는 이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다이너마이트라 부른다. 핵심은 폭발이 아니라 응축에 있다.폭발력을 한없이 응축하는것, 관건은 우리가 활시위를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이다. 우리가 활시위를 당기는 만큼 화살은 반대편으로, 다시 말해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목표물을 먼곳에 두었다면 활시위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야 한다. 우리 시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시대로부터 가장 먼 곳에 도달할 힘을 얻는 것, 시대에 가장 밀착해서 시대에서 가장 먼곳을 겨냥하는 것 그것이 비평이다.

화약과 신문

이 팽팽한 긴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가 또한 플라톤이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독특한 덕을 주조해내는 '건강한 귀족제'를 알지 못했다(이는 제9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아테네 민주주의 몰락기에 그가 본 것은 제멋대로 날뛰는 본능들의 무정부 상태였다. 플라톤은 이 상태를 종식하기 위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줄 본을 세우려 했다.이것이 '이데아론'의 기본 동기였다.

따라서 그는 경쟁을 유도할 때조차 경쟁을 제거하려 했다.경쟁이 유발하는 긴장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니체가 파악한 현대성의 핵심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성이란 팽팽한 긴장을 자기 안에 품지 못하고, 긴장과 더불어 무르익지 못하며, 긴장 속에서 독특하게 변형되지 못하는 것이다.말하자면 긴장,강렬함,에너지를 품고 조직할 능력이 쇠퇴한 것이다.현대인은 단지 '오늘만을 위해' 살며, 작은 긴장을 곧바로 내뱉거나 겨우 하루 이틀 참았다가 엉뚱한 곳,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 발산해버린다.그래서 현대사회에는 미래를 낳을 능력이 없다

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8쪽~41쪽에서 인용함

 

위의 글(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8쪽~41쪽에서 인용함) 을 읽고 아래와 같은 주장을 계속할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며, 니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뒤집고 해체한 것이어서 이것은 곧 모두 절대선이라는 단순한 관념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이분법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니체의 책을 읽어도 니체의 깊이는 감히 제가 가늠하기 힘든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을 정직하게 읽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석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안전하게 고통 없이 니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1.포스트모던 시대의 니체의 탈마법화

우리는 이제 니체를 읽을수 있다. 어떤 위험과 파국에 관한 담론도 더 이상 위험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불감증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애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 역시 단명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냉소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수 있다.우리 삶의 중심이었던 신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은 계몽의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영성을 오직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추구할 수 있는 철두철미하게 세속화된 시대에 우리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니체의 위험한 사상이 더 이상 우리를 감염시킬 독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는 비로서 니체를 읽을 수 있다.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진우 지음/책세상 19쪽에서 인용함

 

위의 글이 아직도 유효한가? 그래서 지금 니체를 읽어서 위험하지 않은것이 부끄러워 할 일인가?

 

그동안 제 댓글로 말미암아 피로감을 느꼈을 모든 분께 사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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