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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너무 여러가지를 말씀해 주셔서 전부 다 제가 답변은 못할 것 같습니다.

두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맥락이 없는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니체 스스로가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했을 때 크게 세가지의 흐름속에서 플라톤 철학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야기 했다고 봅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적 가르침에서 감각적 인식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사고를 통한 인식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그리고 실제적.정치적 인식(즉 윤리)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니체전집1/프리드리히 니체 지음/김기선 옮김/책세상 참조)

저는 니체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 철학 그리고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니체의 계승자' 라고 평가되고 있는 들뢰즈는 플라톤 스스로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소피스트의 사상을 발견했다고 그의 책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들뢰즈 지음/박정태 엮고 옮김/이학사에서 참조)

저는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나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왜 계승하지 못하고 이데아로 대표되는 객관적 실체론의 철학으로 발전해 나갔는지? 궁금하고 앞으로의 연구과제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마치 니체가 "근대까지의 '모든' 철학은 다 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은 곧 악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말 한것에 대해서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속에서 어떤 부분을 계승하고 어떤 부분을 지양함으로써 니체가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알다시피 니체 당대의 현실(근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어떤 면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근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망가진 개인적 삶의 복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극단적인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로 증대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것인가?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해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을 철학과 예술로 제어할수 있는가?라는 니체 자신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독단주의자는 사물의 매력이 독특함에 있다는 걸 모른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그는 다른 이의 고유성이나 독특성에 무관심하다. 그는 보편적 진리 하나만 믿는다. 그리고 자기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가 ‘퍼스펙티브적인 것’임을 부인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올바른 것’이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진리를 위해 단 하나의 올바른 눈, 단 하나의 퍼스펙티브만을 허용한다.이런저런 견해가 경쟁하겠지만 결국 옳은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퍼스펙티브적인 것’은 “모든 생명의 근본조건이다” 즉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퍼스펙티브로 파악한 세계속에서 살아간다.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 지음/천년의 상상 35쪽~36쪽에서 인용함

 

선생님께서 어떤 근거로 니체가 극단적인 이분법을 추구하는 철학자라고 생각하셨는지? 조금 더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니체는 오히려 객관적 실체론자인 플라톤을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이야말로 이분법주의자이고 또한 초월론 철학의 대표가 아닌가요?

 

어떤 면에서 보면 대립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칸트와 니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실 니체는 칸트의 사상에 상당한 부분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외부의 권위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자발적인 내면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이는 칸트가 말한 사상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철학가나 사상가의 이론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어떤 면에서는 대립되고 있는 사상가가 어떤면에서는 서로 빚지고 빚을 주는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다각적인 면에서 어떤 사상가를 분석하고 평가할 때 우리는 진정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할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제가 인용한 글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진우 선생님이 니체 자신도 여전히 이분법을 전개하고 있음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선생님께서 이해하셨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원론과 이분법은 다른 것입니다. 어느 한쪽을 고정시키고 절대화시킬 때 이분법은 생겨납니다.이진우 선생님도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란 자신의 책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신 것 같습니다.(이진우 선생님이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란 자신의 책에서 이분법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니체의 사상은 한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사상이 아닙니다. 니체는 자신의 글에서 여러번 강조하면서 말하고 있듯이 친구(?)보다는 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시키고 서로 발전하는 관계로서의 적을 말하는 것입니다.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려고 안달이 날 때 우리는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고 이분법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니체 철학의 서열화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각자가 경쟁하면서 발전할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설정해 놓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 이분법은 발생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아라는 확고 부동한 실체를 두고 세상의 변화를 외면할 때 이분법이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니체는 그의 사상에서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내면에 자아라는 실체를 만드는 태도 양자를 모두 비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분법의 예로 저는 조국 사태의 예를 들고 싶은데요.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서 왜 싸우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쪽 계열에만 절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사상이 현실화된 것이 조국 사태가 아닌지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를 설정해 놓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도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은 이분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의 철학적 사유의 부재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분법적인 사태로 인식한다면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부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급하게 답변을 하느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글이 되었습니다. 이점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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