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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 니체주의자에게도 공동체는 가능한가?

이 진 경

 

3. 강자들의 공동체, 혹은 넘어섬의 공동체

 

힘의 증가와 고양을 위해 약자들도 공동체를 만들고 강자들도 공동체를 만든다. 다른 것은 공동체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방식이다. 약자들은 이질적인 것, 다른 신체, 다른 감각, 다른 생각을 견딜 힘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동질적인 것, 유사한 감각, 유사한 생각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에너지의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가능한 최대치의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약자들의 공동체는 공리주의적이다. 반면 강자들이 모일 때는 이질적인 것의 연합을 추구한다. 비록 많은 힘이 들겠지만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힘의 생성을 추구하고, 자신과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생각과 다른 어떤 것의 출현하는 사건을 긍정한다.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의 생성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좋다는 것, 그게 강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이전에 다니가와 간(谷川雁)은 유용성이나 이해관계나 대의에 따른 연대와 대비하여 쾌감을 위한 연대를 주장한 바 있다. ‘연대의 쾌락’, 그것이 연대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12) 이 쾌감은 스피노자 말을 빌면, 연대로 인한 능력의 증가에 동반되는 ‘기쁨의 감응’의 일종이다. 니체라면 ‘힘의 감정(Gefühl der Macht)’이라고 말할 것이다. 공동체의 형성은 그 자체로 쾌감을 준다. 그러나 언제나 쾌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모임으로써 개개인이 힘의 증가를 느낄 때, 개개인이 긍정적인 힘의 감정을 느낄 때에만 쾌감을 준다. 쾌감을 주지 못하는 공동체는, 최소한 그걸 느끼지 못하는 이에게는 더 이상의 힘의 증가를 주지 못하는 공동체다. 지속하기 위해 힘을 소모할 뿐인 공동체, 그러니 해체하는 것이 더 나은 공동체다. 이해관계나 특별한 목적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목적이나 존재이유로 하는 것이 공동체라면, 쾌감이 사라지고 기쁨을 주지 못하는 공동체는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는 공동체다. 그것은 해체되어야 할 때가 된 공동체다.

단결의 쾌감, 연대의 쾌감은 공동체나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는 생리학적 이유고 감응적인 이유다. 그런데 이를 니체처럼 약자들의 단결에 국한하여 사용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약자들이 느끼는 쾌감과 강자들이 느끼는 쾌감을 구별하는 것이다. 강자들이 느끼는 연대의 쾌감은 나와 다른 신체들을 내가 수용함으로써 오는 신체적 힘의 증가가 야기하는 쾌감이다. 자기와 다른 자, 그렇기에 동반되는 결합에의 저항—이는 상대의 저항과 나의 저항 모두를 뜻한다--를 극복함에서 오는 쾌감이다. 그런 이질성과 차이를 넘어서 좀더 강한 신체를 구성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쾌감이고, 이질적인 것과 함께 하는데서 오는 고통을 넘어섬에서 오는 쾌감이다. 한마디로, 넘어섬(überwinden)에서 오는 쾌감이다.

키스해링.jpgKeith Haring

반면 약자들이 느끼는 연대의 쾌감은 저항이나 고통을 넘어섬 없이 발생하는 힘의 증가에서 오는 쾌감이다. 자신에게 복종하는 자의 양적 증가를 자신의 힘의 증가라고 느끼는데서 오는 쾌감이고, 그렇기에 말 잘 듣고 잘 따르는 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며,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자신의 힘 아래 있음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쾌감이다. 비슷한 신체들의 양적 증가, 혹은 복종하는 신체의 양적 증가에서 오는 쾌감이고, 그런 식으로 ‘무리짓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자신과 같은 무리들이 다수 존재함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쾌감이고, 그런 동류성이 주는 안정감과 위안이 주는 쾌감이다. 또한 흔히 보게 되듯이 남 다른 자, 특이한 자들을 비난하고 고립시켜 무력화하는 것을, 다시 말해 남들의 힘의 감소를 자신의 힘의 증가라고 오인하는데서 오는 반동적 쾌감이다. 특이하기에 고립된 자들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데서 오는 뒷담화의 쾌감이다.

뱅크시.jpg

Banksy

 

약자는 공동체를 만들고 강자는 공동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약자는 약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강자는 강자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것은 힘의 질이란 면에서 아주 다른 두 가지 공동체다.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이나 결합을 통해 자기를 넘어서는 공동체가 있고 동질적인 것과의 결합을 통해 자기를 확장하는 종류의 공동체가 있는 것이다. 이해의 공동체와 다른 쾌감의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도, 아주 다른 두 가지 쾌감이 있다. 나와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고, 나와 비슷한 것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확장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어떤 특이성을 강점으로 포착하여 현행화시키는 능력인지, 반대로 재빨리 단점으로 포착하여 비난하고 무력화하는 능력인지의 차이다.

강자들의 공동체는 ‘넘어섬의 공동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머무를 집"이란13) 이런 공동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넘어서는 자들의 공동체, 그것이 넘어서는 자로서 위버멘쉬가 머무를 집이다. 넘어섬의 공동체란 현재의 감각, 현재의 생각을 반복하여 넘어서는 훈련과 변환의 장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몰락을, 공동체의 몰락을 반복하여 추구하는 공동체다. 몰락을 견디고, 새로운 감각과 삶으로 스스로를 갱신하기 위해 도래할 몰락마저 감수하는 무모한 자들의 공동체다.

넘어섬의 공동체는 한편에선 다른 감각,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반복하여 창조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 다른 가치와 감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공동체다. 나와 다른 감각이나 가치를 가진 자들을 새로이 창안한 감각과 가치로 유혹하는 공동체, 혹은 다른 이들이 창안한 다른 감각과 가치의 유혹에 휘말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자들의 공동체다. 특이성으로 인해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자들이 서로를 당기고 유혹하는 공동체, 그런 식으로 특이점들의 분포를 바꾸며 다른 특이성을 형성하는 공동체, 다른 스타일과 다른 가치들이 매혹의 힘을 발동시키는 공동체다. 스피노자 말대로 ‘자유인’의 공동체, 니체 말대로 ‘고귀한 자’의 공동체다.

노예들의 공동체, ‘천민’들의 공동체가 그 반대편에 있다. 특이성에 따른 거리나 ‘고립’을 반공동체적이라고 비난하는 범속한 자들의 공동체, 나의 무리와 다른 차이를 공동체의 방해물로 간주하는 ‘패거리’의 공동체가 그것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 지배적인 관념이나 감각을 척도로 삼아 그와 다른 것을 재는 양식과 공통감각의 공동체고, 새로운 것들의  시도를 귀찮아하는, 그저 하던 것을 계속하려는 타성적인 힘의 공동체이며, 새로운 종류의 실험을 피곤해하는 ‘지친 자’들의 공동체다. 남다른 스타일을 ‘튀는 것’으로 비난하는 저속한 자들의 공동체고, 새로운 것,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것에 매혹될 줄 모르는 둔감한 자들의 공동체다. 그렇기에 이는 ‘고귀한’ 것을 알아볼 줄 모르는 눈 먼 자들의 공동체고, 새로운 감각을 창안할 줄 모르는 무능한 자들의 공동제이며, 다른 이가 창안한 새로운 감각이나 가치로 스스로를 갱신하는 것조차 할 줄 모르는 게으른 자들의 공동체다. 현재의 지배적 가치나 통념에 복종하길 요구하는 노예들의 공동체다.

 

12)“지금까지 계급연대에 대한 전위의 설득은 대개 이해의 일치라는 점에 집중되어 왔다. 그리고 개인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집단의 큰 이익에 붙는 것이 義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이익과 정의의 접속법에는 뭐라고 해도 늘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비통한 정의의 근저에 있는 모랄리즘에 의외로 고풍스런 색이 감돌고 있음을 전후의 대중은 쉽사리 간파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대중이 선택한 것은 이익도 정의도 아닌 연대의 쾌락이었다.”(谷川雁, 「政治的前衛とサクル」, 岩崎稔・米谷匡文 編  <<谷川雁セレクション I>>, 日本經濟評論社, 2009, 363쪽)

13)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1쪽.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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