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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서로(미술비평가, 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 쇤베르크와 벽암록

 

인생은 여행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나 어디론가 떠난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면서 떠나는 사람도 있고 모르면서 떠나는 사람도 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도 있고 길을 만들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 어느 여행자의 기록이 있다. 그가 걸었던 길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구분시켜 주는 어떤 흔적이 기호가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던져주는 경우가 있는데 백남준이 그러하다. 백남준은 우리에게 우연한 마주침으로 다가와 어쩔수 없는 쌩뚱함으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우리에게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진 백남준의 여정은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쇤베르크라는 작곡가에 의해 영감을 받아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여행을 위한 지도 한 장쯤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지도가 벽암록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벽암록은 백남준이 50년대 말 독일유학 시기에 탐독했던 책으로 알려졌다. 20대의 백남준을 사로잡은 건 쇤베르크와 함께 벽암록이 보여주는 선()의 세계였다. 그가 독일에서 보였던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1959) <머리를 위한 선>(1962)에는 선승들의 행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그는 피아노의 음악적 소리와 비음악적 소리가 지닌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해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라는 통념을 뒤흔든다. 그에게 음악은 청각적일수도 있지만 시각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청각이 시각적인 것으로 변환되면 그것은 사유를 강요한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감각적 경험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며 이미 전제된 지성이 무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 문명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내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는데, <피아노포르테 소곡>(1959)에서 그는 스승 케이지의 넥타이까지 자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렇게 격렬한 행위 예술은 음악의 지배적 질서와 무대 공간에 대한 권위를 무너뜨린다. 이는 마치 목불을 태우고 불상에 올라타는 선승 단하(丹霞)를 닮았다.


백남준에게 예술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사유되는 것이었고, 미리 전제된 관습화된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백남준에게 창조는 새로운 감각의 생성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백남준의 행위예술은 고정된 기본 화음으로부터 소리를 해방시키고 예술 세계의 관습적인 규칙들로부터 행위를 자유롭게 했다. 독일시기에 백남준이 했던 다양한 액션들’, 가령 피아노를 부수거나 관객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이올린을 내려치는 것, 혹은 넥타이를 자르거나 머리를 감기는 행위들은 새로운 감각만이 하나의 사건으로, 우리의 삶을 변환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뭔가 고상한 것이 아닌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었을 것이다. 그가 텔레비전을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1963 3,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백남준은 13대의 텔레비전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 이때 그는 연극대본처럼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쓴다. 그 글이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이다. 이 한편의 글에는 백남준이 그 이후에 펼쳤던 예술 세계가 모두 담겨있다. 마치 그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예언처럼.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혜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혜가: 스승님, 저는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저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달마: 너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그대를 위해 마음을 안심시켜 주겠다.
혜가: 마음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습니다.
달마: 내가 그대를 위해 이미 그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선불교는 이 두 사람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달마의 대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후대 사람들은 이를 안심법문이라 불렀다. 바깥 경계로 향해 있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비추는 것을 반조(返照)라 하는데 반조에 의한 안심(安心)의 체득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인류의 마음은 달마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 그 이전까지 누구도 마음을 안으로 비출 줄 몰랐다. 단지 돌이켜 비추면 되는 것인데 마음 안을 비춘다는 것은 과연 달마쿠스(Dalmacus)의 전환이라 할 만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혜가는 마음을 안으로 향해 무엇을 얻었는가? “찾지 못하겠습니다라는 깨달음이다. 결국 없는 걸 없다고 알기까지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만큼의 거리가 인류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히 혜가에게도 제자가 있었다. 그가 승찬이다. 승찬은 나병환자였다. 승찬이 혜가에게 부탁한다. “스승님, 저는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회를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저를 참회시켜주십시오.” 알다시피 혜가는 달마의 제자다. “너의 죄를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 죄를 참회시켜주겠다.” 승찬은 (너무나 당연히) 죄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대의 죄를 이미 모두 참회시켰다.”


불교는 깨달음의 가르침이라 한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혜가의 제자 승찬이 쓴 신심명의 첫 구절은 이러하다.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唯嫌揀擇 오직 분별함을 싫어할 뿐이다.

但莫憎愛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洞然明白 환하게 명백하리라.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345)[각주:1]이라고 말하는 백남준은 승찬의 제자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분별[揀擇]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과 짝을 이루어 사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구분을 짓는 짓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자연의 무한한 양이 질이라는 범주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질의 범주는 두 가지 의미가 섞여서 혼란스러워진 채, 무의식으로 사용된다.”(345) 질의 두 가지 의미는 특성과 가치다. 그런데 백남준은 실험TV에서 이라는 용어는 가치가 아니라 단지 특성을 의미할 뿐이다.”(346)라고 말한다. 가치가 개입이 되면 우리는 분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지 특성만을 보게 되면 그것은 양과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지칭할 뿐이다. 여기서 백남준은 을 가치로부터 분리시킨다. 우리가 질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백남준에게 남는 것은 특성으로서 차이. 각 개별자들의 특성을 무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사회적 관습을 벗겨내는 방식은 다른 것을 그냥 다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말한다. “A B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A B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끔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다. 가끔 나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346) 빨간 사과와 빨간 입술은 다를 뿐이다. 빨간 사과가 빨간 입술보다 혹은 빨간 입술이 빨간 사과보다 더 좋거나 아름다운 것이 될 수는 없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무의식적인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차이를 차이로 남겨놓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극한 도(至道).



. 개성의 표현이 아닌 물리적 음악

 

백남준은 실험TV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예술(?)형식”(346)이기를 꿈꾼다. 무엇이 완전범죄인가? 가치의 영역인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예술행위를 완전히 배반하면서도 배반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하는 것이 완전범죄. 우리는 아름다움의 추구가 예술의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예술이 아름다움의 추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규범이나 양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삶의 공간에서 특정한 양상으로 반복하여 행동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통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생산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반복을 통한 훈련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길들인다. 예술이 어떤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도 이런 훈련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남준은 이런 사회적 훈육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하고자 한다.


“나의 TV가 내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물리적 음악”일 뿐이라는 것을”(346)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죄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때는 신분(identity)뿐만 아니라 개성(personality)도 감춘다. 나타난 것은 물리적인 현상(phemomenon)인데, 백남준은 이 현상을 음악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실험TV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 하게 된 비디오 아트도 알고 보면 음악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의 바탕에는 음악이 결부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백남준의 예술이 지닌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미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소리와 비음악적 소리의 위계를 무너뜨렸고, 비디오 작업을 통해서는 인간/기계, 예술/일상의 경계를 지워나갔다. 사이버네틱스 예술라는 글에서는 노버트 위너의 말을 인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신호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신호와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선언으로서 백색소음”(노버트 위너와 마셜 매클루언)의 존재론을 예고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백색소음은 전달될 확률이 극히 낮은 메시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대치의 정보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전달하지 않은 신호가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비디오 아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디오 신디사이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디사이저는 주파수를 종합하는 기계로서 전자음악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리를 변형하여 종합하면 녹음한 소리를 다른 소리로 변형하거나 인위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데 신디사이저는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청각적인 모든 소리가 주파수라는 현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음악처럼 미술 역시 가시광선을 종합하고 변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창작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백남준은 본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했다. 우리는 TV를 단지 보기 위해 보지만, 백남준은 청각상의 주파수 변조를 시각상에 대해 주파수 변조라는 작업을 통해 시각의 무한한 변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비디오 아트란 음악사에서 쇤베르크가 했던 것 이상의 근본적인 의미의 변환을 시각예술 안에서 한 것이 되는데도, 현대음악의 역사를 모르는 채 비디오를 설치물로 끼워넣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아직도 백남준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각주:2].

 

 

. 예술은 아이디어다

 

그래도 남는 것은 행복이다. “이전의 어떤 작업에서도 이러한 TV실험 작업만큼 내가 너무도 행복하게 일한 적은 없었다.”(347) 왜 행복했는가? 이데아(IDEA)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데아의 사용방법은 플라톤에서 비롯된다. 총체성으로서의 예술이나 통일성으로서의 예술은 이데아의 적절한 사용의 결과로 나타난 개념들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본질이나 통일성을 말하는 자 누구인가? 백남준은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답게 일찍이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자유롭기 때문에 백남준은 행복할 수 있었다. 이 자유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각주:3]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백남준은 자신의 실험TV 예술(?)형식으로 소개했다. 형식적 구조가 TV라는 것이고 그 내용에는 진리나 영원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백남준의 작업은 과정일 뿐이지 계획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무엇인가를 그려본다는 그런 능력이란 애당초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나는 대체로 작업하기 전에 완성된 작품을 머릿속에서 미리 그려보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없다.”)(347) 게다가 그는 솔직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말할 만큼 솔직하다. 알고 보면 이데아는 포기해도 좋은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이데아가 진리, 영원, 완성의 의미와는 별 관련이 없기(348) 때문이다. ‘예술은 이데아의 출현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결국 예술이 진리나, 영원, 완성과는 상관없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아이디어의 페티시즘의 일종일 뿐이다. 그리스 예술에서 비롯한 고귀함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에서는 미국의 광고 회사들이 써먹는 상용수단으로서의 아이디어(idea)가 예술에서 말하는 이데아(IDEA).

 

 


. 일상과 황홀의 경계는 어디인가?

 

“비결정성과 변동성이 지난 10년동안 음악에서는 중점과제였지만, 시각예술에서는 매우 저개발된 매개변수이다(문학과 시각예술과는 반대로 음악에서 섹스라는 매개변수가 매우 저개발된 것처럼)”(348)

 

백남준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지난 10년동안 음악이 비결정성과 변동성을 중점과제로 부각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시각예술에 있어서 비결정성과 변동성은 매우 저개발된 채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백남준으로 하여금 TV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TV는 변동성의 차원으로 보았을 때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영원이나 일방향적인 시간으로부터 단숨에 벗어나듯, 평행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체였다. 더구나 책이든 신체든 단 하나의 평행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로만 채워져야 하는 문제를 13대의 독립적인 TV는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13대의 TV를 넘어서는 것은 백남준이 보기에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황홀ECSTACY”(350)이다. 백남준은 이 황홀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다양하게 나열하고 있다. 우선 이 단어는 시적인 영감의 광란, 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명상으로 인한 정신적 변화나 희열”(350)을 의미하고 이어서 완전한 충일의 순간, 영원한 현재의 현존, 무의식 또는 초의식, 극도의 집중, 나는 나 자신으로 일체화되다, 세상이 3분 동안 멈춘다!!! 기타 등등...”(350-351) 그러나 이러한 나열된 의미들을 볼 때 우리가 보통 황홀을 경험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백남준이 보기에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이라면 흔히) 섹스가 그런 순간일 것이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자연스럽게 주어져서 포기되지 못했던 황홀의 경지는 섹스일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비결정성과 변동성을 말하면서 섹스를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음악에서 저개발된 매개변수인 섹스는 어떻게 극복되었나? 이러한 극복도 백남준에 의해 시도되었다. 잘 알다시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7)가 그러한 실험이다. (그 당시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첼로 연주자 샬럿 무어만은 유죄판결을 받기까지 했다.)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황홀이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황홀의 작동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일상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고, 나는 항상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351)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실험TV는 우리가 원래 자유롭다는 것을, 도달할 수 없는 황홀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임제선사가 우리는 본래 깨달은 존재라고 말한 의도와 비슷하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내가 어디에 있든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다. 우리는 원래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것을 의심하듯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우리의 의식이 통상적인 특성인 황홀경을 거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임제선사 때나 백남준 때나 어김없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백남준이 실험TV이상을 황홀이 보여준다고 했을 때, 실험TV보다 위에 있는 것은 곧 일상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소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우리가 말하고, 걷고, 밥 먹고, 잠자고.. 등등 일상적인 활동에서 오는 일들은 사실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이 놀랍다는 것은 몸이 아파봐야 안다.)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을 수 있다. “신비주의적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보통의 신체(우리는 단 하나의 심장, 단 하나의 숨결, 단 하나의 시선이 초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로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지만, 아마도 13대의 독립적인 TV에서 평행적인 흐름들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이 신비주의자들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350) 그러나 만약 이런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예술의 가장 행복한 자살이며...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가장 어려운 반()예술이다.”(350) 알다시피 우리들은 이런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이 추구하는 바가 만약 황홀이라면 사실 일상과 따로 구분하여 해야 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하기에 예술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술은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의, 그리고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로의 이행[각주:4]이다.

 





. 불모의 영점

 

백남준의 작업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냥 중간만 존재하는 과정이며 흐름이다. 영원의 접점이나 불모의 영점, 이런 건 없다. 항상 상대적이고, 붕 떠 있으며, 평이하고, 흔하며,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며, 허공에 걸려 있다.”(352) 그래서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면 아주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마치 항상 재미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항상 재미없지도 않은 나의 실험 TV처럼...”(352) 애초 분별을 여위면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된다. 백남준은 자신의 작업이 무엇을 하고 있다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백남준의 작업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그러나 백남준이 실험TV 작업에서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사물들로 하여금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주변 조건에 맞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특정한 양상으로 반복하여 행동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의해 이미 존재하는 양식화된 패턴을 반복하는 반면 예술은 이러한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새로운 예술적 실천이라기보다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의 창조다. 새로운 감각은 예측하지 못한 불확실성을 지닌 어떤 존재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생겨난다. 그 마주침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고, 재미있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며 흐름으로 존재자를 파악할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론을 창조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존재론의 핵심은 존재자들의 평등성이다. 근대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만을 고집한 나머지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자들을 사물로 격하시키고 소외시켜 버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웃한 다른 항과 결합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기계라 불렀다. 기계로 작동이 된다면 이때는 유기체과 무기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이버네틱스도 이와 유사하게 유기물과 무기물, 생명체와 기계가 어떤 공통성을 갖는다고 본다. 동물과 기계가 작동방식이 아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하나의 연속성 위에서 차별화되지 않는 하나의 평면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근대라는 시대 이후에 우리를 둘러싼 존재자와의 관계에서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만 살아왔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사물화라는 부정적 어법이 차라리 사물의 인간화보다는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이 기계라는 말은 이제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라는 말과 같아진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우리의 신체와 연결된 백남준의 작품은 이러한 영향 관계를 더 뚜렷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TV 첼로>, <TV 브라>, <TV 안경>, <TV 페니스>(1972)는 나의 다른 신체의 일부와 다르지 않다. 사이버네틱스는 우리의 감각이 기계와 연결될 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감각이란 그리스어로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론과 미학은 서로 동일한 것이기에 백남준의 작품처럼 신체와 기계의 만남으로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한편으론 미적 감각능력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은 개념을 만들어내기보다 새로운 감각을 불러내고 이렇게 불러낸 새로운 감각은 기존의 감각을 바꾼다. 이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들리게 한다. 이렇게 사이버네틱스는 신체를 바꾼다. 신체가 달라지면 감각이 달라진다. 즉 사이버네틱스는 새로운 신체를 통해 전에 없던 새로운 감각을 불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백남준이 신디사이저와 비디오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는 우리의 시각적 감각을 바꾸고 미적인 감각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백남준의 실험TV에서 미리 선보였듯이 그의 13대의 TV는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 TV의 개별성은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공동성을 지닐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이 설치한 TV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나드다. 그러나 이때의 모나드는 서로 소통을 거부하는 모나드가 아니라 창문이 활짝 열린 모나드라고 보아야 한다. 원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원래 자신이 가진 필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 보이며 진행하고, 다른 모나드와의 소통이란 신의 예정조화로서 성립하지만, 백남준의 실험TV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자라 할 수 있다. TV의 상태나 놓여지는 위치도 우연이 많이 개입되었을 뿐더러 백남준 자신도 자신의 작품들에게 의 역할을 떠맡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과의 우연적 만남을 통해 매순간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도록 놓아두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의 백남준 비디오 작업에서도 기계를 통해 확장되는 새로운 감각들로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게 된다. 아마 백남준은 새로운 기술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존재의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그것은 공동체성이 사라진 개별화된, 혹은 파편화된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조차 소통의 가능성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카타르시스는 없다

 

삼계무법 하처구심(三界無法 何處求心). 백남준이 독일유학시절에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자녀에게 직접 필사하여 선물했다는 벽암록 삼십칠칙(三十七則) 중 한 구절이다. “삼계가 다 텅 비어 있으니 어디서 마음을 찾으랴.” 백남준은 마음의 공성(空性)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그는 선()을 행위로 보여줄지언정 언어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선은 말하는 순간 선이 아닌게 되어 버리는 당착어법에 속한다. 그래서 선의 자기선전은 선의 어리석은 자살행위이다.”(352) 지금까지 하고 있는 행위가 다 선인데 이걸 선이라고 말하는 순간, 선이 아닌 게 되어 버리는 이상한 현상마저 발생한다. 왜냐하면 선은 두 가지 부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먼저,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 이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다음은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다.”(353) 이것은 좀 어렵다. 왜냐하면 내게 있는 전 재산 만원이 누구의 것보다 많거나 적거나 할 수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원래 그렇게, 있을 만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걸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혹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현재가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10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20시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30개월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4천만 년의 현재 역시 유토피아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353) 백남준이 이렇듯 반복해서 말하는 바, 현재가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교향곡 제5>(1965) 악보 제일 앞에 두 문장으로 적어놓았듯이 우리가 연주하는 순간은 우리가 연주하는 작품만큼 중요하다.” “영원성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우리는 현재를 무시한다. 그래서 선의 핵심인 두 번째 부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353) 좌절은 좌절로서 남을 뿐이고 카타르시스는 없는 것인데도 영속적인 불만족인 백남준의 실험TV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려 한다. 그래서 백남준은 말한다: 나의 TV에서 기대하지 마라.(354)


그러거나 말거나 순간이 순간으로 남고 영원이 영원으로 버려질 때, “흰구름 머흘머흘 머리 위를 덮고, 흐르는 물 오묘한 거문고 가락을 타건만, 한 가락 두 가락 아는 이 없어도 가을밤 비에 불은 물은 둑에 넘칠[각주:5] 것이다.

 

 

 


 

 

 

 

 

 

 

 

 

 

 

 

 

  1. 괄호안의 숫자는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이 실린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백남준아트센터, 2010)의 쪽수이다. 이하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에 대한 인용은 괄호안의 쪽수로 대신한다. 인용문의 굵은 글씨는 백남준이 강조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진경, 「사이버네틱스와 사이보그: 사이버네틱스의 철학적 질문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학술심포지엄, 2017. [본문으로]
  3.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260쪽. [본문으로]
  4. 질 들뢰즈,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260쪽. [본문으로]
  5. “白雲爲蓋 流泉作琴 一曲兩曲無人會 雨過夜搪秋水深”, 『碧巖錄』 三十七則. 번역은 백남준 총서2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2009). 226쪽을 따랐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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