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 회원을 탈퇴한 김현수 입니다.
지난 해 말과 사물 세미나와 차이와 반복 수업을 함께 했었는데, 제 이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수업 이후로 오랫동안 뵙지 못했다가 이렇게 게시판을 통해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세미나와 수업에서 늘 선생님께 배우는 점이 많았는데, 이번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가 모르고 있던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선생님의 글에 답글을 드리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인데요.
하나는 선생님의 글 중에 저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구요. 또 하나는 선생님께서 사실관계에 대해 저와 다른 이해를 하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사실관계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 9번까지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요. 10번과 11번 문단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먼저 10번 문단의 선생님의 의견과 다른 저의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번 사건을 “굳이 정식화한다면, 충분히 신속하려는 정의감과 충분히 신중하려는 정의감 사이의 대립이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신속함과 신중함이 대립하는 것으로 짝지어지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선생님의 판단이 신속하면 신중하지 못하고, 신중하면 신속하지 못한 것처럼 읽히는데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신중하면서 신속할 수도 있고, 신속하면서 신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저는 살면서 신중하게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분도, 신속하게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 반대로 신중하지 못해서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신속하지 않으면서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흔히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신속해서 신중하지 못한 사람도, 신중해서 느린 사람도 보았습니다. 제가 그 중에 속해있는지도 모르구요.
아무튼, 그렇게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두 항을 대립 항으로 두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신속과 신중이라는 것이 어디에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번과 같은 경우에 신속함과 신중함의 대립이라 보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성급함과 신중함, 또는 신속함과 느림의 대립이라고 하셨다면 고개를 갸웃거리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말씀대로 신속과 신중의 대립이 성립한다는 가정 아래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앞서 말씀드린 두 번째 이유와 연결이 되는데요.
저는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굳이 정식화한다면, '신속과 신중을, 성폭력으로 인정한다는 편과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편'으로 대응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또한 선생님께서 알고 계신 것과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일전에 동동이라는 저의 닉네임으로 올린
“탈퇴의 변: 수유너머104 표류기(탈출기?)”(소소한 일상, 2018.04.12)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board_VPyS03&page=1&document_srl=59610
를 읽어보지 못하신 것 같은데요. 그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3차와 4차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서둘러 결론을 내려고 하지 말고 좀 더 얘기를 들어보고 천천히 해결하자는 의견과, 의견이 크게 갈린 상황이니 논의를 계속 이어가보자는 의견을 냈었습니다. 하지만 제 의견은, 논의는 서로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라며, 논의를 멈추고 합의안을 만들어 빨리 해결하자는 공동체의 핵심 회원 분들의 의견에 막혔습니다. 또한 결정 보고문이 나온 후 몇몇 탈퇴회원의 문제제기가 있자, 회원이신 카본 선생님께선
“반성합니다”(소소한 일상, 2018.04.07.)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board_VPyS03&page=1&document_srl=57657
라는 글에서 “여전히 이 일을 수습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신속함과 신중함의 대립이라 판단하신 것은 어떤 사실을 통해 얻어진 결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신속과 신중의 측면이 제가 이해한 것과 다르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선생님의 11번 문단 역시 의견을 달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문제는 이 타자성과 차이의 드러남을 지속적 대화의 시작으로 삼지 못하고, 회원탈퇴, 즉 타협의 중단으로 이끌어 간 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말씀드린 대로, 4차 회의에서 회원들 간의 의견의 차이가 크게 나고 있으니 논의를 해보자라고 진행을 보던 제가 의견을 냈지만, 논의는 감정만 상하게 할뿐이라는 핵심 회원들의 주장에 막혔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지속적 대화의 시작으로 삼으려던 시도가 벽에 부딪친 거죠. 그 상황에서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계속 얘기하자고 붙잡지는 못하겠더라구요. 만약 그런 상황에 대해 선생님께서 조언해주실 것이 있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아무튼 회원탈퇴를 통해 타협의 중단으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타협은 중단 되어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혹, 합의안을 만드는 것이 타협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이상이 선생님의 글에 대한 저의 이견입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저의 글을 비롯해서 그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전후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 너무 신속하게 이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리신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글에 대한 이견과 조언이 있으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관심과 글에 감사드립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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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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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선생님께.
김현수 선생님은 알렉스 선생님께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셨습니다.”사실관계에 대해 저와 다른 이해를 하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이런 지적에 대해서 알렉스 선생님은 제대로 판단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홈페이지로 이 사건을 접한 이가, 이 사건과 관련한 회의에 참석한 이가 주장하는 ‘사실관계’에 대해 반박을 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려면 현수샘과 마찬가지로 회의에 참석했던 이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답을 하겠습니다.
김현수 선생님은 ”사실관계에 대해 저와 다른 이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사실관계란, ‘이 사건과 관련해 논의를 해보자는 주장을 연구실 핵심 회원들이 막았고 합의안을 만들었음’입니다. 사실입니다. 다만 이 사건이 성폭력인지를 포함해 논의를 해보길 원했던 건 김현수 선생님 본인뿐이었다는 점을 추가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을 제외한 탈퇴회원들은 아무도 성폭력인지 여부를 놓고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는 ‘탈퇴회원들의 입장’ 2번 요구안
”가해자의 ‘가해자성’에 대한 인정, 이번 사건이 ‘성폭력’ 사건이라는 인정 없이 가해자 피해자 의견의 절충으로 문제를 봉합하려고 한 점에 대한 해명과 사과문을 발표하십시오.“
여기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가해자,피해자 의견의 절충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했음을 지적하는 지점에서는 현수 선생님의 의견과 동일한 듯 보이지만, 그 앞의 전제가 다릅니다. ”가해자의 ‘가해자성’에 대한 인정, 이번 사건이 ‘성폭력’ 사건이라는 인정 없이“. 즉 진실공방이니,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니 이런 것 없이, 성폭력임을 인정하고 시작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탈퇴회원들의 입장’ 어디를 보아도 현수샘이 원했던 ‘이 사건과 관련해 논의를 했었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수 선생님을 제외한 탈퇴회원들 대다수는 논쟁을 원치 않았으며, 한 전회원은 4차 회의 시작 무렵에 일단 ‘성폭력임을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실제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시다시피 사회자(현수샘)의 제안에 따라 사건에 대해 각자 의견을 피력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11명이 나오자, 성폭력이라고 주장했던 전회원들은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정말 논의를 하고 싶었다면 왜 의견의 차이가 드러난 이후 떠나기 시작했을까요. 논의를 시작했어야 할 시점에.
”4차 회의에서 회원들 간의 의견의 차이가 크게 나고 있으니 논의를 해보자라고 진행을 보던 제가 의견을 냈지만, 논의는 감정만 상하게 할뿐이라는 핵심 회원들의 주장에 막혔습니다.“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현수샘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제가 추가해보겠습니다.
”‘4차 회의에서 성폭력임을 주장했던 회원들은 사실공방 같은 것을 하지 말고 성폭력임을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각자가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회원들 간의 의견의 차이가 크게 나고 있으니 논의를 해보자라고 진행을 보던 제가 의견을 냈지만, 논의는 감정만 상하게 할뿐이라는 핵심 회원들의 주장에 막혔습니다.“
선생님께서 적시한 ‘사실관계’들은 마치 회원들 대다수가 논의를 하길 원했는데, 몇몇 핵심 회원들에 가로막혀 ‘신속한’ 합의안을 만들게 된 것처럼 읽힙니다. 여기에 누락하신 ‘사실’을 추가하면 의미는 사뭇 달라집니다. 즉 ‘탈퇴회원들 대다수는 성폭력 여부 자체에 대해 논의하기를 애초에 원치 않았고, 논의를 해보자는 사회자(김현수)의 의견에 대해 핵심회원들 역시 논의가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라고 거부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사건에서 성폭력인지 논의 해보길 원했던 건 김현수 선생님 본인뿐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핵심회원’들이, 논의가 감정만 상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도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1차 회의에서 한 회원이 성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거센 질타를 받은 것 기억하실 겁니다. 이 ‘사실’을 추가하면 왜 3차회의에서 논쟁을 하지 말자고 했는지도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논의를 해보자’는 김현수 선생님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가장 가깝습니다. 다만 논의를 하지 못한 것이 몇몇 핵심 회원들의 거부 때문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김현수 선생님을 제외한 탈퇴회원, 잔류회원 모두 논의를 원치 않았습니다. 한쪽은 성폭력임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식으로, 다른 쪽은 의견이 다른 상태에서 합의안을 만들자는 식으로. 성폭력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공동체가 공동의 기억으로 이 사건을 의미화 하려면, 힘들지만 논쟁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여성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현수샘이 ‘우리는’ 이 사건을 다룸에 있어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었다고 비판해주셨으면 어땠을까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하는 경우는 세상에 거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굳이 ‘이쪽편이냐 저쪽편이냐’란 구도상에서 한쪽 편을 택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보다, 본인의 관점을 본인의 이름으로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요.
여튼 알렉스 선생님께 하신 질문 즉 ”사실관계에 대해 저와 다른 이해를 하고 계심“에 대해 제가 대신 드린 답변을 요약해드리자면,
”아무튼 회원탈퇴를 통해 타협의 중단으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타협은 중단 되어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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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아이고! 충한샘이 저를 대신해, 제가 할 수 없는 답변을 해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저도 약속을 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차원의 답을 시도해 볼게요.
우선 첫번째 질문인 '신속함과 신중함은 대립하는 개념인가'에 대해 말해보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철학은 기존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거나 혹은 상투적으로 사용되어 화석화된 개념들을 독창적으로 사용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것에 다름 아니죠.
그러므로 통상적인 이해에서 대립하지 않던 개념들도 얼마든지 대립항으로 정립할 수 있고, 역으로 기존의 용법에서 대립적인 개념들도 같은 계열로서 다룰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문제는 어떤 개념들의 대립이 가능하냐 아니냐 보다는, 그러한 사용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신중함/신속함'은 데리다가 정의의 모순적 조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제 글의 6번과 7번)을 제가 간명하게 줄인 개념들입니다.
즉 정의의 판단에는, 판단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것이 바로 타자이죠)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측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함은 실행됨으로써만 확보되므로, 당장 판단하고 결정해야만 하는 긴급성이라는 측면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신중과 신속이라는 두 측면은 정확히 상반되지만,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생략해서도 안 되는, 결국은 하나가 되어야 할,
정의에 대한 결정의 두 축이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도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현수샘이 '저에게는 선생님의 판단이 신속하면 신중하지 못하고, 신중하면 신속하지 못한 것처럼 읽히는데요.'라고 위에서 말했을 때,
그것은 오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것, 즉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와 관련되어 있는 더 심각한 오독은, 제가 신속을 성폭력을 인정한다는 쪽으로, 신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대응시켰다고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를 그렇게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제 생각입니다.
신속과 신중의 문제는, 성폭력 인정의 여부에서부터 징계의 수준을 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편과 다른 편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대부분의 이들의 마음 속에, 다른 높낮이와 경중으로, 들어 있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의를 판단하는 일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특히 이번 일에서 모든 대화와 타협과 합의와 결정이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건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controversial) 것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매우 어렵더라도 서로의 판단의 차이를 인정하고 좁혀나가는 대화가 지속되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정의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서는 일이니까요. (현수샘 역시 그렇게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때 정의란 결코 미리 정해놓은 것이 될 수 없고, 아무런 '이미지 없는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현수샘은 회원탈퇴 이전에 이미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말하셨지만, 그 협상의 단절이 바로 이런 미리 정해 놓은 생각과 결론에서 결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왔든지 말이죠. 아마도 벽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었겠지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믿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시간과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마음의 문을 조금만 더 열어 놓는다면, 대화는 끊겼다가도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 때 우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게 보이지도 않으며, 그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는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별과 분열이라는 것이 너무 근시안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과거가 된 시간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가올 시간에 대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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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자
원더랜드님께서는 사건 내용이 가진 논란의 여지에 대해 피력하시는데, 사건 자체를 다 접하신 김충한 선생님께서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두 분이서 대화해 보시는 건 어떨지...
개인적으로 느낀 건 이 공간에는 제가 겪을지도 모르는 성폭력에 대해 말하면 안되겠다는 것과 특히나 원더랜드 님에게는 제 아픔을 말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철학자를 많이 알고 유려한 글을 쓴다고 누군가의 진심에 닿는 것은 아닙니다. 왠지 그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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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베로니카침묵을결심하다. 이번 일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듯......"피해자는 떠났다."
김현수샘,
당연히 샘을 기억하고 있고요, 샘의 ‘탈출기’도 이미 글쓰기 전에 읽었습니다.^^
댓글로 질문하셨어도 될 것을, 이렇게 크게 다루어 주셔서 황송하네요.
우선 저는 온라인에서 논쟁하는 것은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대면하지 않고 글로써만 논쟁할 때는 오해도 많이 생기고 당사자들이 훨씬 더 상처를 주고 받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논쟁할 때조차 주고 받는 그 눈빛 속의 물기가 여기엔 없잖아요.
그러나 공들여 질문을 주셨기 때문에, 짧게나마 답변은 드릴게요.
더 좋은 건 샘도 <데리다 읽기> 세미나에 나오셔서 함께 토론하는 것일 것 같아요. (I really mean it!) 이번 사건처럼 우리가 늘 마주치는 정의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조금 바빠서, 이따가 성실한 답변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