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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의는, 공동체는 이제부터 시작인가?

wonderland 2018.04.17 22:11 조회 수 : 1211

알렉스입니다. 비회원이고 현재 <데리다 읽기> 세미나 회원입니다. 격앙된 말들이 아니라 비로소 이성이 숨쉬는 언어들이 오가게 된 지금, 저는 왜 이번 사태가 하나의 끝이 아니고 시작인가를 말해보고 싶습니다. 관련된 사건의 디테일은 전혀 모르지만, 이제는 그것을 모를수록, 어떤 이분법적 표상의 블랙홀에 빠져들지 않고, 오히려 이번 사태의 함의에 대해,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더 쉽게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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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수유너머에 1년 전쯤 도착했습니다. 처음 오던 날, 완전한 타자인 저를 진심으로 반갑게, 열린 마음과 밝은 미소로 맞아주었던 심O정 선생님과 김O우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가지 세미나와 강의에서 수유너머의 모든 분들은 예외없이 ‘타자에 대한 환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진심의 공동체적 실천에 감염되어 저도 이 공간에 오는 분들과 어떤 배경과 나이조차도 아무 상관없는, 이름 하나로 족한 환대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고 자유롭고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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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타자라는 것은, 공유하는 것이 많아지는 친구가 될 때, 하나의 공동체의 조금 더 구속력 있는 동료가 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타자성을 서서히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것 중 하나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친한 친구나 가족에 대해서는 이해와 일치에 대한 기대의 수위가 한참 높아지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현실이 의례 그렇듯 나의 것과 배치되는 친구/식구의 생각과 행동이 드러날 때,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지?’라는 심한 실망과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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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백하고 또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서로에게 타자이고 타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타자는 언제나 (가족으로도, 친구로도, 회원으로도) 환원불가능한 타자이면서, 이미 도래해 있는 타자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낯선 생각을 가졌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존재입니다. 나와는 다른 것, 다른 생각, 다른 사물 자체가 타자입니다. 친구와 동료에게서 이러한 타자성이 상실되거나 망각될 때, 우리의 환대는 넌센스가 됩니다. 왜냐하면 환대란 전혀 예기치 않은 타자의 방문/도래에 대한 열린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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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가 아닌 것들 사이에서의 교류와 일치란 자기동일성의 확인과 그것에서 오는 안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는커녕, 그 악명 높은 자아에서도 한 걸음도 걷지 못한 것이 됩니다. 자아의 자기동일성이란 것조차, 불교의 연기론이 훌륭하게 해체하듯이, 환영에 불과한 것이지요. 크리스테바의 책 제목처럼 (Strangers To Ourselves),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들, 스스로에게도 타자인 존재들입니다. 한마디로, 대략난감한 다양체이지요. 그리고 그녀의 성찰이 보여주듯, 이 곤혹스럽고 이물스러운 타자성이야말로 우리의 자유와 해방의 원천이 됩니다.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의 신체와 사유는 동일성의 감옥을 벗어나 변용되기 시작하고, 그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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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수유너머 회원들 중에서 이런 점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차이와 타자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은 공부와 생각을 해왔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런데 왜 이번 사태에서는 차이의 공존과 낯선 생각의 받아들임이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요? 그것이 단순히 평소의 말과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문제가 무엇보다도 윤리적 올바름에 대한 믿음의 충돌, 즉 정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희생했던 친구들도, 자신의 정의감에 배치되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요. 이렇게 보면 정의는 내 인격의 핵심이 걸린, 물러설 수 없는 단호함의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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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의의 문제에서도 핵심은 바로 타자입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정의란 타자에 대한 무한하고 절대적인 개방성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정의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법/권리를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그것을 초과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모를지도 모를, 아니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는) 계산할 수 없는 것과 함께 (내가 겨우 알고 있는 것으로) 계산하는 것이며, 결정불가능성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모든 법을 파괴하면서, 마치 처음처럼, 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모순적인/아포리아적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판단중지의 순간을 거치지 않은 정의란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계화되고 프로그램화된 결정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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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또 하나의, 상반되는 특징은, 그것이 이렇게 판단유예의 순간을 포함하면서도, 당장 결정되고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없이 결정을 연기하는 정의란 형용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에 대한 (불충분하게 신중하고 불충분하게 신속한) 결정은 언제나 잠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극복/해체해야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가 이렇게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결정과 해체의 운동이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모든 법과 권리의 세움 속에 들어있는 필연적 폭력 때문입니다. 모든 선언과 주장에 내장되어 있는 기원적 폭력, 언어의 수행성에서부터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섬세한 인식이야말로 정의에 대한 논의의 시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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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의의 문제는, 단호함과 선명함을 원하는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언제나 협상이고 타협인 것이 숙명인 문제입니다. 신속함과 신중함 사이의 타협. 법의 일반성과 개별 상황의 특이성 사이의 타협. 언어적 표상의 법칙을 따르도록 명하는 요구와 그것에 대한 불복종과 초월을 명하는 요구 사이의 타협. 이것은, 데리다의 말을 빌면, “공약 불가능하고 근원적으로 이질적인 두 차원 사이의 타협”입니다. 그래서 정의는 언제나 고뇌를 동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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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이러한 협상적 성격은 잘못된 것, 그른 것, 악을 응징하고 뿌리뽑으려는 우리의 선한 본성을 때로는 지치고 실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질성 사이의 타협은 다른 한편으로 이 본성이 그 열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 또다른 폭력의 가능성을 줄여주는 구원의 기제이기도 합니다. 정의를 추구하지만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때 (데리다에 의하면, 그러한 확신은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논쟁하고 견줄 수 있는 타자들의 정의의 존재는 나의 정의를 가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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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리 공동체의 문제로 돌아가보면, 이번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바로 평소 우정의 베일 속에 잠재해 있던 타자성이고, 정의에 대한 다른 판단입니다. 저는 이것이 피해자편 대 가해자편의 대립이라는 불모의 언어나, 나이 많은 남성 대 나이 적은 여성 사이의 대립이라는 허구적 표상으로 표현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굳이 정식화한다면, 충분히 신속하려는 정의감과 충분히 신중하려는 정의감 사이의 대립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이미 각자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정의의 이질적 특성 사이의, 고뇌를 요구하는 대립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립의 드러남은, 비록 그 드러나는 방식이 어떤 격렬한 파열음을 동반한 것이었지만, 좋은 것이었습니다. 수유너머라는 공동체가 어떤 동일하고 획일적인 생각과 판단의 기준에서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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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타자성과 차이의 드러남을 지속적 대화의 시작으로 삼지 못하고, 회원탈퇴, 즉 타협의 중단으로 이끌어 간 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이후의 적대적 감정과 언어들. 이것이야말로 매우 오래되고 진부한 형태의, 매우 심각한 분리입니다. 분단은 이미 마음 속에 있다고 했던가요?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노론과 소론은 다 무엇이었으며,  NL과 PD는 다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도 제주 4.3을 서늘하고 숙연하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끔찍한 적대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결국 차이와 타자를 견디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그것을 말살해 동일성만 남겨 놓으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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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로 이 시점이야말로 수유너머의 구성원들이 다른 클리나멘, 즉 새로운 변용을 가능케하는 이탈을 보여줄 때입니다.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불모의 역사로부터의, 반목과 불화의 유전자 조합으로부터의 이탈을. 견해와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그 차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공동체를 보여줄 때입니다. 우리가 지난 가을에 함께 들뢰즈에게 배운 것처럼, 차이란 왜 존재의 일의성(univocity)과 동의어인지를 되새길 때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목소리로 말해도, 결국 그것들은 다 한 목소리임을. 정의도 공동체도 결국 그 한 목소리로서의 차이를 찾아가는 신나는 실험의 도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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