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익명씨의 글을 읽고...

힐데 2018.04.09 22:39 조회 수 : 1390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듯한 소모적인 기분에 지쳐 더 이상 논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글을 보니 상황이 너무 심각해 보여 또 글을 적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의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군요. 

당신의 친한 친구가 성추행범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별로 친하지 않던, 낯설기까지한 다른 세대의 사람이 성추행의 피해자입니다. 그 낯선 타자가 내 오랜 친구를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진실이고 정의랍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게 바로 기성세대가 직면한 미투 상황입니다. 

당신들이 정의로웠던 80년대는 이미 갔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다 그게 맞다고 하고 그 신념을 지키는 게 곧 사회의 정의였던 시대는 갔다는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가난한 대학생이 아니고, 당신의 친구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과 정의를 위한 신념에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미 사회 각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서 부족할 것 없이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로 다음 세대의 존경을 받거나 그들을 직원으로 또는 학생으로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자리에 오르시니, 이제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셨겠죠. 친구들이 모두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곳에서 살고 계셔서 참 편하고 좋으시겠습니다. 고집 꺾고 양보만 하면 평화가 찾아오는 세상에서 살고 계신다니 부럽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당신들이 지금 이 곳을 살기 좋게 느낄 수록 사회의 부조리를 체감할 수 있는 감각이 무뎌지고 속세의 논리에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투운동은 아마 당신들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왜냐면 미투운동은 새로운 세대의 정치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정치는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운동이죠. 미투운동은 몫 없던 자,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혼자 감내할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 자신도 한 사람으로서 셈해질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몫은 당신의, 그리고 당신 친구의 몫의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몫'은, 당신들에게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몫은, 사실 당신들이 부당하게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과거에 타도했던 부패정치세력과 부르주아들의 몫이 그랬듯이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당신들이 지탄하던 부당한 것들이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커다랗고 자명한 것들이었다면 이번의 운동이 타겟으로 하는 것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미시적으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것들이란 겁니다. 

당신들이 부당하게 갖고 있던 몫은 이런 것들입니다. 어린 여자에게 성적인 농담 한 번 건넬 권리, 술 취했을 때 가볍게 한 번 신체를 터치할 권리,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마음대로 행할 권리, 그래놓고 기억이 안난다,몰랐다고 할 권리, 상대방의 상처와 마음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던 권리 말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권력의 편에 서면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리신 분도 계시겠죠. 

미투운동은 일상 속의 관계를 지각하는 감각 자체를 변화시키기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입니다. 내게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없는 일은 아닙니다. 내게 폭력이 아니라고 해서 남에게도 폭력이 아닌 건 아닙니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부지불식간에 모든 사건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보편자의 위치에 자기 자신을 당연스레 놓고 있었기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가 아닐까요. 이번 사건은 단순히 지금 이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감각'에 의해서 단순히 판결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타자와 소수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둔감했는지를 되돌아보고, 이전엔 폭력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을 폭력이라 주장하는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자신이 갖고 있던 '감각'을 바꾸어나가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

익명씨가 갖고 있는 공통감각, 그리고 말씀하신 평화의 논리는 오직 당신과 친구들 사이에서만 원활하게 작동할 뿐, 새로운 세대의 약자에게는 그들을 억압하고 짓밟는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쓰신 온갖 구구절절한 평화의 언어들이, 항시적인 전쟁 상태에서 살고 있는 소수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글에 쓰신 웃음 이모티콘이 소름끼칩니다. 지금 피해자는 다시는 연구실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그를 지지하던 회원 10명이 자신의 연구생활을 포기하고 연구실에서 나왔는데 뭐가 그리 대수롭지 않고 마냥 괜찮으신가요? ​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가 말했듯이 여자들이 말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세계가 여기저기서 폭발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려고 할 수 있나요?

저는 지금 아주 비참하고 막막합니다. 장난이라도 웃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연구활동을 하려던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의 잘못 때문에, 한 달간의 소중한 시간을 오직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쏟아붓고도 결국 합의에 실패하여 연구실을 나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왜 제가 쫓겨나야 했던 걸까요? 왜 이런 사건에서 항상 피해를 보는 것은 피해자와 그 지지자들일까요? 무엇이 폭력인가요? 가해자를 '가해자'라 부르는 것이 폭력인가요, 아니면 가해자를 '가해자'로 부르는 폭력을 막기 위해 애쓰다 결국 피해자와 그의 지지자들이 다시는 연구실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들 지경으로 사태를 만드는 것이 폭력일까요? 이 둘이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 수나 있는 폭력인 걸까요? 학위도 돈도 명예도 그리고 우리를 감싸주고 이끌어 줄 든든한 '친구'도 가지지 못한 피해자와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요. 

참담한 심정에 글을 남깁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이달의 주방달력] 2020-1월 저녁을 선물해 주세요 ^0^ [5] oracle 2020.01.09 493
공지 [일상생활] 주방, 까페, 베이커리 등 수유너머의 일상생활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수유너머104 2019.10.21 68
공지 [주방_일상다반] 우정의 식탁; 이용안내 개정 생강 2019.10.03 177
공지 [공간] 사람과 공간의 좋은 관계를 위한 제안 oracle 2019.02.04 438
공지 [공간] 연구실 청소 - 매주 화요일/토요일입니다 admin 2017.11.20 530
공지 [카페 소소] 이용은 이렇게 해요~! 효영 2017.07.11 809
공지 [카페 소소] 소개 효영 2017.03.19 1046
121 소소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에 관하여 [10] 이지은 2018.04.09 1277
120 가해자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가해자 2018.04.08 1391
119 반성합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7] nomadia 2018.04.07 1222
118 성폭력 사건에 대한 수유너머 공식발표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3] ㅎㅎ 2018.04.07 1076
117 반성합니다. [1] 카본 2018.04.07 732
116 사과문 [2] admin 2018.04.07 870
115 성폭력 사건 최종 보고에 대한 공지글의 문제제기 [1] 소네마리 2018.04.07 649
114 성폭력 사건에 대한 수유너머 공지글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2] 힐데 2018.04.07 761
113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결과 보고 [20] 수유너머104 2018.04.07 3370
112 수유너머 성폭력 사건 피해 당사자 입니다. [18] 샤샤 2018.04.06 7064
111 [주방] [일상다반] 3월 선물 목록입니다 file 김민우 2018.04.03 241
110 공동체 내 성폭력(성희롱) 사건에 대한 진행 상황 [2] 수유너머104 2018.03.16 2020
109 신뢰 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든바위 2018.03.14 643
108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위'와 수유너머104 회원들에게 드리는 글 지안 2018.03.09 1415
107 성추행이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4] 솔라리스 2018.03.01 1836
106 [주방] [일상다반] 2월 선물 목록입니다. file 김민우 2018.03.01 203
105 [카페 소소] 2월 선물 목록입니다. file 구르는 돌멩이 2018.02.25 199
104 [주방] [일상다반] 1월 선물 목록입니다 file 김민우 2018.02.06 209
103 공부좀 합시다 [3] file menestrello 2018.01.05 611
102 [주방] [일상다반] 12월 선물목록입니다. (1/4 까지) file menestrello 2018.01.04 20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