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에 오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일원으로서, 그리고 수유너머 104를 새롭게 만들 때 열심히 동참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저는 이곳을 떠나도 축복하는 마음으로 떠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수유너머 104가 스스로를 쇄신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바뀌어가길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된 여러 사태들을 보며, 또 전혀 반성과 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영혼 없는' 입장발표문을 보며, 더이상 젊은 친구들이 이곳의 번드르르한 '말'에 속아 똑같은 고통과 피해를 반복하지 않도록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혼자 힘으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수유너머의 공식 발표에 동의할 수 없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밖에서 이 사건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의 판단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겠지요. 물론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요.
오랜 인연을 맺어왔던 수유너머를 향해 이렇게 밖에서 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참담하지만, 이 또한 '역사 속의', 그리고 '제 기억 속의' 수유너머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유너머 104의 회원들에게 묻습니다.
성폭력 사건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현재 연구실 성원들의 '진심'이 담긴 발표입니까?
지난 1달 여간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대책회의들과 토론들은 연구실 핵심 성원들 중 상당수가 이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최종 입장 발표가 있기 불과 며칠 전에 열린 4차회의에서, 참석자 중 11명이 성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3명이 기권했으며, 성폭력이라고 보았던 분들 중 일부도 매우 미온적인 입장이었지요.
심지어 그 회의 이후 성폭력임을 주장했던 회원들 '일부'가 아니라 '상당수'(10여 명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가 탈퇴하면서, 현재 남아서 주도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이 사건이 '성폭력'이라는 기본 전제에도 동의하지 않던 분들입니다. (물론 여전히 남아서 고군분투 하시는 분들이 있음을 알고 있고, 그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어제 피해자의 글이 올라오고 외부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긴급히 회의를 소집하여 발표한 최종 발표문은 매우 '뜻밖'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느닷없이' 연구실의 젠더감수성이 부족함을 '통감'하고 피해자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것이 과연 현재 연구실 성원들의 '진심'일까 의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회원 탈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난 1달 간의 논의 과정에서 그분들의 완고한 감각과 논리를 도저히 바꿀 수 없다는 '벽'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산술적인 '다수결'의 결과만으로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연구실의 위계적인 소통과 결정 구조, 뿌리 깊은 연구실 문화의 어떤 폐쇄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주장처럼, 사건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와서 다시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방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사건에 대해 '그분'들의 의견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을 것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따라서 입장 발표문에는 사건의 '진실'은 커녕, 현재 남아계신 대다수 회원들의 '진심'조차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본인들의 입장을 떳떳이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못하는 것인지요?
외부의 시선과 비판이 두려워서입니까?
'내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여전히 외부적으로는 '진보'라는 이미지의 포장이 필요해서입니까?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나간 회원들의 자리를 보충할 새로운 젊은 '인력'을 찾기 위해서입니까?
젊은 친구들을 불러 뭘 하시게요, 라고 여쭤봤을 때, '가르쳐야지'라고 말씀하셨던 분께, 다시 묻겠습니다.
도대체 지금의 수유너머가 젊은 친구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하루 아침에 갑자기 '통렬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면, 도대체 그 반성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피해자 보호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음은 물론이요, 이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상처 받고 떠난 분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혼 없는 반성문'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네요.
차라리, 지금 수유너머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시고, 그런 정체성에 입각해서 활동하시는 게 떳떳하지 않을까요.
피해자 혹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을 당했음을 말하고 있는 와중에, 조직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이 정말 성폭력인가를 판단하는 논의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논의라기보다는 수유너머라는 조직의 '중심들'에 의한 초월적 판단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 맞섰던 10인 가량의 회원들이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조직 자체에서 빼내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조직 자체가 적폐인 상황에서 그 10인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동시에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 같네요. 이 적폐의 조직이 내딛는 앞으로의 걸음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