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 주방, 까페, 서점, 복사 등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wonderland

이번 미투운동이 남성들을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 이것은 좋은 의미의 '사건'임에도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여기를 사는 남자와 여자들의 사유와 존재의 지평을 바꾸고 넓히는 사건.

그들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지만, 어떻게든 응답할 수밖에 없는 사건.

지각불가능했던 것을 지각하게 만들고, 사유불가능했던 것을 사유하게 만드는 사건.

 

첫째로, 이제는 모두가 '미시 권력이 만들어내는 파시즘'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의 고원>의 저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파시즘의 본령은 거시정치가 아니라 미시정치, 즉 일상 속에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에게 시간적으로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리고 공간적으로 아주 미세한 조직과 관계에서부터

생활의 기본원리로 작동하는 위계관계,

그 비대칭한 관계 속에서 나이, 서열, 신분, 경력, 직급 등 어떤 형태의 권력이든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의 자유를 침해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 구조.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체화된 착취의 가해자는 분야와 인간의 종류를 가리지 않습니다.

성폭력은 그 가장 극악한 형태임에 틀림 없지만,

또 다른 방식의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 파시즘은 또 얼마나 만연한 것일까요?

따라서 이제는 '대등한 인간의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의 뒤를 돌아보면서 반성함으로써만 

유지해나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모두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이 '일상 속의 파시즘'은 끝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좀 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로서,

'삶의 능동성'에 대한 큰 사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다시 말해, 블랑쇼가 천착했고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수동성/무능력이 가지는 역량'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특히 성취욕이 강한 한국인들은

그래서 그 수단이 되는 힘/권력에 대한 호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지요.

(다시 한 번 이것은 아주 작은 권력까지, 바로 그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힘(=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신뢰/믿음만을 증가시켜 갑니다.

그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니까요.

따라서 단순한 수학적 원리로서, 

자기가 믿고 원하는 힘의 총량은 증가하고 스스로의 역량은 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주위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탈취하고자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타자에 대한 착취는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결과로서, 현상으로서 드러나는 모든 종류의 성취에 대해서 찬양하고 승인합니다.

물론 모든 인간적 성취가 부당한 것도 아니고 백안시되어야 할 것은 아니겠으나,

이 과도한 성취의 욕구는 또 얼마나 자신과 타자를 괴롭히고 내모는 것일까요?

성취욕의 과도의 여부는 또한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컨대, 여자들 앞에서 자주 바지를 내렸다는 그 원로시인은 과연 단순히 그들을 희롱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성취욕과 지위에 비해 왜소해진 자신의 역량을 강박적으로 확인해보고자

또다른 뒤틀린 폭력적 방식으로, 약자로서의 타자에게 그 알량한 힘을 행사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제는 삶의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인식의 전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내재적 정신과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 한,

들뢰즈의 말처럼, 그가 왕이라해도 노예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자, 행복하지 않은 자, 자재하지 않는 자가 타자를 착취합니다.

착취의 피해자는 평생의 트라우마를 갖게 되지만, 가해자 역시 무의식 속의 죄의식으로 인해

편안한 잠을 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타자와 사물들을 복속시키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그들에게서 물러나,

수동적인 상태에 침잠하면서, 그 타자들이 발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 자유로운 교류와 사귐의 의미를 느끼면서, 호젓한 길을 산보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야말로 역량의 진정한 상승이며,

타자에게는 행복을, 자신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일 것입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