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와 미투운동
저는 수유너머를 탈퇴한 '전'회원입니다. 앞선 모든 말들처럼, 선 자리마저 달라진 이제 와서는 더더욱, 이 말이 과연 타인의 마음에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힘을 모아 글을 남깁니다.
수유너머는 대학로 시절부터 남산 시절 초기까지 제 30대의 절반을 온통 바쳤던 곳이고, 또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래 떠나 있는 동안에도 늘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공간이었습니다. 20대의 방황 끝에 들어간 대학원에서 오로지 인정투쟁을 위한 ‘공부’에 낙담해 있던 제게, 수유너머는 다시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준 곳이었으니까요. 꼬뮨과 외부성, 서로에게 친구이자 스승이 되는 우정, 일상의 혁명, 선물의 순환, 삶과 세계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공부... 수유너머가 제게 가르쳐준 그 말들에 때로는 가슴이 설렜고, 때로는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반짝이는 말들과 비루한 현실의 낙차를 느낄 때마다 절망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희망하도록 북돋운 것 역시 그 말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전의 수유너머 생활도 짧은 도취의 순간이 지난 후의 일상이란, 늘 말과 현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의 끝없는 줄타기였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끼리끼리 어울려 ‘파벌’도 생겨나고, 사소한 감정 다툼이 번져 돌이킬 수 없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남용된 탓에 반짝이던 말들조차 누덕누덕해지고, 껍데기만 남은 말이 오히려 사람들을 찌르는 칼날이 되었던 적도 많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유너머가 제게 여전히 첫사랑처럼 아름답게 기억되었던 것은, 그곳에 언제나, 그 반짝이는 말들이 현실이 되길 꿈꾸며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버티어 준 이들도 있고, 애쓰다가 소진되어 떠나갔던 이들도 있고, 핵심에서 연구실을 이끌었던 이들도 있고, 외곽에서 건강한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작년 봄 수유너머 104를 새로 꾸릴 때, 가깝고 먼 곳에서 수많은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 역시, 그 꿈을 응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선물을 받고, 번듯하고 쾌적하고 심지어 ‘호사스러운’ 공간을 누리게 된 ‘우리’들이,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말과 현실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유너머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의 헌신과 선물들에 의지해 존속해올 수 있었던 만큼, 수유너머는 지금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만의 것도 아니고, ‘회원’들만의 것도 아니며, 어떤 ‘대표성’을 띤 이들만의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투선언은 수유너머 104에 큰 시련인 동시에 기회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수유너머의 역사가 벌써 2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거듭해서 실패했던 문제점들이 이 작은 사건 안에 응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미투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젠더감수성’의 문제로 제기되었지만, 넓게 보면 ‘일상의 혁명’을 말해왔던,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던,) 연구실의 코뮨주의와도 통하는 지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실 역시 우리 사회의 여느 장처럼 ‘중년’, ‘남성’,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이끄는 구조이고, 그런 점에서 ‘나이’, ‘성별’, ‘학력’으로 인한 차별과 위계, 미시적인 권력의 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은 코뮨의 ‘말’들과 늘 상충되었고, 언제나 이로 인한 ‘불화’가 있었으며, 현실 논리로 말을 지워버리려는 ‘통치’와 말이 현실이 되도록 하려는 ‘정치’가 우리의 일상에서 항상 길항해 왔지요. 저는 우리가 이 간극을 얼마나 민감하게 의식하고 좁혀가려고 애쓰는지가, 코뮨으로서의 연구실의 건강함, 심지어 존재 의미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코뮨은 아닙니다. 즐겁게 밥 먹고 산책하고 파티하고 여행을 다니는 ‘일상’을 같이 하는 것만으로 코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떤 ‘일상’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지, 언제나 현실은 불완전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떤 ‘꿈’을 공유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지, 저는 그런 게 연구실이 ‘공동체’인가 아닌가를 가름한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으로서의 수유너머 104가 외부의 그 어떤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사회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치열하게 ‘공부’해서 사회 변혁의 담론을 생성하는 것도 아닌 지금, 우리의 ‘일상’과 관계의 ‘질’을 통해 스스로가 ‘공동체’임을 입증하는 것 이외에 어떤 길이 있을까요. 자유롭고 평등한 자들의 우정, 서로의 긍정적 역량을 증가시켜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렇지 않은 세계에 작은 해방구를 만드는 것, 우리가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 그 밖의 많은 이들을 통해 배웠고 해왔던 ‘말’들이,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지금-여기 연구실의 일상에서 구현되도록 애쓰는 것 말고, 우리가 받았던 그 많은 ‘선물’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수유너머 104가 다시 만들어질 때, 저는 ‘우리’가 이런 꿈과 방향성을 갖고 모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좁은 의미의 ‘학식’에 기초한 일방적인 사제관계, 젠더, 나이, 학력 같은 사회적 통념에 따라 분절되고 위계화된 노동 분업, 회원이나 비회원 같은 어떤 모호한 기준의 ‘자격들’ 사이에 가로 놓인 격벽과 ‘갑질’, 연구실 ‘핵심’ 인물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차등적 권리들과 영향력.... 수유너머가 오랜 역사 동안 동일하게 반복해왔던 이 실패들을 넘어,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 많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적대의 정치’가 아니라 ‘코뮨의 우정’을 구성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수유너머 104가 이번 미투사건에 대응했던 일련의 과정에서, 이런 ‘코뮨의 우정’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말’들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우리가 함께 품었다고 생각했던 꿈을 치명적으로 훼손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선언한 미투는 우리가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구현하지는 못했던 ‘코뮨의 우정’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폭력들, 그게 폭력인지도 모른 채 행해지지만 분명 그 폭력에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폭력들에, 좀 더 민감해질 것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아픔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픔을 준 사람에게는 인지조차 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권력의 위계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나이이든, 성별이든, 학력이든, 혹은 연구실 내부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미시적 권력이든 말입니다.
저는 연구실 생활을 해오는 동안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해지지 못한 아픔들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저 역시 무심코 ‘가해자’의 자리에 서기도 했고, 어떤 때는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문제제기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무력해지고 방관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적, 커서 눈에 잘 띄는 적과 싸울 때 그토록 용감하고 ‘정의’롭던 이들이, 우리 안의 작은 폭력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둔감/무감한지를 거듭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미투 사건은 연구실에 일회적이고, 돌발적이고, 우연히 찾아온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무능력과 무감함이 쌓이고 쌓여 터져 나온 필연적 ‘사건’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단지 연구실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투 운동이라는 사회적 맥락에 접속됨으로써 의미가 좀더 분명해졌던 ‘사건’이었지요. 그 ‘사건’은 연구실의 모든 성원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지만, 우리가 지혜를 모아 해결했더라면, 연구실의 해묵은 문제들을 돌아보며, 우리 안의 일상적 폭력들을 성찰하고 극복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 역시 이를 위해 용기를 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해결 과정에서 처절할 정도로 무능력을 드러냈지요. 연구실의 현실과 말 사이의 간극은 아득할 정도로 컸고, 그 간극을 좁혀보겠다는 노력과 의지조차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말이 현실의 문제들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극복하는 ‘무기’가 되기는커녕, 비루한 현실을 합리화하고 보존하기 위해 마구 휘둘러대는 ‘흉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코뮨의 우정을 만들어가는 데 처참하게 실패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공동체로서의 존재 의미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실패들
1. 우리 ‘안’의 폭력과 책임에 대한 인정의 실패
무엇보다 우리는 ‘가해자’의 자리를 거부했습니다. 폭력의 경중, 처벌의 수위, 공개의 범위, 단어의 선택을 둘러싼 무수한 논의들은, 단지 ‘법정’에서 형식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에 그쳤습니다. 가해자의 가해자됨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무수한 말들이 겉돌고 맴돌다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를 위해 온갖 ‘논리’가 동원되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가해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요지는 이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가 고통을 느낀다니 안됐지만, 아무도 너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았어.’
그러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반성하고, 성찰하고, 바꿔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폭력임을, 가해자가 가해자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는, 가해자를 징계하고 망신주고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복수의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것이 크든 작든, 폭력을 행사한 것이 바로 ‘나’라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변화의 출발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출발점에조차 서지 못할 때, 무감각한 폭력들이 차이 없이 반복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피해자의 고통에 가해자가 없다는 주장은, 그 고통을 피해자 자신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것과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통념적’ 반응들이 흔히 그러하듯, 가해자를 가해자의 자리에서 구해내려는 ‘선량한’ 의도는, 온갖 의심과 폄하와 추궁의 칼끝이 피해자를 향하도록 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말들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행해지는 폭력, 그것이 폭력임을 지적해도 제지되거나 반성되지 않는 폭력, 자신의 가해자성을 추호도 인정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행사되고 반복되는 폭력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곳은, 어떤 ‘합의’가 이뤄진다 한들, 피해자가 다시 돌아와 활동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그 고통을 야기한 우리의 ‘책임’이라는 최소한도의 윤리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말해왔던 코뮨의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이토록 적나라한 폭력에도 무감하다면, 우리 ‘안’의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는’ 않은 폭력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갈 수 있을까요.
2. 가해자에 대한 우정의 실패
많은 분들이 ‘피조사인,’ ‘가해지목인’의 고통과 그에 대한 ‘폭력’을 우려하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논의 과정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저도 그분이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굳이 ‘친소관계’를 따진다면, 저 역시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와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장점들을 알고 있기에,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의 ‘잘못’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코뮨의 우정’을 구성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그 ‘잘못’에 대해 단호하게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그것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응답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그 책임의 인정이야말로 가해자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화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에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단호하게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피해자와의 우정 뿐 아니라 가해자를 향한 우정에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고통도, 가해자의 고통도 몇 배로 가중시켰을 뿐입니다.
3. 우정의 불평등성과 편향성
‘공동체적 해법’을 강조하면서 그토록 수없이 가해자에 대한 ‘우정’을 호소했지만, 저는 그것이 우리가 말해왔던 ‘코뮨의 우정’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코뮨의 우정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자기 식구 감싸주기도 아니고, 친소관계에 따라 행위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통념적 의리와도 다릅니다. 코뮨의 우정은 ‘평등’해야 하고, 판단은 ‘공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사안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 왔던 반응은 이런 코뮨의 우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보다 훨씬 경미한 일에 분개하며 행위자를 ‘쫓아내겠다’라고 했던 말과 이번 사건을 ‘너그럽게’ 용인하는 말이 어떻게 같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가해자의 고통에 그토록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 피해자의 고통에 그렇게 무감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요. 과거의 사례들에서 피해자들은 왜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이야기도 해보지 못한 채 연구실을 떠나야 했을까요. 저는 우리가 이런 물음들에 직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물음들에 직면해, 우리의 ‘우정’이 결코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았음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편파적으로 작동하는 ‘우정,’ 심지어 어떤 위계에서 위에 있는 자를 향해 편향적으로 발휘되는 ‘우정.’ 무리지어 웃고 떠드느라 바로 우리 옆의, 우리 안의 소리 없는 비명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우정.’ 들리지 않고 보이진 않던 고통을 듣고 보아달라는 요청을 우리의 아름다운 평화를 깨트리는 ‘불온한’ 것들로 치부하는 ‘우정.’ 그런 진부한 ‘우정’이 ‘코뮨의 우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가치들의 무차별적 상대화와 공동체의 방향 상실
어떤 분들은 줄곧 사건의 다양한 계열화와 해석의 차이들을 말씀하셨죠. 그리고 마치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적’인 것처럼 주장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했던 철학자 들뢰즈가 이처럼 나이브한 가치의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 놀랍습니다. 들뢰즈는 물론 차이의 철학자이지만, “모든 차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합하고 화해”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차이들 사이의 “공격과 선별, 투쟁과 파괴”를 통한 ‘포연 없는 전쟁’이야말로 들뢰즈가 제시했던 길이 아니던가요.
저는 다른 누구보다도, 공동체 안에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페미니즘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이와 페미니스트가, 한 공간 안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의견이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무게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잡다한 사람들이 우연히 한 공간 안에 던져진 여느 사회 조직과는 달리, 코뮨이란 일정한 가치의 지향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으로서의 수유너머 104는 언제나 미래의 사상을,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추구해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부딪치고 소통하면서, 서로의 한계를 조금씩 깨나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방향성만은 잃지 않을 때, 진보적 코뮨으로서의 수유너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공동체적 배움의 거부
가치의 ‘선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적 ‘배움’이고 ‘공부’겠지요. 미투 운동은 ‘새로운’ 세대의 운동이라고들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에 따른 편가르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중년’, ‘엘리트’, ‘남성’들이 주도해왔던 ‘진보’ 운동이 지닌 내재적 한계, 그 안의 말과 현실의 괴리를 돌파하려는 지향성이, 미투운동을 ‘새로운’ 것으로 규정하게 할 따름이지요. 일찌감치 일상의 혁명을 선언했던 코뮨주의 관점에서 보면 미투운동의 지향성은 전대미문의 새로움이 아닙니다. 코뮨이 이루고자 했으나 거듭 실패했던 바로 그 지향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안의 다양한 구성원들 중 ‘중년’ ‘남성’ ‘엘리트’의 규정성을 가진 분들이야말로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무지한’ 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 개개인에 대한 비난의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미투 운동 자체가 집단으로서의 그들이 지닌 어떤 ‘무지’를, 굳어버린 ‘감각’을 일깨우려는 운동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심지어 그분들은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평소의 날카롭던 지성마저 굳어버릴 소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모여 있는 이유는 서로에게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서로의 무지를 일깨우고 긍정적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요. 그렇기에 개개인들 각자는 자신에게 익숙한 감각, 통념, 고유한 한계 안에 쉽게 갇힐지라도,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서로간의 배움을 통해 그 한계를 힘겹게, 그러나 멋지게 돌파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려면 무지한 이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좀 더 잘 아는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겠지요. 철학을 공부할 때는 철학을 가장 잘 아는 이가 스승이 되고, 빵 굽기를 배울 때는 빵을 가장 잘 굽는 이가 스승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안의 미투 선언이 던진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점차 ‘늙어가는’ (다시 한 번, ‘늙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를 뜻하는 게 아님을 강조합니다) 연구실을 위기로 여겼던 우리에게, 마치 ‘선물’처럼, 이 ‘문제’를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는 분들이 신입회원으로 들어왔습니다. 3차에 걸친 회의 과정에서 그분들은 미투운동의 의의며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극단의 의견들 사이에서도 신중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늙고’ ‘후진’ 젠더감수성을 지닌 우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3차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드디어 어떤 해결점에 도달했다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게지요. 저 역시 그 결과를 전해 듣고 진심으로 기뻤고, 연구실이 이번의 미투 선언을 계기로 스스로를 쇄신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사태들과 4차회의의 내용은, 결국 한 달간의 지리한 논의 과정에서 어떤 공동체적 ‘배움’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감각, 통념, 친소관계, 주관적 인상, 고유한 한계를 그대로 고수했고, 오히려 강화시켰습니다.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양쪽의 증언이 엇갈릴 때, 사건의 ‘진실’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사실 입증(피해자의 피해 입증)이나 양쪽 진술에 대한 저마다의 자유로운 취사선택을 통해 규명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피해자 고통의 물질성에 기초해서 사건의 진실을 재구성한다는 것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 공인된, ‘윤리적’ 접근법이지요. 그러나 이런 원칙은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성폭력’ 여부는 마치 누구나가 자기 주관과 취향에 따라 판단할 수 있고 판단해야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성폭력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관점을 담지하고 있는 ‘법’의 언어들이 피해자를 향한 위협처럼 끼어들곤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이 완고한 태도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배움의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감각들을 일깨우는 미투 운동의 ‘정치적’ 방향성도, 피해자 고통의 물질성에 기초한 ‘윤리적’ 방향성도 잃은 채 표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줄 수 있었던 여러 친구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6. 차이들을 압도하는 주인담론의 독단적 지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연구실을 나간 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무시한 채 ‘적대의 정치’를 펼쳤기 때문입니까. 만약 연구실이 모든 차이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통되는 공간이었다면, 공동체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미투 선언을 지지하는 쪽으로 수렴되어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억견, 낡은 사고의 틀이나 감각을 깨트리는 아픔도 있었겠지만, 그 아픔은 적어도 구성원들 개개인과 공동체에게 성장통과 같은 것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연구실의 의사소통 공간은 그렇게 투명하고, 합리적이며, 평등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완벽한 공간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특정한 주인담론이 독단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차이들의 공존은, 코뮨의 건강을, 심지어 코뮨으로서의 존재성을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능력이 큰 어떤 개인이 공동체에서 지닌 권위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고, 각각의 능력에 있어 능력이 큰 자가 스승의 권위를 갖되, 각각의 능력들 사이에는 위계를 두지 않는 것. 각각의 사안마다 능력이 큰 자가 자연스럽게 스승이 되어 공동체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것. 그런 방식으로만 차이들은 공존하는 동시에 더 나은 방향으로 수렴되고, 서로서로를 일깨워 모두의 역량을 키워갈 수 있겠지요.
반대로 미투 운동과 관련해서 가장 ‘무지’한 자가 논의의 장을 주도할 때, 심지어 산술적 다수결조차 압도하는 독단적 목소리로 군림할 때, 집단으로서의 수유너머는 바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이 문제에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 우리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있었을 탁월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7. ‘합의’라는 방식의 폭력성과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
저는 결국 연구실이 나아간 방향이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성폭력이라는 인정 자체를 거부하고, 우리 안의 가해자성을 직면할 것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논의의 장을 주도하면서, 우리를 문제 해결의 출발점에도 서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가해자성의 인정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인지는 1번에서 밝혔기에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문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가해자가 아님을 ‘주장’하는 사람의 절충과 타협, ‘합의’라는 프레임으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폭력의 경중, 처벌의 수위, 공개의 범위, 단어의 선택’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결국 ‘합의’라는 프레임은 문제 해결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란 가해자의 징계에 있는 것도 아니요, 피해자의 요구를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해결이란 우리 안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그러한 폭력이 반복되지 않도록 공동체를 변화시켜 가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해자는 없지만 피해자의 요구는 일정 부분 들어주겠다는 ‘합의’의 프레임은, 결국 공동체의 문제를 문제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문제의 ‘해결’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 수밖에 없지요. 가해자가 아닌 이를 ‘징계’하려는 피해자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식으로 이뤄진 ‘합의’란, 결국 ‘피해자’(무고자)와 ‘가해자’(마녀사냥의 희생자)의 자리를 뒤바꿔버림으로써, 피해자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원한을 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합의’야말로 양쪽이 한 발씩 양보하는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해결책이라고 강변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적대의 정치’를 행하는 자라고 비난하게 되겠지요. 그것은 ‘합의’라는 이름을 가장한 또 다른 폭력일 뿐입니다.
8.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는 태도
결국 많은 이들이 이러한 ‘합의’의 폭력성과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연구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사태가 악화된 것은 애초에 연구실이 문제를 문제로 직면하기를 회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해결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아닌 것을 자꾸 문제 삼는 이들(피해자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무마, ‘합의’를 통한 문제의 봉합, 그리고 외부를 향해 연구실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을 정도의 수습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기에,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문제가 이처럼 둑이 터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무엇보다 제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급조된 연구실의 ‘보고서’였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연구실의 문제 해결 방식에 절망하고 떠난 뒤, 위에 언급한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 변화의 의지도 없이, 피해자 요구에 대한 무성의한 수용으로 문제를 봉합하려고 한 점입니다. 저는 연구실에 남은 분들 대다수, 혹은 지배적인 목소리들의 대다수가 정말로 이 문제를 성폭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입장을 솔직하게 표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비난을 감수한다면 차라리 맨 얼굴로 그 비난 앞에 섬으로써,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는 윤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떤 비난이든 그 진심을 향해 가닿고, 조금이라도 배움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우리가 해왔던 ‘공동체의 말’과 ‘현실’의 이 아득한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는 방법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공동체를 떠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일주일째 이 글을 쓰면서, 제 마음의 상태도 조금씩 변해가네요. 분노, 슬픔, 회한, 아픔, 미안, 사랑... 여러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습니다. 한때 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갈 길을 비춰줬지만, 이제는 전설처럼 아득해진, 애초에 우리에게 그런 말들이 있었던가 싶도록 희미해진 말들. 오랫동안 품었던 그 반짝이던 ‘말’들이 산산조각 난 유리파편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나의 사랑이, 제가 그 ‘말’들에 대해 품었던 사랑이, 끝나가나 봅니다.
연구실을 떠난 이들에게나, 남은 이들에게나, 진흙탕 같이 번져가는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나,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겠지요. 모두가 그 아픔에 직면하여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더 이상 이 말과 현실의 간극을, 그로부터 반복되는 폭력을, 텅 빈 말들의 기만을 견딜 수가 없어, 공동체의 꿈을 접습니다. 아마 오래도록 꿈꿀 수 없겠지만, 다시 꿈꿀 때는, 제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말들을 길어 올리도록 애쓰겠습니다. 우리의 말이 더이상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 '말'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우리의 '현실'에서 다시 출발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떠난 이와 남은 이들 각자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요. 남은 분들께는 더욱, 미안한 마음 전합니다. 세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연구실에서 만났던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세상에서 상위 10% 안에 드는 좋은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제 삶에 오래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해준 분들, 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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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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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따뜻하고 통렬해서 더욱 가슴 아픈 글입니다. 님의 절절한 애정이 제 폐부를 찌릅니다. 이 진통을 겪으면서 어쩐지, 여전히 희망(비록 낙망이 예견된 불완전한 희망일지라도)을 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는 바람(이 공동체나 공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을 가져봅니다. 역설적이게도 말이지요. 그럼요, 공부는 이래야지요. 님의 행보를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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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명문이네요..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좀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다시 기운내셔서 또 다른 가능성과 우정이 선생님 삶 속에서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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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며칠 간 너덜너덜해 있었는데, ㅎㅎ님 글을 통해 힘을 얻게 되어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서 구성하고 대화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저의 코뮨과 미투의 감수성의 영역이 확장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노력해보겠습니다.
긴 시간 정말 많이 힘드셨을텐데.. 이제 좀 편안해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위로가 되어 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이 아쉽습니다. 나중에 어디에선가라도 뵈면 꼭 인사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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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1. 폭발
뮤리엘 루카이저의 예언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었던 방식을 초월하여 철자 한 자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네요.
지금은 원래의 문제 자체보다 훨씬 근원적인 모든 문제들이 그간 겨우 가리고 있던 위선의 얇은 피막을 갈기갈기 찢고 나오며 다 드러나 폭발하는 국면인 듯하네요.
누군가는 이 폐허를 깊이 응시하면서 반짝이는 말과 사유들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잉태해내야 하겠죠.
이번에 잠시 썼다 지웠던 말인데 언젠가는 꼭 말해졌어야 했던 말이라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다시 씁니다.
".....어차피 이번이 처음도 아닌 걸로 알고 있고요.
그 때도 최대 폭력은 공동체를 자신의 사기업처럼 생각하는 순간 발생했는데 ’르쌍띠망’ 끌어다 남 탓 핑계만 대셨다더니 이번엔 또 무슨 핑계들을 대실지.....이게 바로 니체를 정신병으로 이끈 직접적 원인이었던 ’영원회귀’입니다."
이번 폭발을 계기로 이전 폭발과 실패들까지 다시 돌아가 근원적 반성과 재검토를 해내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 진범
집단 내에 만연한 은폐된 폭력성과 비겁에 맞서는 꼬뮌의 우정론에 대하여는 대체로 공감합니다만 이번의 원 문제에 대하여는 다르게 생각해 볼 지점도 있어서 짧게만 덧붙일게요.
요약하면 지금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건히 믿고 계시는 그 정의조차도 선생님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프레임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재고해주십사 하는 점입니다.근대 부르쥬아 법체계를 관통하며 이어져 내려온 피해자-가해자 구도의 개인주의 (법)윤리 프레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균열선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그어진 것은 아닐 지 몰라도 적어도 몇 사람에게는 정의 대 불의가 아니라 정의의 다른 프레임들 간의 차이일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프레임 안에서는 문제의 모든 원인이 가해자 개인에게 귀책되고 따라서 가장 앞장서서 가해자에게 더 큰 돌을 더 세게 던짐으로써만 사태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고통을 더 뼈저리게 절감하며 그럴수록 그에 비례하는 가해자의 책임성을 더욱 크게 인정한다는 증명이 되는 그런 프레임 말입니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개인의 더러운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간음을 범해 가정을 파괴하거나 믿음을 준 부모형제들을 배반함으로써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주고, 성결하고 충직한 믿음의 공동체와 미풍양속을 파괴한 여인을 감싸줬던 예수의 훼방은 도저히 이해될 경로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만약 피해자-가해자 같은 개인주체들은 모두 우리의 뇌가 꾸며낸 허상에 불과하고 심연애서 모두 연결되어있는 일체에 딸린 양태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근원적 분할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요?그래서 차라리 남는 것은 '피해자 대 가해자'가 아니라 '문제 대 원인'이라는 그런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면 어떤가요?
모든 돌팔매질을 외롭게 혼자 다 뒤집어 맞고 있는 그 외로운 가해자는 혹시 그 뒤에 숨은 문제적 구조라는 진범의 불쌍한 꼭두각시이거나 심지어 그 꼭두각시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그림자를 아예 제명 혹은 사형시켜봤자 그 진범의 잔인한 그물망에 걸려들 다음 번 꼭두각시들이 혹시 104안에도 긴 줄을 서서 순서를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희진 선생님 같은 분들은 '남자들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서 아예 '잠재적'이라는 말조차 떼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는데 혹시 가해자와 처벌자도 분할은 커녕 분간도 못 해낼 지경이면 또 어떻게 될까요? 어렵사리 겨우겨우 감별해내봤자 혹시 오늘의 가장 열정적인 처벌자가 내일의 가장 더러운 가해자는 아닐까요?(물론 아시겠지만 이런 심리기제를 정확히 지목하는 개념이 바로 '투사projection'입니다.)
그동안 명확한 의식 없이 행해졌던 이 모든 말들과 현상들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구도에서 발생했던 건 아닐까요?
이것은 선생님께서 "우리 안의 '가해자성'" 개념으로 포착하신 측면들과도 유사하나 가해자가 언제나-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라는 이런 프레임은 문제해결과 재발방지를 위한 원인분석과 대책에서도 단지 '우리 모두의 자기 가해자성 고백과 반성' 같은 도덕주의, 회개주의적 범위와 한계를 "넘어" 가해인(들)---그것이 설령 우리 모두일지라도--- 이외의 배경을 포함한 모든 각도로 보다 전폭적인 시야 개방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미투는 전적으로 지지하며 열심히 돕겠지만 이런 무망한 꼭두각시 목자르기나 더 가망 없는 꼭두각시 그림자 밟기는...........
글쎄요.......오늘은 잘 모르겠습니다.
3. 피해자의 주체화 그리고!!! 가해자의 주체화
피해자는 잘 아시는 대로 무력하고 나약한 보호와 치료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비판적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이 도달한 결론처럼 트라우마에 의한 자신의 미칠듯한 분노와 슬픔, 고통과 증상에 맞서 그 고통의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증상을 극복해 나아가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가해자는 어떨까요?
가해자 또한 간단히 쫓아내거나 없애버림으로써 문제가 해결됐다고 눈 가리며 아웅하는 것보다 진범을 잡아 없애는데 앞장세움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억울함을 벗거나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피해자에게도 직접 죄값을 보상할 기회를 주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역설적으로 그가 변명을 위해서라도 혈안이 되어 다른 범인들을 찾아내려 노력할수록 존재의 자리가 달라 생기는 거리감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진범이 그 그림자라도 보이게 되지 않을까요?
억울하거나 참회할수록 그만큼 열심히 구조를 개혁하고 문제를 해결해냄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내는 동력이자 자원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4. 경계성 미투의 동력과 한계
이하는 원 사건과 일체의 직접적 관련 없는 일반 비평이므로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미투는 '피해자의 고통'만을 유일한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 미투운동이 식어버리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강박적 목적의식이 쥐어짜듯 만들어내는 성폭력 사건들 중에는 '공통감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소수 케이스들까지 무리하게 동원됨으로써 많은 반발과 역풍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그 자체로는 주류 지배 감각과 담론들이 무시해온 미시폭력들을 여지 없이 폭로해주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어 너무나 소중하지만, 중요한 건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 단계 미투운동의 유일한 동력이 '피해자의 고통'이기 때문에 이런 케이스들에서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만이 요구사항의 중심일 경우 곧잘 고통 계량과 공감에서 오히려 가해자에게 이입되는 현상이 자주 벌어질 뿐만 아니라 사건화, 문제화와 그 지속을 위해 그 '고통'을 극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공감과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무리한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운동의 수명이 매우 짧아져 가해자가 완고하게 항변할 경우, 해결이 지연되면서 애초의 지지자들조차 점점 흩어지고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피해자 본인은 민감한 감수성의 지지자들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 연기와 호소를 거듭해야 할 수 밖에 없게 됨으로써 최측근들조차 피로와 의심 속으로 내몰아버리게 되기 때문에 이런 경계 사건들일수록 우선 더 가해자 처벌보다는 구조와 제도, (일상)문화 혁신요구로 더욱 신속하게 논점 전환을 해야 할 것이며, 향후로도 더 많은 고민을 집중해야 할 문제들 중 하나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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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지못하고
'원래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위선의 막을 찢고 나왔다'하더라도 원문제가 덜 중요한 건 아니라는 태도나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르긴 해도, 적어도 글쓴이의 의도가 '이번 문제보다 내가 느끼고 겪은 것이 더 중요하다' 고 외치려고 쓴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요.ㅠㅠ
이번 문제에 대해 '최종결정(?)' 역시 명시할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 어떻게든 마땅히 거쳐야할 과정이라 여기고요, 그리고 그러한 노고들과 그 '논의 자체"가 결코 무의미해지지는 않을 것이며 무의미해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표현을 '오래 묵은'으로 저는 바꿔 읽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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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너무 급한 글인데 일정 관계 상 틈틈이 쪼금씩 작성 중이라 퇴고는 물론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 한 글이니 논평은 완성 후 부탁드려요.
그리고 여기서 원 문제는 원 사건이 아니라 단체 내에서의 원 사건 처리 문제이고 이런 실패들을 계속 발생시키는 회귀 문제라는 점에서 '중요한'이라는 표현을 쓴 거니까 그래도 계속 비판점이 느껴지시면 추가논평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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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드려요 제발
여기 드나드는 사람들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이전의 수십 수백개의 댓글을 통해 무슨 얘기들을 하시는지 읽는사람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칠대로 지쳤으니, 지적질좀 그만들 하세요. 생각보다 꼰대가 많은건지 꼰대들만 댓글질 하는건지.. 이제 대화라는걸 좀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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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지못하고
꼰대질이 아닙니다. 제가 간곡히 권하고 싶은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프레임 전환입니다. 바보라고 여겨서 권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미투문제에 있어서의 '공감의 장'에 초대하는 조심스런 손길로 받아들여주세요. 케케묵은 유산으로부터 시대가 호명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선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 중요한 것입니다!" 화들짝 역정을 올릴 일이 아닙니다. 저도 힘듭니다. 다들 힘듭니다. 공부가 좋아 공부하러 온 곳이 이제 공부를 가장 방해하는 곳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이 또한 삶의 공부가 아닐 수 없다고 여기며 에너지 쏟으며 한 줄 한 줄 쓰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쓰고 싶습니다. 도저히 지나가지못해서 죄송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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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그럼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말에 자신의 말로 이야기해주세요. 다른 사람의 글 자체를 지적하는것좀 안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프렘임 전환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잘 좀 해주세요. 소모적이지 않고 지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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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지못하고
지적'질'이 아니라 관성에 의한 거부반응이 있으리라 예상한 어쩔 수 없는 지적입니다. 반응을 보니 정말 못 알아 들으신 걸까 새삼 맥이 빠지네요. 무의식적으로 거리낌없이, 심지어 자연스럽다고 여기면서, 불필요하고 과다한(심지어 잘못된) 위계를 지어 모든 걸 사고하고 발언하고 행동하시는 결 마다마다에는 언제나 곳곳에 폭력의 배아가 싹트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 드리며, 이만 물러납니다. 편한 시간에 꼭 잠자코 깊이 세심하게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려요.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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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멋지세요. 정말 멋지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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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군중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만나길 기원하며.....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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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
이 글이 피부 위에다 송곳으로 눌러쓴 글씨들의 총합인 것처럼, 그것이 제 피부인 것처럼 아픕니다. 그 숱한 오배 가능성과 오독의 가능성을 뚫고, '지금-여기'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에게 정확하게 도착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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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픔
거대담론에 미시감수성이 합해지면 이렇게 되는군요. 위에 댓글 다시는 분 괜한 고생 안하셨으면 해요. 선생질한 거에 다시 선생질하는 꼴밖에는 안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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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내용만 바뀌었지 형식은 전혀 바뀌지 않는 일상의 혁명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그리고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네요. 수신자를 애매하게 쓰셨지만, 사실 파고들면 누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지가 명확한 이러한 글은 지켜보는 외부인들에겐 실망감으로 다가 올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일상의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있어 어느 한쪽의 변화만 부추기기 보다는 양쪽 모두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자세를 보여주셨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많은 사람들이 일방적인 요구와 수용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구태 청산으로 보여지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의 긍정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를 추구 하려면 요구와 수용이 아니라, 개인 모두가 현재 자신의 지평에서 자기 고백하는 형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순수한 피해자도 순수한 가해자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각자가 사건에서 느낀바를 진술하고 서로을 인정했더라면 이렇게 큰 저항도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미시적 정치의 힘을 고정하는 데서 이미 편가르기와 일방성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친구를 내 뜻대로 바꾼다기 보다는, 내가 먼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친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제 글의 수신처는 여러분이 아니라 저에게 보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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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공부한 대로 제대로 하고 싶었던 사람들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사람들(중에 사실은 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구도가 보입니다. 미시고 거시고, 이념이고 나발이고 떠나서 여기저기에서 보여지는 양태아닙니까? 사건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반성보다는 알아서 즐겁게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거기에서 스스로의 존엄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신념대로 행동하는 거구요. 이 글에 대한 실망이든 이 '공동체'에 대한 실망이든 그 것 또한 선택의 문제. 수유너머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사람으로서 하소연이든 뭐든 내막을 알리려는 글들에서 빼어남을 느낍니다.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닌 성찰을 주는 글들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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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글쓴 분이 여러 감정을 억눌러 가며 거듭 언어를 정제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헌데 부러 연구실 내부의 부정적인 분위기를 ‘중년’, ‘남성’ 등으로 수식 한 것은 다소 걸립니다. 물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의 원인을 규정할 때 으레 찾게 되는 것이 가까운 세대적/사회학적/생물학적 정체성이라지만, 실컷 '우리 안의 폭력' 운운의 표현으로 글의 톤을 쌓아가시다가 결국 겨냥하게 되는 것이 '중년', '남성'이라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은유적 차원에서 저런 워딩을 사용하셨다고 부연하셨으나 성차별적 구조의 최종 책임을 기꺼이 저쪽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암묵적인 가정이 뚜렷하여, 부연이 무색하게 의미심장해 보이네요. 최근 몇년간 중년 남성들을 향해 가해져온 이런저런 종류의 성토와 비난들은 확실히 징후적이었으니까요. '꼰대, 눈치 없음, 냄새남, 권위적임, 무식함, 무력한 386, 비루한 성욕, 무반성' 등의 단어들은 그들을 묘사하는 단골 수사였죠. 때론 상징적 수준에서 가장 타자화된 정체성은 중년 남성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물론 '코뮨'을 지향해온 연구실 내부에서도 그런 투박한 가정들은 통용되고 있었겠죠. 이 글은 반성폭력 운동을 추동하는 이들의 의식의 기저에 어떤 전제가 들어서 있는지를 은연중에 체현하고 있는 사례로도 읽힙니다. 문제의 열쇠가 정말 늙은 남성들에게 있을까요?
수유너머의 적잖은 구성원들이 피해자 고통의 물질성에 주목하지 않고 '폭력의 경중, 처벌의 수위, 공개의 범위, 단어의 선택을 둘러싼 무수한 논의들'에 그쳤다는 점을 사안을 올바르게 다루는 데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했다는 근거로 드셨습니다만, 사실 성폭력 케이스를 해결 하는 핵심은 폭력의 경중, 처벌 수위, 공개 범위, 단어 선택에 있습니다. 피해자 고통의 물질성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가해자에게 그/녀가 무심코 행했던 행동이 '가해'가 되는 일임을 교육하고, 바로 당신이 남에게 참을 수 없는 위해를 가한 '가해자'라는 점을 선언하는, 언어의 수행적 힘을 적확하게 사용하는 일입니다.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가해주체가 되기 때문에라도, 언어의 적확하고 비-격정적인 사용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경중, 처벌 수위, 공개 범위, 단어 선택이야말로 성폭력 케이스를 올바르게 해결하고 가해자의 인식에 개입하는 일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해자'라는 워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해의 여지가 있겠으나, 사실상의 내부 공론화 및 징계 처분, 사과문 작성으로 충분히 상쇄되는 요소인 거 같고요. 실질적인 가해자 교육에 해당하는 절차들을 전부 밟게 하고, 징계 처분까지 내린 상황에서 굳이 그 토씨를 잡아 피해자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이 이 사건에 어떤 기여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성폭력 '가해자'에 따라붙는 사회적 배제 효과와 경중을 따질줄 모르는 그 윤리적 무게를 감안할때, 가해자의 처분 수위를 조절하는 일을 피해자의 요구와 동시에 고려한다는게 어째서 문제적인지 잘 모르겠고요. 피해자-가해자의 인권보장 및 처분 및 지원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최근의 분위기가 제겐 외려 놀랍습니다. 결국 문제적인 사안을 앞에 두고 얼굴을 마주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수차례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떠난 이후 '피해자중심주의'를 논하시는 건 공염불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런 식의 글들이 타임라인 상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보면...맥이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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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아무리 단어를 순화하고 정제하려고 하여도, 내뱉은 말의 주체는 저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했던 '중년’, ‘엘리트’, ‘남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존의 언어가 가진 구조로는 그 것을 끄집에 낼 수 없기에.
아! 명문입니다....
(이런 말부터 하는 제가 싫습니다. ㅜㅜ)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삶을 살아라' 라는 걸 배웠습니다.
어떻게 함께 해야할 지는 모르지만 with you...
실망의 정서도 이리 아름다울 수 있다니...... 갑자기 격통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