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연구실에 빵을 만들어 가긴 했지만, 새 공간에서 빵을 구워보자고 생각한건 순전히 영진쌤 때문이었습니다. 어느날 영진쌤이 집에 굴러 다니는 궁중 팬을 개량해서 담백한 빵을 구워오지 않았겠습니까? 새 공간에서 어떤 작당을 해볼까 하는 상상력이 충만하던 시절에, 그걸보고 담박에 빵을 구워보자고 제안했어요. 빵집 이름도 영진당이라고 하자고 막 바람을 잡았죠.
그래서 오븐도 장만하고, 또 선물로 컨백션오븐도 하나 더 장만하고 했지만 빵 만들기는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물받은 오븐도 새로 장만한 오븐도 술안주용 감자를 굽거나 소시지를 굽는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근데 오븐들이 자꾸 저를 째려 보는 것 같았어요. 더 이상 그 눈치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무턱대고 빵을 구워서 내 놓기 시작했어요.
(이게 제일 처음 나온 빵인지는 잘 모르겠음. 암튼 초기에 만든 빵임. )
일단 연구실에 빵냄새가 폴폴 나서 좀 좋았고, 나오자 마자 맛이 있든 없든 맛있어라 하면서 바로 사서 나눠먹어서 더 좋았던거 같아요. 근데 혼자 만드니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기로 했죠. 그래서 제빵 강습을 시작했습니다. 영진당의 주인공 ,영진쌤을 조교로 ㅎㅎ
매주 화요일 1시에서 3시까지 제빵 강습을 했죠. 아정, 수용, 수정, 은선, 은정, 동학, 명진,로라 쌤들이 참여 했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자꾸 물어요.
"쌤은 어디서 제빵기술을 배우셨어요? 학원을 다니셨나요?"
"눼~ 저는 아무런 자격증이 없는 야매 기술입니다. " 사실 저는 옛날에 옛날에 구글 뒤져서 줄리아 머시깽이, 마사 할매 등등의 레시피들을 따라 해본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무대뽀정신으로 해 보는 거죠. 빵은 밀가루를 부풀려서 구운 것이다 라는 간단한 이론을 바탕으로 ㅎㅎ 저는 넘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들어가는 레시피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 가령 바게트나 치아바타 같은..
근데 우리의 영진쌤은 저와는 다른 인간이더군요. 제빵 강습을 시작하자 마자, 온갖 제빵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드뎌 이틀에 걸친 발효와 반죽을 한 후에 바게뜨를 완성하네요. 음 풍미도 자태도 너무나 굿 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이 없습니다.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진을 안찍으시는 군요. (누가 시진 찍어 놓으신 분 제보 바래요^^) 그리고 얼마 후에는 비가를 만들어서 치아바타도 완성했어요. 비가는 치아바타 전용 발효종입니다. 치아바타는 이태리에서 1980년대에 만들어진 빵이예요. 프랑스의 바게뜨를 겨냥해서 만든거죠. 치아바타는 "쓰레빠(ㅋㅋ 슬리퍼라고 쓰고 쓰레빠라고 읽는)" 라는 뜻이에요. 반죽을 쓰레빠처럼 납작하게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죠. 영진쌤의 치아바타도 훌륭했어요. 치아바타의 생명은 아름다운 기공인데.. 그걸 근사하게 만들어 냅니다. 그치만 이것도 사진이 없네요.
제빵실습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시는 분은 원명진쌤입니다. 수용쌤도 찬찬해서 가능성이 보이는 분이시고요. 이 두분은 거의 영진쌤과인 것 같아요. 저처럼 후딱 휘리릭 하는 것 보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하는 걸 선호하시는 분들이죠. 원명진쌤은 일요일에 나오셔서 빵을 굽고 계세요.
[실습생들이 만든 작품. 원명진 쌤이 혼자 만든 포카치아와 우유식빵, 그리고 실습시간에 만든 호두파이 ]
근데 빵집을 운영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영진쌤이 이틀에 걸쳐서 만든 어여쁜 바게뜨를 돈 받고 팔기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제가 만든 빵들도 아무리 후다닥 만들어도 그래도 정성이 꽤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팔기 아까웠어요. 그냥 나눠 먹을땐 좋았는데 가격을 매기고 팔려니 영 기분이 거시기한거죠. 어떤 기분이냐 하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만든 빵들이 "싸고 질 좋은"이라는 상품 가치로 딱 셈해지는 느낌이랄까요? 빵을 만들고, 누군가가 사서 바로 함께 나눠먹거나 할때는 뭔가 되게 뿌듯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고, 누구나 사먹을 수 있게 가격을 더 낮추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고 뭐 그러는 와중에 좀 맥이 빠져버리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래서 한동안 빵을 만들기 싫었답니다. 그렇지만 오븐과 제빵기가 계속 저를 째려보고, 일요일엔 명진쌤이 빵을 구우러 오시고 또 빵이 맛있다고 마구 이야기 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고민 중이예요. 세미나 간식을 해결한다거나 아침 식사용 빵을 연구실에서 사갈 수 있으면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왜 기분이 개운치 않을까요? 상쾌하게 빵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뭐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빵은 아마도 계속 구을 것 같아요. 시큼한 시골빵을 만들 발효종을 만들어버렸거든요. 이건 생물이라 계속 빵을 만들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답니다. 요쿠르트 만들어 보신분들은 아실거예요. 만들거나 버리거나 해야하죠. 된장(누구말대로 ㅎㅎ) 이제 미생물까지 아우성을 치니 빵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ㅋㅋ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빵 만들기로 유혹해야 될 거 같아요. )
한달간 일상다반 빵집을 운영한 이야기 였습니다~~
추신1) 빵집에 밀가루나 버터 선물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추신2) 매주 화요일 오후 1시~3시 제빵 강습이 있습니다. 월회비는 2만원 이고, 빵 만들기가 익숙해 지시면 시간을 정해 놓고 연구실에 나오셔서 혼자 빵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빵은 자신이 가져갈 빵과 공동체에 내 놓을 빵을 함께 만듭니다.
댓글 8
-
큰콩쥐
-
예 밀가루 반죽, 특히 발효가 빵빵하게 된 반죽을 만지는 느낌이 아주 좋죠. 제빵실습시간에는 카페가 떠들썩 해 져서 공부하시는 분들께는 쪼꼼 미안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예요. 빨리 필살기 하나 배우셔서 조교 하셔야지요!
-
부족했지만 쿠프만큼은 제대로 나왔던 바게트를 사진으로 남겨놓을 껄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적당히 요령은 생겨서 정성 들이는 만큼 맛은 나온다 싶은데, 식감을 좌우하는 반죽 열심히 하는게 쉽지 않고 특히 쿠프가 제대로 안나와서 뽀대 1%가 부족해요.
치아바타도 원하던 기공은 아니었어요. 몇번 안해봤으니 제대로 나오길 바란 것도 무리고요.
초반에는 실패할 때마다 뭔가 배우는 게 있었는데 제대로 했다 싶어도 잘 안되니 슬적 게을러지기도 하네요.
영진당이란 이름을 지어놓고는 잡곡빵이 맛있다고 하는 혜진샘 때문에 김이 빠지기도 하고요. 당분간은 요가하는 날은 바쁘니 쉬어야겠어요.
저도 얼른 바게트랑 치아바타 완성하고 레시피를 늘려가야죠.
-
천해루
우왕! 유미쌤! 저 노은정이에요!
몇번 굽지는 않았지만 화요일 오후에 밀가루와 버터 냄새를 맡으며 빵을 구워보는 시간은 참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무거워서 자두가 폭싹 주저앉은 귀여운 플럼파이, 크랜베리 한주먹 넣었던 첫번째 도전작 스콘, 너무 맛있었던 달달한 바나나빵, 내가 만들고도 깜짝 놀란 초코칩 초코빵 등등 맛없는 빵이 없어요. 그때 아는 분 선물로 가져다드렸더니 진짜 감동하시면서 너무너무 맛있었다고!!! 9월에는 스케줄상 화요일에 못나오는데 넘 아쉬워요. 흑흑..
-
카본
오 은정씨 감기는 좀 어때요? 제빵 기술이 제법 쓸모 있는 환대의 기술 맞죠? 화요일 시간이 안맞으면 다른 때와서 배운거 복습하세요~ ㅎㅎ
-
가능성이 보이는 1인입니다.ㅋ
저는 빵을 만들면서 소심한 저를 또 발견해 버렸습니다.
잡곡빵 반죽을 너무 쓸데없이 소중히 다뤄서 문제네요.
다음번엔 떡주무르듯 과감히 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
hector
가고 싶습니다. 화요일... 시간을 내 보지요...
-
네 쌤 빵울 구워보시고 "이것이 진정 내가 만든 것이란 말인가!"를 격하게 외치시게 될 것이옵니다.
*^ ^* "제빵은 과학"임을 일깨워주신 유미샘. ㅎㅎㅎ
제 인생에 빵을 굽게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함께 빵을 만들고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고
반죽을 만지는 손의 느낌도 너무너무 좋습니다.
갓 구운 빵을 나누어 먹는 순간이 제일 좋아요.
저에겐 신세계라는,,, ^ ^
열등생이지만 마음은 이미 파티쉐!
9월엔 결석 없이 부지런히 따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