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소식 :: 연구실소개, 연구실소식, 회원소식을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점차 일거리가 줄어들어 상가 전체의 분위기가 꺾인 것이 오늘날 세운상가의 현실이다. 경제적 가치가 약해졌다면 세운상가의 문화적 가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1994년은 세운상가와 관련해 나쁜 소문만 가득한 해였다. 지존파를 돕던 브로커 이주현은 세운상가 근처 선반가게에서 칼날이 든 등산용 지팡이 8개를 주문 제작하고, 근처 고가도로 노점을 통해 무전기와 가스총 등을 구입했다. 지존파는 이렇게 전달받은 무기를 가지고 극악한 범죄를 실행에 옮겼다. 또한 포르노가 유통되는 주요한 채널이 세운상가였는데, 고객 중 선원들이 많아 그들이 권총을 구입할 수 있는 루트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세운상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이주현은 이 경험을 가지고 부산에 내려가 총까지 구입하려 했다고 하니 만약 성공했다면 지존파는 결코 순순히 투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 이후 청계천에서의 무기 암거래는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같은 해 발생한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씨 살인사건의 범인 임모씨는 세운상가에서 구입한 군용 특수 건전지를 이용해 사제폭탄을 만들어 탁씨를 암살하는 방법을 연구했었다. 시민들은 작은 범죄조직이 불법적인 무기를 그렇게 쉽게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당시 세운상가는 작은 전자제품에서부터 현금인출기, 조명공사 부품, 컴퓨터 PCB, 의료용 기계 등 거의 모든 기계를 수리하거나 그 부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미처 국내에 들여오지 못한 외국의 신제품을 신속히 유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국내 유일무이한 제작 판매 공간이었다. 사건 이후로 위험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세운상가 일대의 손님이 잠시 끊겼다. 자체적으로 상가문화를 정화하려고 노력해 온 상인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20160517_60_99_20160511103822.jpg?type=w세운상가 최근 풍경 / 윤주혜 작가 제공

선풍기 처음 만든 한국 가전제품의 역사
배종호씨(범진정밀·64·2010)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선풍기를 처음 선보인 것은 신일산업이 아니라 세운상가의 제작자들이었다고 한다. 대량 제작할 형편은 안 되었지만, 철판으로 밑판을 깎고, 자동타이머와 작은 모터를 조립해 선풍기를 만들어 공급했다. KS규격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영세사업체에서 제작할 수 없었던 것뿐, 성능은 충분히 발휘되는 제품이었다. 그는 이러한 세운상가의 개발 노하우가 대기업으로 흡수되어 간 것이 한국 가전제품의 역사라고 증언한다. 한편 윤태응씨(서일콘넥터·81·2010)는 원자력발전소에 세운상가의 기술자들이 가서 전압기를 설치해 주며, 되레 한 수 가르쳐준 것을 기억한다. 원자력연구소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설계를 해가지고 왔지만 정작 실제로 설치할 미군부대 부품들의 특성은 알지 못했고, 그들의 설계대로 조립하면 제 성능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여기서 세운상가 기술자들의 힘이 빛을 발하게 된다. 그들은 경험으로 다져진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재설계를 했고, 전압기를 성공적으로 설치했다. (<도심 속 상공인 마을>, 서울역사박물관. 2010. 28쪽) 이 같은 숙련공과 기술자들의 활약이 “부품만 있으면 인공위성도 만든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무엇이든 구하고 만들 수 있다는 세운상가의 기술력은 항상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었다.

당초 주상복합아파트로 당시 첨단 건물
없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세운상가는 누가 기획한 것일까? 세운상가 건설 취지는 기술제작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운상가는 당초 주상복합아파트로 기획되었다. 서울 시내에 미래지향적이고 모범적인 상업주거 형태를 선보이기 위해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이 밀어붙이고,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했다. 서울 대개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1968년 건설 당시 조감사진을 보면 낙후한 주변부에 위용을 자랑하듯이 도드라지게 서 있는 건물을 볼 수 있다. 통상 세운상가로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세운, 청계, 삼풍, 신성 등 4개의 상가로 구분된다. 종묘입구에서 청계천 3가, 을지로 3가, 진흥로를 거쳐, 퇴계로 3가까지 뻗치는 폭 50m 1만3708평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연속적 보행몰 조성을 위한 보행데크, 1층의 주차와 3층의 보행공간을 분리하는 혁신적인 디자인, 5층 주거공간 내 아트리움 등 60년대 서울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첨단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실제 운용해보니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서울 시내 차가 2만대도 안 되던 시절, 1층을 고스란히 주차공간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시기상조였고, 때문에 1층에는 상가가 빼곡히 들어섰다. 덕분에 3층 보행몰에는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사람들 발길이 뜸했고, 보·차분리 디자인은 실패하고 만다. 건물 내 아트리움은 실은 온도조절을 위한 복잡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밀폐된 실내에 채광만 가능케 한 것으로 그리 안락함을 주지 못했다. 개장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화재사고가 나는가 하면, 건물 내 시설 미비에 대한 시비가 끝없이 일어났다. 게다가 상가 내 유흥소가 많아지자 거주자들은 단지 내 교육여건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운상가는 주거용으로는 시설과 환경 모두 부적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거주자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는 업무용 공간으로 변경됐다.

20160517_61_99_20160511103822.jpg?type=w(위)세운상가 광고(, 1999. 12. 8. 29면) (아래)‘도심 가로지른 괴물빌딩’(, 1980. 4. 7. 7면) 세운상가 1층은 짐차들이 불법주차를 상습적으로 하고 있어 주변 교통상황을 악화시켜 큰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종로, 을지로, 충무로 등 서울의 주요 장소를 직선으로 관통하고 있어 그 배치 때문에 흉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니, 고장이 나면 고쳐 쓰는 일이 많았기에 상인들은 유통과 수리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의 새 제품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빨리 뜯어봐야 했고, 이 경험이 수리업자들에게 기술적 노하우를 얻도록 만들었다. 새로 얻은 수리기술이 쌓여 비슷하게 모방할 수 있는 실력이 되면서 독자적인 제품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수리→기술습득→자가 생산의 루트는 그 역사성이 있었다. 세운상가가 있기 전 청계천에는 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수리해서 재판매하던 고물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여러 중고물건의 부품을 교차해서 성능이 발휘되는 제품을 하나 만드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케이스 갈이 시계였다. A사의 케이스와 B사와 C사의 무브먼트를 혼합해 세상에 없는 시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품이 귀했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리방법이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세운상가는 자연스럽게 유통업체와 수리·제작업체가 공존하는 문화로 발전해 나갔다. 물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수리업의 발달과 이에 따라 익히게 된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학습이 자산이 되어 세운상가의 기술자들을 만들어냈다. 애플2의 카피모델을 국내 최초로 만든 곳도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의 설계를 맡았던 윤승준은 세운상가 건설의 기획이 애초 낙후한 서울시에 영향을 줘서 상가 주변부가 같이 발전할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상가 주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재개발지구로 묶여버려 결국 세운상가가 ‘서울의 벽’처럼 흉측하게 남아버렸다고 판단한다.(<세운상가와 그 이웃들>, 서울역사박물관, 2010. 65쪽) 실패한 기획이라는 말이다. 건물의 외관만 보면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는 세운상가가 전후 한국의 독특한 테크놀로지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이 간과되어 있다.

20160517_62_99_20160511103822.jpg?type=w오래된 가게에 새로 그려진 벽화. 세운상가 건물에 젊은 아티스트들이 접속해 새로운 바람을 넣고 있다. / 윤주혜 작가 제공

각 공정단위 협업 가능한 독특한 시스템
주거용도의 성격이 사라지자 세운상가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공장이 되었다. 도심 속 가정식 공장이 가지는 한계, 즉 협소한 사업장과 제한적 기술이 각 공정단위들 간의 협업을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주문자의 요구가 들어오면 필요한 각 공정에 최적화된 협업단위를 그때그때 구성한다. 납품가격과 기술적 난이도 같은 어려움들은 이 구성체에서 공동으로 협의해 해결해 나간다. 이러한 관계가 자주 반복되면 소위 길드 같은 소규모 공동체가 구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동기 밸브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물→단조→압연→압출→선반가공→밀링가공→용접→조립→누수실험→도장 등의 복잡한 단계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공간적 제약과 기술적 제약 때문에 한 가게에서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적당한 파트너와 협력관계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 안에서 각 공정별 결과물이 신속히 배달·운송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이익이었다. 거리가 멀수록 물건의 배송 및 파손 등에 대한 위험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작업속도를 높이고 제품불량률을 낮추는 효과를 낳는다. 그래서 무거운 짐 배달에 용이하게 개량된 삼발 오토바이는 세운상가의 상징이다. 물론 도시 외곽의 공장으로 가면 이 모든 공정을 한번에 할 수 있지만, 다양한 주문에 유연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현재 전자분야는 용산이나 강변 등에, 기계금속분야는 구로나 시흥 등에 그 기능을 많이 뺏겼지만, 논스톱으로 모든 공정을 시동할 수 있는 곳으로서 세운상가의 쓸모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를 두고 김용창은 도심부형 소기업 클러스터(네트워크 경제)의 원조라고 평가했다.(<서울시 토지이용에서 위치이용의 지역적 특성과 도심부 소규모 사업장의 존재양식>, 서울대 지리학 박사학위 논문, 1997) 금속가공공장에서 일했던 한 기술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작은 거고, 협력하지 않으면 할 수 없지. 왜 바닷가에 모래알 같은 거 있잖아. 멀리서 보면 하나 같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고. 청계천도 마찬가지야, 청계천도 청계천이라고 하는 큰 곳으로 보일 뿐이지 자세히 보면 개개인이 다 달라요. 협력하지 않으면 안 돼.”(<세운상가와 그 이웃들>, 서울역사박물관, 2010. 115쪽)

점차 일거리가 줄어들어 상가 전체의 분위기가 꺾인 것이 오늘날 세운상가의 현실이다. 경제적 가치가 약해졌다면 세운상가의 문화적 가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2015년 서울시가 세운상가에 대한 도시재생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고민할 기회와 여유가 생겼다.

한국 첫 우주인 후보였던 고산씨는 이러한 세운상가의 가능성을 높게 쳐 사무실을 세운상가 내에 개설했다. 그는 작은 부품 하나도 찾기 쉽고, 숙련자에게 관련 충고도 곧바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은 세운상가가 유일하며, 이 장점을 살려 공생한다면 자신과 같은 벤처기업인도 세운상가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젊은이들로 구성된 문화기획팀 ‘세운공공’은 세운상가의 오래된 음향기기를 이용해 같이 즐기는 음감회(<세운소리 듣기 展 21.9KHz.>)와 세운상가 내 장인을 찾아 추억의 기계들을 수리하는 이벤트(<수리수리얍>)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상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만약 도시가 인간의 몸이라면, 세운상가는 잘못 절개된 외과수술 자국이다. 이 흉터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미 새 살과 엉켜 몸의 일부가 된 자국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세운상가의 역설계 기술자와 숙련공들의 네트워크 및 경험지(經驗知)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시민 스스로 디자인하고 무언가 만들어내는 학습장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획득하는 시민기술은 시민과학으로 나가는 첫 단추가 된다.DIY Maker 문화나 3D 프린터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손재주 문화는 세운상가 기술자들의 자산을 전통으로 이어받아 마땅하다.

<오영진 문학평론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① [수유너머104] 공동체소개 oracle 2020.03.22 4499
공지 ② [수유너머104] 활동소개  oracle 2020.03.22 2475
공지 ③ [수유너머104] 운영팀 oracle 2020.03.20 2695
공지 ④ [수유너머104] 회원제도 [4] oracle 2020.03.20 2103
공지 ⑤ [수유너머104] 약도 oracle 2020.03.18 5361
공지 ⑥ [수유너머104] 내부공간 oracle 2020.03.18 1440
공지 ⑦ [수유너머104] 슬기로운 공동생활 sora 2018.06.17 3242
공지 ⑧ [수유너머104]를 다시 시작하며 admin 2017.03.15 12055
268 [출판_박준영] 신유물론 - 인터뷰와 지도제작 file oracle 2021.09.30 586
267 [한겨레 2021-0927] 좌파정론지 ‘뉴래디컬리뷰’ 새출발 file oracle 2021.09.27 240
266 [메일 2021-0927월] 기계주의, 랭보, 천개의 유물론2 :: 강사인터뷰 file oracle 2021.09.27 64
265 [메일 2021-0830월] 예술과 철학, 아나키즘 / 기계주의, 랭보, 유물론 / 원석환개인전, 공개특강 file oracle 2021.08.30 97
264 [메일 2021-0809월] 공개특강 / 노마디즘, 예술과 철학, 아나키즘 file oracle 2021.08.09 141
263 [메일 2021-0623수] 시민강좌_고병권 / 강사인터뷰_유물론, 스피노자, 시워크숍, 들뢰즈, 차라투스트라 file oracle 2021.06.23 170
262 [메일 2021-0603목] 공개특강_예술의 주름 / 여름강좌_유물론, 스피노자, 시워크숍, 들뢰즈, 차라투스트라 file oracle 2021.06.03 359
261 [메일 2021-0504화] 공개특강_인공지능 / 기획_수학의 몽상 oracle 2021.05.04 152
260 [메일 2021-0407수] 전시_금은돌 추모전 / 공개특강_자기배려의 생물학 file oracle 2021.04.07 200
259 [개봉_이수정] 시 읽는 시간 2021.3.25(목) [1] file oracle 2021.03.22 300
258 [메일 2021-0302화] 강사인터뷰: 삶과 예술/ 타자성/ 시워크숍/ 차라투스트라 file oracle 2021.03.02 156
257 [출판_오영진] 2020기계비평: 서울이라는 메가머신 file oracle 2021.02.19 454
256 [메일 2021-0209화] 공개특강/ 삶과 예술/ 타자성/ 시쓰기/ 차라투스트라 file oracle 2021.02.09 948
255 [개미뉴스] (詩) 리멤버 희망버스 - 김용아 [1] file oracle 2021.02.03 140
254 [출판_박준영] K-OS file oracle 2021.01.21 300
253 [메일 2020-1229화] 1월프로그램 :: 니체 / 헤겔 / 들뢰즈 / 의미의 논리 file oracle 2020.12.29 165
252 [메일 2020-1215화] 겨울강좌 :: 화엄철학 / 헤겔철학 / 들뢰즈철학 / 의미의 논리 file oracle 2020.12.15 139
251 [2020 손현숙콘서트] 11.25(수) 벨로주홍대 콘서트 [4] file oracle 2020.11.19 295
250 [동네책방] 달걀책방 북클럽 ‘읽는 게 뭐라고' 오픈 [1] file oracle 2020.11.11 348
249 [출판_리영희] 진실에 복무하다 file oracle 2020.11.09 195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