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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소견서

 

박 상 욱

 

 

1. 미뤄왔던 소견서를 마주하며

오래전 여호와의 증인 청년의 병역거부 기사를 읽으면서 화가 났다. 종교적 이유로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단 말인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든 군대를 회피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악플을 좀, 아니 꽤 달았다. “권리만 챙기고 의무는 지키지 않는 얌체”라던가 “너 북한으로 떠나!”같은 거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좋아하고 애국심이 충만한 시기였다. 그랬던 중학생이 약 십년 뒤에 병역거부를 했다. 내 병역거부 기사를 보니, 또 다른 ‘애국자’들의 댓글이 잔뜩 달려 있었다.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과거의 나와 병역거부를 선택한 지금의 나 사이의 간극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든 것일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분석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여러 차례 소견서를 쓰려 했지만, 기만과 위선에 부딪혀 매번 펜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나도 나를 모르겠다고 막연히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 왜 병역거부를 했냐고 물어오면, 어느 날은 하나의 자명한 이유로 논리정연하게 답했지만, 또 어느 날은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기도 힘들었다. 내가 계속 변해왔던 이유도 있지만, 대통령의 탄핵과 정치지형도의 갑작스러운 변화, 그리고 만나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상황과 인식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느끼기도 했으며,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오기 힘든 적도 있었다. 그 사이 판결 재판과 수감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펜을 잡았다. 그동안 혼란스럽기 때문에 미뤄왔지만, 실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을 절실히 돌아보게 해주는 것 같다. 이제 이 자리를 빌려, 내친걸음을 마저 내딛으려 한다.

 

2. 강제된 폭력의 물음

걸음을 내디뎠을 때, 처음 닿은 곳은 가족이다. 사회의 가장 내밀한 억압과 질서의 재생산은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었고, 고아인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말부터 전두환 정권이 끝나기까지 14년 동안 특전사 복무를 하셨다. 두 분 모두 군 복무 이력을 평생 자랑거리로 여겨오셨다. 나도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군인이 되는 거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잊지 못할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광주 5.18에 투입된 계엄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주는 북한 간첩들이 선동한 폭동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역사관은 내가 학교에서 배워온 것과 너무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취기에 말을 꺼낸 아버지의 마음도 고통스러웠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버지한테 다시는 그와 관련된 얘기를 먼저 들을 수 없었다.

그날 들은 아버지의 과거는 일상의 아버지를 달리 보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한 어머니 대신 가사노동을 상당부분 해오셨고, 가족에게 손찌검이나 술주정을 하신 적도 없다. 말다툼 끝에 화를 내면,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늘 먼저 사과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치관을 가진 사람한테 강한 배타성을 갖고 계셨다. TV를 볼 때면 전라도에 대한 지역차별 발언과 ‘빨갱이’가 반사적으로 나왔다. 나도 종교와 정치 문제로 아버지와 많은 충돌이 있었다. 물리적 폭력은 없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 느껴질 정도로 분노를 쏟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 말과 행동을 억압하기에 충분했다. 또 오랫동안 익숙해졌기에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쩌면 일상에서 드러나는 ‘다름’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성이, 군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이 의문은 또한 내 학교생활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나는 말을 자주 더듬었고 타인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많은 괴롭힘을 당해왔다.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도, 자기보다 더 힘 센 친구한테 괴롭힘을 당했고, 집에서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다. 더욱 참담한 건, 나도 약한 누군가를 괴롭혔다는 사실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어떻게 해야 만만하게 보이지 않고, 튀지 않으면서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 체득하게 되었다. 그때는 방관자로서 폭력에 가담했다. 내가 괴롭힘 당하는 친구의 위치가 아닌 것에 안도하며, 불의를 모른 척해왔다. 때로는 당할 만하니까 당한다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외면한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반삭에 가까운 두발 규정을 요구하며, 저녁 10시까지 강제 야자를 시켰고, 따귀와 매질도 예사로 행했다. 학교라는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군대와 닮아 있었다. 나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달래기 위해 책 속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책 읽기는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려는 나를 움켜잡아, 다시 고통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폭격수였으나 과오를 깨닫고 반전 지식인이 된 하워드 진과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적으로 추진했으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던 오펜하이머를 읽으면서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내 아버지도 언젠가 이들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폭력은 십대 시절부터 삶의 큰 물음이었다. 아니다. 사실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폭력을 경험한 학교와 아버지의 삶이 물음을 강제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3. 거부의 마음, 기피의 마음

대학에 입학하고 보낸 첫 여름방학. 마음이 맞는 학생들과 함께 국가폭력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이 벌어진 노근리 다리, 파주 평화공원, 제주 4.3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현장이 답사지였다. 나름 국가폭력에 대해 각성된 의식을 갖겠다는, 실존적 물음에서 출발한 여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의’와 ‘실존’을 좇아 시작한 초심과 다르게, 폭력의 현장보다는 옆에 있는 여자 친구에게 더 마음이 갔고, 어느 순간에는 뒷풀이를 하려고 놀러왔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 시기 제주도에서 한중 FTA 회담 반대 시위가 열려 참여했다. 하지만 시위가 격해져 물대포와 전경의 진압이 이루어졌고, 어느새 우리는 포위되었다. 몇몇 남학생들이 포위를 뚫으려다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농민들과 전경의 충돌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겁이 많아 경직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학생들이 앞으로 나가며 저항의 함성을 외칠 땐, 뒷걸음질 치며 마음속으로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쳤다. 이후에도 시위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매번 혼자 겉돌고 있다는 소외감이 찾아왔다. 구호와 박자를 맞춰보려 해도 늘 엇박자였고, 머리로 이해해도 가슴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국가폭력을 당위로 내세우는 나와 겁쟁이로서의 나는 계속 충돌했다.

폭력으로부터 실존을 모색하고, 문학으로 승화시키겠다는 미망으로 생을 허비하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씩 군대에서 돌아왔다. 나는 휴가를 많이 주는 해군이나 공군 입대를 고민하는 한편, 인문학 공동체에서 이런저런 세미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차 프랑스에서 병역거부를 인정받아 난민으로 받아들여진 이예다 씨의 기사를 읽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놀라웠고,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생각해온 징병제가 그 자체로 심각한 인권침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병역거부와 관련된 기사와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병역거부를 하게 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감옥 또한 군대 못지않게 억압적인 공간이고, 사회적 낙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특전사에서 14년 동안 근무한 아버지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병역거부는 선택지 밖의 선택과도 같았다. 하지만 앎을 체득할수록, ‘어차피 취직도 안 되는데, 예비군도 면제되고 가석방도 주잖아!’ 불온한 충동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무상무념의 상태로 돌아가려 애썼다. 공군 갈까, 해군 갈까라는 고민이 군대 갈까, 감옥 갈까로 변해버린 것이다.

병역거부로 한참 고민하던 이때, 반전 평화 단체인 ‘전쟁없는세상’에서 예비 병역거부자 모임이 열렸다. 병역거부는 특별한 사람들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비밀 결사’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갔다. 그런데 학교 동아리방 같은 곳에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회적 편견과 달리,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은 다양한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었으며, 예비 병역거부자들도 투사보다는 나처럼 불확실한 고민에 빠진 청년들이었다. 이 계기로 수개월에 걸쳐 예비 병역거부자 모임을 참석했고, 병역거부자의날 자전거 행진이나 반전 평화 시위도 함께 했다. 이번엔 거창한 마음으로 운동을 결심해서가 아닌,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나간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병역거부에 대한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5.18과 사회의 군사화, 반전 평화도 여러 이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휘두르게 될 내 모습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에 의해 자유를 침해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병역거부를 한 내 마음은 ‘대의’나 ‘투사’의 마음보다는, 유승준, MC몽, 이회창 아들처럼 국민의 적으로 전락한 ‘기피자들’의 마음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들의 위치였어도, 똑같은 방식으로 군대를 피했을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병역거부가 유승준, MC몽 같은 기피하고 다르다고 할 때마다 불편함이 느껴졌다. 나를 변호하기 위해 해준 말이지만, 강제된 복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거부와 기피를 나누는 게 아닌, 모두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전제와 틀에 물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4. 병역거부가 안겨준 선물

2016년 12월 26일 군부대에 입영하지 않고 병무청에 병역거부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한테는 오래전부터, 성경과 예수의 삶을 들어 설득시켰지만, 아버지는 아직 모르고 계셨다. 예상대로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시고 한동안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병역거부를 가지고 소통할 언어가 없었다. 이렇게 전달되리라 생각해서 말하면, 뒤틀려서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절실한 말도 내게는 터무니없는 맥락으로 다가왔다. 이미 예견한 일이고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지금껏 아버지를 의식하며 자신을 검열해왔다. 그러나 이제 고정된 ‘자식의 관점’을 벗어나, 삶의 주체가 되어 병역거부를 했다. 아버지가 보수적이라거나, 특전사에서 14년 동안 근무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아버지의 분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는 마음을 돌리셨다. 병역거부를 이해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헤아리기 힘들지만, 아들을 자신과 다른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이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삼켜왔던 광주를 꺼냈다. 아버지는 계엄군이 아니었다고 대답하셨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의 대답 외에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내 망상이 오랜 시간 기억을 조작해온 것은 아닌지 의심도 갔다. 하지만 이제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5.18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설령 계엄군이었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가 병역문제를 내게 맡겼듯, 아버지가 대면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나는 왜 병역거부를 고민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5.18 군인이었다고 여러 번 답해왔다. 그렇게 하면 묻는 사람은 숙연해져 입을 다물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예외적인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도 이런 대답과 시선을 의도했던 것 같다. 피곤하게 상대방과 논쟁을 벌이거나 복잡하게 사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가 5.18군인이라는 서사로 평범한 ‘나’를 대단한 고민을 품은 것처럼 포장할 수 있었다. 자아의 불명함을 아버지에게 떠맡겨 버렸던 것이다. 그 대답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5.18만 있었을 뿐, ‘나’는 없었다.

이제 아버지를 벗어나려 한다. ‘예외적인 트라우마’로 나를 포장하여, 대단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상처받은 영혼으로 여겨지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 왜 군대에 가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총을 들 수 없는 겁쟁이로서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 어긋남을 대할 때마다 지치고 힘들지만, 눈을 감지 않고 나의 언어로 다가가려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 생각하기에, 앞으로 평생에 걸쳐 마주해야 하는 것이기에 피하지 않으려 한다. 감옥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일 게다. 하지만 병역거부는 나 자신의 ‘소수성’에서부터 출발해 처음으로 고민하고 내린 선택이다. 또한 당연하다고만 여겨왔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물음을 안겨줬다. 그 물음은 병역거부를 처음 고민한 시점부터, 재판과 수감을 앞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변해왔다. 감옥 안에서도, 출소 후에도 내가 그 물음에 답하고, 다시 물음을 던지는 한, 나는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병역거부가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기에, 나는 병역거부자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2017. 6. 28. 판결재판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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