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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소식] [경향 article] 10월호 이진경회원 칼럼

수유너머N 2012.10.08 17:06 조회 수 : 3563

운동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다

 

 

 

번개처럼 느닷없이 다가오는 사건이 있다. 가령 내게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랬다면, 작년 안철수의 등장이 그랬던 것 같다. 이와 달리 슬그머니 다가오는 사건도 있다. 이미 다가왔지만 한참 지나서야 그것이 이미 옆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사건이. 비정규직의 시대가 그렇게 다가왔다. OECD 나라 중 2위가 10만명당 21명 정도일 때, 33.6명으로 1위를 차지한 자살의 왕국이 그렇게 다가왔다.

 

올해 초인가, 사회운동에 또 하나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다는 느낌이 내게 다가온 것도 뒤늦은 깨달음처럼 그렇게 슬그머니였다. 작년과 올해, 잘 알려진 몇 개의 사건이 하나로 계열화되면서 불현듯 떠올랐다. 두리반의 투쟁, 김진숙과 희망의 버스,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투쟁. 그리고 거기에 영화 <두개의 문>으로 되살아난 용산이, 22명의 연이은 자살을 새로운 행진으로 바꾸고자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분향소가 덧붙여졌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온 것일까? 알다시피 두리반의 투쟁은 대책 없는 철거에 대항하는 고독한 농성으로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농성을 시작했던 분들의 손을 벗어나,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 활동가들의 기이한 ‘공동체’로 넘어갔다. 인디밴드를 비롯해 사실상 백수와 구별되지 않는 미술가, 영화인 등 수많은 이질적인 ‘분자’들이 모여들며 농성의 공간을 공연과 전시의 장으로, 매혹적인 문화공간으로 바꾸어놓았고, 급기야 외국인들마저 빼놓지 않고 방문해야 할 명소로 만들었다. 성공적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반철거투쟁이었음에도 두리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2011년을 잊을 수 없게 했던 김진숙과 희망버스는, 새로 온 것만이 아니라 가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보여주는 것 같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김진숙과 한진중공업의 농성은 민주노총 금속노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지만, 그것이 대중들의 시야에 밀고 들어온 것은 김여진을 비롯한 외부세력과 결합되면서였고,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트위터라는 새로운 매체였다. 온라인의 대중적 관심을 오프라인의 대중적 흐름으로 바꾸었던 것은 잘 알다시피 ‘희망의 버스’였다. 희망의 버스는 기획 초기에 민주노총의 참여와 지원 속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진행에서 실질적인 이니셔티브를 갖고 진행했던 것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여든 다양한 종류의 활동가들이었다. 참여자 개개인의 면모를 보아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기존의 운동단체에 소속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희망의 버스에 탔던 것조차 ‘조직적 동원’이 아니라 각자의 자발적 참가에 의해서였다. 민주노총이 기획 초기부터 참가하고 있었음에도 운동의 이니셔티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조직된 노동자 외부의 대중과 함께 해야 했고 빠르고 유연하게 진행되어야 했던 기획 자체의 성격과 공식적 결정의 최소라인을 타야 했던 거대조직의 경직성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정의 해군기지 저지투쟁을 주도한 것도 자발적으로 모여든 활동가들이었다. 강정마을에 아예 거주지를 마련하여 ‘강정주민’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 영화 등 예술적 영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종교적 배경을 갖고 모여들 사람들 등 아주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투쟁의 전열에 참가했고, 여기에 전국 각지에서 보내진 물자와 성금이 더해졌다. ‘희망의 버스’에서 이어진 ‘평화의 비행기’에는 자기 돈 들여 ‘출장시위’를 가는 대중들이 다시 올라탔다. 어떤 대규모 조직이나 체계적인 조직이 없이 자발적인 활동가들이 모여 그때마다 필요한 활동을 기획하고 거기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식으로 강정의 투쟁은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두물머리 농민들의 투쟁, 4대강사업에 대한 반대투쟁 등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며 진행된 2011년의 투쟁들이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2012년 들어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 <두 개의 문>이 영화의 성공을 넘어서 ‘용산’을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획자’들의 호소에 자발적인 대중들의 대대적 호응 때문이었다.

 

어느 경우도 거대조직이 주도하지 않았고, 조직된 대중동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대조직을 대신하는 자발적 활동가들의 이니셔티브, 조직적 통일성을 대신하는 이질적인 활동가들의 창발적 연대, SNS를 필두로 한 온라인 네트워크, 그리고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호응. 이것이 2011년과 2012년을 끌고간 사회운동의 주된 힘이었다. 이에 비해 민주노총은 2012년 적극적으로 총파업을 조직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대중의 호응을 유발하는데도,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는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했는지 안했는지조차 알기 힘든 채 숱한 ‘사건’ 속에 묻혀버렸다.

 

쌍용자동차의 투쟁은 이러한 전환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쌍용자동차의 파업은 민주노총의 적극적 지원 아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장점거와 격렬한 대결의 향상으로 매우 결연하고 강력하게 투쟁했지만, 패배를 넘어서는 어떤 긍정적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그런데 이후 10여명의 자살자를 비롯해 22명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노동운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회적 관심이 일어났고,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가 확산되면서 쌍용은 2011~2012년 중심적인 사안으로 되살아났다. 이후 진행된 양상은 노동운동 조직의 이니셔티브가 아니라 앞에 말한 다른 운동처럼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이나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쌍용이 강정, 용산과 이어지면서 ‘스카이 액트’(SKY ACT)라는 연대투쟁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노총 같은 거대노동운동 조직이나 ‘노동자연대’를 대신하는, 강정, 용산을 잇는 예술가, 의사, 지식인이나 문화활동가 등의 자발적 대중운동과 ‘사회적 연대’의 벨트, 바로 그것이 ’스카이액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투쟁을 하나로 잇는 10월의 ’생명평화대행진‘은 이러한 양상의 운동이 나아갈 미래의 일각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하나’임을 강조하는 통일적인 연대에서 여럿이 함께 하는 이질적인 연대로, 강력한 대오를 짜는 대규모의 조직의 몰적인(molar) 운동에서 유연한 요소들이 서로를 촉발하며 이어지는 분자적인(molecular) 운동으로, 이해관계에 따른 조직적 결속에서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동체적 연합으로, 조직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규모 군중의 조직적 동원에서 SNS 등의 통신망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특이적 대중의 자발적 결합으로... 여기에 더해 앞서 언급한 2011~12년의 몇몇 사건들은 은 운동의 이니셔티브가 민주노총 등 대규모 조직에서 자발적 활동가들의 유연한 결합체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나는 여기서 이전과 다른 운동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누구도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을 터이다.  다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이 새로운 시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일 게다.

 
<경향아티클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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