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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테크노 컬처 연대기](4) 1970년대 수출품 1위 이끈 여방직공의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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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적기는 농촌의 여성들을 도시로 불러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기술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면서 가부장적 구조에 착취된 여공들의 몸이 있었다.

김홍도의 그림 ‘길쌈’을 보면 칭얼거리는 아이와 이를 지켜보는 시어머니를 곁에 두고 천을 짜는 여인이 매우 피곤해 보인다. 반복적인 작업과 긴 시간이 요구되는 길쌈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노동이다. 자동화된 방적기 실을 뽑아내는 일과 방직기 천을 짜는 일이 발명된 뒤 성인 여성들은 더 이상 집에서 지난한 방직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어린 여성이 공장에 가서 그 일을 맡았다. 가정에서 공장으로 무대만 바뀌었을 뿐 여성은 방직노동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무명 여인의 ‘방적가’에 표현된 자부심
방직공장에서는 투박한 청년 남공보다는 손기술이 좋고 행동이 경쾌한 유년 부녀공(幼年婦女工)을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여공의 신장은 기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158㎝가 넘어야 했다. 방직공장에서 여공들은 30도가 넘는 열과 소음, 꼬박 선 자세, 먼지와 피부병을 견뎌야 했다. 쉴 틈 없이 실을 생산하는 기계의 리듬에 인간의 호흡을 맞추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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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숙련된 여성 틀잡이의 경우 보통 1인당 10대의 방적기를 맡았다. 그 경우 노동자 한 명이 책임지는 실가닥 수가 4500여 가닥 정도였다. 북한의 ‘로력영웅(勞力英雄)’ 노동자 중에는 방적기 80여대, 그러니까 3만6000여 가닥의 실을 혼자 통제했던 전설적인 여공이 있었다고 한다. 노동자는 생산력을 수량화된 방식으로 뽐내고 평가받았다. 1958년 남한에서 채집된 한 무명 여인의 방적가 가사에는 방직일에 대한 여공의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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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직기 앞에 선 여공의 모습(1977년 5월 18일).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집일을 본다해도 방젹紡績업시 될슈업고
나라일을 본다해도 방젹紡績업시 될가부냐.
예전일을 들어보고 지금일을 살펴보자.
황제후皇帝后가 현담짜고
졔후비諸侯妃가 대대大帶자고
경의댁宅이 조복朝服짓고
대부쳐大夫妻도 방젹紡績하네.
부산항釜山港에 졔일공장第一工場
방젹회사紡績會社 안일넌가.
영등포永登浦에 방젹공장紡績工場
여자외女子外예 누가하리.
출처: <무명 여인의 ‘방적가’에 대하여>
(강전섭, <한국학보> 62, 일지사, 1991)에서 발췌.

집안일도 나라일도 방적 없이 될 수 없고, 황제후조차도 현담을 짜고, 경의댁도 조복을 짓는다. 지위고하 없이 방적은 누구나 하고 있다는 노래다. 일제강점기에 방직공장이 세워진 부산과 영등포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당시 방적일이 여성노동자의 전유물이었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이 노래는 방적일을 남자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푸념하며, 여장군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자는 주장을 하며 끝이 난다. 방적기는 여성에게 노동의 수고를 덜어주지 못했다. 도리어 방적노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 새로운 임무로 안겨주었다.

산업혁명의 출발이 면직공업에서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면직물의 폭발적인 수요 때문이었다. 18세기 이전에 전통적인 면직물 가공업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수공업 형태로 광범위하게 발달했다. 반면 모직공업은 제작방법에 기술적 어려움이 있는 분야였고, 전통적인 길드 정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면직공업은 모직공업처럼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고, 증가하는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혁신에도 훨씬 과감했다. 게다가 면직물은 대량생산에 걸맞게 직조방법이 애초 단순했다. 수요과 기술혁신 수용조건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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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다룬 루이스 하인의 작품 <어린 방직공>(1908). / www.pigtailsinpaint.com 제공


한국의 경우도 1920년대 이전까지 농가 자급자족을 위한 가내수공업이 일제의 자본에 의해 공장별 공업 형태로 변형되었다. 면직공업은 저자본과 저기술만으로 개발이 용이했다. 여기에 낮은 임금의 노동력과 잠재적 시장을 기초로 면직공업은 가장 일찍 한국의 근대적 산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1733년 케이(J. Kay)의 플라이셔틀, 1764년에 하그리브스(J. Hargreaves)의 제니방적기가 발명되면서 면직공업의 기술적 혁신은 가속화됐다. 제니방적기는 다추 방적기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방차 1대로 7개의 방추를 회전시켜서 한번에 여러 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었다. 물레 시절에 비하면 120배가 넘는 생산력이었다. 하지만 제니방적기로 뽑은 실은 강도가 약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였다. 여기에 와트의 증기기관이 가세해 어떤 지형에서든 기계를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대규모의 공장공업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농촌 가내수공업의 종말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고, 공장으로 모여든 농촌 자녀들은 임금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19세기 영국판 ‘송곳’ 러다이트의 노래
하지만 방직산업에 기술혁신이 이뤄질 때마다 임금은 삭감되고, 아예 일자리가 없어지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의 노래는 그 울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세기 영국판 ‘송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노래는 오늘날의 산업환경에서도 다시 불러질 만하다.

죄인들은 두려워하겠지만 그의 복수는
정직한 자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오직 폭이 넓은 편직기와
예전 가격을 하락시키는 것들에만 한정되어 있다.
직종 회원들의 만장일치 투표로
이 해로운 기계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모든 반대자들에 맞설 수 있는 러드(Ludd)는
위대한 사형집행인이 되었도다.
교만한 자들이 더 이상 겸손한 자들을 억압하지 않게 하라
그러면 러드는 정복의 칼을 거둘 것이니,
그의 불만은 곧 해소될 것이고
그리고 평화는 즉시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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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는 1924년 일본 국내 최초의 자동방직기를 발명한다. 이 같은 방직기계기술이 훗날 도요타 자동차기술의 전신이 되었다. / www.toyota-global.com 제공


한국은 해방 이후 섬유산업을 국가 기반산업으로 간주해 이에 대한 지원과 통제를 꾀했다. 이 같은 정책 때문에 1947년 후반 대전에서는 방적기 배치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방적기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대전에 있던 방직공장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방적추를 늘리도록 정부에서 허가를 받아 확장이 이뤄졌는데, 이 시설이 화재로 방적기가 유실된 대구로 옮겨가게 되었다. 막후에 정치적인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시민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이때만 해도 방적기가 옮겨가는 것만으로 지역경제에 극심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외국에서 원조 받은 학생 실습용 방적기를 실제 생산용으로 써서 적발되거나, 방적기 부품을 빼돌리는 범죄도 발생했다. 우리 손으로 이 기계를 직접 만들 기술이 없어 전량 수입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일어난 일들이다. 북한의 기술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71년에는 미쓰비시와 방적기 도입 협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방직공장이 세워지고 면직물을 생산해 왔지만 기계 제작기술은 왜 보유할 수 없었던 걸까.

조선인 자본 기업이었던 ‘경성방직’의 경우 기술자 훈련에 꽤 많은 노력을 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기계를 운용하는 기술과 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조선인에게 공학교육을 시킬 계획도 이유도 없었다. 경성제국대학조차 1938년까지 공학부가 없었다. 그나마 경성방직의 최고 기술자였던 이강현이 도쿄공업대학을 나왔고, 후에 공장장이 되는 윤주복이 규슈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실제로 공장을 운영하는 기계적 문제는 일본 회사와 운용관리 협약을 맺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식민지기 동안에 기계를 직접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927년 8월 재미유학생 최순주는 동아일보 투고를 통해 조선의 방직업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현재 조선의 직포방법은 완전히 수공에 불과하다. 저초종자가 약하고, 표백가공 방법이 일정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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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양행은 이탈리아 마조리사와 기술협작을 통해 1976년 국내 최초 자체생산 면방적기를 제작, 판매했다. 1976년 6월 21일 <매일경제> 2면 하단의 광고.


1976년 국산 면방적기 본격 생산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이미 도요타가 국내 최초의 자동방적기(1924)를 만들었다. 이후 몇 년 만에 영국의 기술력과 비교될 만큼 빠른 발전을 거듭했다. 일본의 약진에 큰 감화를 받은 이광수는 상업과 방직산업의 발달이 ‘대군의 척후’, 즉 우리 민족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알리는 예고라고 생각했다. 방직업의 발달이 영국의 산업혁명을 견인했듯이 우리도 그런 역사를 갖지 않을까 전망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방직업은 내수를 위한 저질 제품만을 생산했고, 고급품 생산을 위해 재배한 원화 등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조선에 남아 있는 것은 하급기술이었다.

1960년대 많은 사람들이 방직산업을 사양산업으로 생각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방적추와 방적기 증가를 위한 계획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정부는 면직공업의 육성을 국민의 최저 의류 수요층을 위한 용도로 두었을 뿐, 수출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용으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1966년 말 세계 면방적 시설은 1억3042만3000추, 이 가운데 미국이 2000만추, 인도는 1630만추, 일본이 1258만추였다. 반면 한국은 78만추였다. 방직기의 규모도 크지 않아서 전 세계 271만대 중 한국은 불과 2만1700대에 불과했다.

일본은 1968년부터 과잉생산된 방적기를 폐기하기 시작했다. 보다 고급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혁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 한국 역시 방적기를 폐기해야 했다. 이유는 너무 낡아서였다. 낡은 기술의 저질 제품으로 내수를 충당하다 포화된 상황을 방직산업의 쇠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계도 사람도 같이 늙어버렸다. 1967년 경성방직 최고의 기술자 이강현이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하지만 기업 차원에서 노후한 기계를 교체하고, 국산 리넨을 다방면으로 수출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다. 드디어 1976년 현대양행이 이탈리아 회사 마조리와 기술협작을 맺어 국산 면방적기를 본격적으로 제작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방직물은 줄곧 1970~80년대 수출품 1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60년대 방직공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직업이었다. 다른 직종에 비해 그나마 방직만이 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식모살이를 견디다 방직공으로 들어온 이도 많았다. 견습 6개월이 지나면 월급 1만원짜리 일반직원이 된다. 낮은 임금이었다.
 

부산에 살던 박호선은 16세에 방직공을 시작하여 35세가 되어 그만둔다. 남동생이 결혼하자 가족 뒷바라지에서 해방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기 <누야 와 시집 안가노>를 1969년 50만원에 영화사에 팔았다. 여공 4년치 월급이었다. 옛말에 베틀을 모르면 시집을 못 간다고 하지만 박호선은 베틀을 알아 시집을 못 갔다.

방적기는 농촌의 여성들을 도시로 불러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기술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면서 가부장적 구조에 착취된 여공들의 몸이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오늘날의 한국을 견인해 온 것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160118172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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