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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테크노 컬처 연대기](9) 산업전사 ‘기능공’들의 자주적 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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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공고 출신이나 기능올림픽 출신들이 훌륭한 기능공으로서 활약을 했다면 이들이 기능훈련을 함에 있어 단순히 손끝기술이 아닌 스스로 해결하는 문제대처능력을 연마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973년의 일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고등학교 진학이 여의치 않았던 김진묵은 국가가 전액 장학금을 제공하는 금오공고에 입학원서를 냈다. 담임선생은 이 학교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설립했으며, 군대도 면제가 된다고 말해주었다. 이곳에서 정확히 무엇을 교육받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3년간 전교생이 기숙생활을 하며, 공업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다는 정도만 알았다.
 
 
 
 
 

입학하는 날,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 소총부터 받았다. 열여섯 소년은 난생 처음 총을 만져보았다. 배정받은 생활관에 가보니 군대식 내무반이었다. 6시에 기상하여 운동장 점호를 받고, 오후 9시면 점호 후 취침했다. 수업 간 이동할 때도 오열을 맞추고 다녔다. 금오공고는 6만3000평 부지에 지어져 전자현미경, 금속 제련을 위한 전자로같이 당시로서는 첨단설비를 교내에 들였다. 이 값비싼 설비를 지킨다고 아이들은 군인처럼 보초를 섰다. 이곳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군대에 더 가까웠다. 금오공고생들은 왜 이런 교육을 받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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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에 중점을 두고, 이를 위해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중화학공업 진흥계획은 겉으론 산업구조개편이지만 한편으론 방위산업의 해외의존을 줄이고, 자주국방력을 획득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매일경제>, 1973.1.12. 1면)


산업계와 군대가 주문한 동양 최대 공고
1960~70년대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서 자본과 원자재 및 기술을 들여와 대기업 주도하에 국내의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으로 가공하여 수출하는 경제구조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숙련된 노동자였다. 자동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제품의 완성도는 마지막에 볼트 하나를 조이거나, 기계로 가공을 하는 노동자의 역할에서 좌지우지되었다. 그 동안의 산업구조가 저숙련 노동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경공업 위주였고, 노동자의 숙련도를 마땅히 연마할 교육시스템도 노동시장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정작 현장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찾기 힘들었다.

한국은 기술이나 기계는 원조나 차관으로 도입할 수 있지만, 이를 제대로 운용할 인력이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재계를 비롯해 관료들은 중공업 위주의 산업개편을 위해서는 대대적인 기능공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1965년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은 청소년들에게 기능 습득 의욕을 불어넣고, 국가 근대화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기능올림픽 참가를 모색했다. 한국은 1967년부터 기능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당초 금오공고는 엘리트 기능공 배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학교였다. 1973년부터 시작될 중화학공업화 추진계획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1년에 약 5만명가량의 기능공이 배출되어야 했다. 곳곳에 공고와 직업훈련소를 개원했지만 모범이 될 만한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여기에 동양 최대의 공고를 만들겠다는 통수권자의 의지가 더해졌다. 이 기획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은 한일협력기금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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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공고 학습현장. 대한뉴스 필름.

1972년 2차 방산육성회의에서도 군의 과학화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중장비 계열의 군무기를 유지·보수할 수 있는 기술병 부족을 해결해야 했다. 당시 오원철 수석은 1874년에 나폴레옹이 설립했다는 군 기술관료 교육기관,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견학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종래 구상하고 있던 기술교육학교를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엘리트 기능공을 군이 먼저 사용하고, 후에 산업계로 돌려주면 된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이 이런 사정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어린 나이에 예고 없이 접하는 군사문화는 충격적이었다.

금오공고의 슬로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밀도는 국력이다’, 다른 하나는 ‘정성, 정밀, 정직’. 자원이 없는 나라에 유일한 자원은 사람밖에 없었고, 그 사람의 가치는 정밀함에서 나온다는 신념이었다. ‘정성’을 다해 ‘정밀’해지는 일이 곧 ‘정직’이라는 기묘한 등식마저 강요받았다. 정밀함은 외부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표출이며, 내부적으로는 정직함의 척도였던 것이다. 나아가 기능정신은 그것이 야기하는 합리적 사고, 과학적 엄밀함의 훈련으로 확장되어 갔다. 기능올림픽의 항목별 채점 비중은 다음과 같았다. 정밀도 75%, 디자인과 기능도 10%, 순서와 공구사용법 5%, 재료의 경제성 5%, 시간 5%. 정밀함은 기능의 핵심이었다.

좋은 대우를 약속받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혀온 전문교사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교육 강도도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교사라고 해서 기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세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밤을 새워가며, 원서로 된 기술서적을 읽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교생 전원이 2급 기능사 자격을 땄다.

그런데 1기생들이 졸업할 즈음 RNTC(부사관학교)제도가 도입되어, 졸업생들은 5년의 부사관 생활을 해야 했다. 졸업하면 군대를 면제받을 줄 알았던 아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때문에 자퇴를 결정한 아이들도 있었다. 다수는 순순히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국가가 제공한 고급 무상교육에 의무로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은 무기운용 기술병의 수준이 낮아 어떤 부분이 고장이 나면 파트별 부품을 통째로 교환하는 방식으로만 장비를 운용했다. 하지만 금오공고 출신 기술하사관들이 들어오면서 간단한 고장은 직접 뜯어 고치는 방식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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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올림픽을 대하는 한국의 승부 집착
금오공고는 군에 기술인력을 대거 제공하는 동시에 단일 학교로서는 기능올림픽에 나가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해졌다. 사실 기능올림픽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더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졸업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택된 이들만이 교내의 첨단 기계 사용을 허락받고 전담교사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며 기능올림픽을 준비했다.

당시 기능올림픽에 나가 실력을 겨루던 세 교육기관이 있었다. 정수직업훈련원과 금성사, 그리고 금오공고였다. 세 기관은 각기 성격이 조금 달랐다. 애초에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받았고, 그 안에서도 또 엘리트 교육을 시켰던 금오공고와 달리 정수직업훈련원은 중졸 학력으로 갈 데 없는 학생들이 마음을 잡고 기능을 배우는 곳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해외 미국학교병원’ 프로그램의 원조자금으로 설립했다.

정수직업훈련원의 한 교사는 기능교육보다 학생들의 여린 마음을 잡아주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이곳은 전자, 기계, 금속, 판금용접, 주물목형 등 5개 부문 교과목만이 개설되었던 금오공고와 달리 목공예와 자수 등 전통적 손끝기술에 가까운 교과목도 개설하였다. 원생들은 기능올림픽에서 자수나 양복, 목공 분야에서 큰 활약을 했다. 참고로 양복은 그 전부터 유일하게 한국이 내리 11회 메달을 딴 종목이었다.

금성사는 단일 기업으로는 세계기능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기관이었다. 1971년 제20회 기능올림픽에서 은메달 3개를 최초로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여러 개의 메달을 차지해 기능인력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 대기업 주도하에 자신들에게 당장 필요하고 실용적인 기술을 연마시켰다. 기능올림픽에서 활약한 세 교육기관은 각기 대안교육과 품질관리, 군사기술에 방점을 찍고 있어 각자 개성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기능올림픽은 편의상 올림픽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국가 간 경쟁을 염두에 두고 만든 행사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페인은 근로청소년의 사상 악화와 부랑화 방지대책의 하나로 1947년에 국내기능경기대회를 개최했는데, 그 후 1950년 포르투갈이 참가해 24명의 양국 선수가 마드리드에서 기능을 겨룬 것이 2회다. 이후 1953년 프랑스, 서독, 스위스, 영국, 모로코 등이 합류해 본격적으로 7개국 국제대회가 되었다. 취지는 기능실력을 겨루기보다는 그 나라의 평균적인 기술문화를 가늠하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축제 같은 것인데, ‘경기’에 방점을 찍은 한국 선수단은 우승의 압박감을 안고 참가했다. 기능올림픽 제패는 국가 성공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더욱 매달렸을까? 한국은 1977년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무려 9연패의 업적을 달성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기를 거의 이미 포기한 독일 선수가 퇴장하지 않고, 이리 저리 디자인을 구상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승패와 상관없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그 나라 평균수준의 기능문화를 대변하고자 온 것이지, 뛰어난 기능공으로서 참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선수들은 승부에 목을 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와 이들을 비교해 위화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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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올림픽 4연패 기념 카 퍼레이드 장면. (<경향신문>, 1981.7.1. 12면)


기능공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
기능공들이 산업전사로서 복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장이’에 대한 비하인식에서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기능올림픽에서 한국선수들이 연거푸 네 번 종합 1위를 하자 미래에는 “여대생이 기능공을 신랑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전두환 대통령이 축사했다.(<경향신문>, 1982. 7. 1. 2면) 일가족이 모두 기능공인 가족의 이야기가 신가족의 모델로 다뤄지기도 했다.(<경향신문>, 1982. 6. 12. 7면) 하지만 정작 메달리스트 당사자들의 인터뷰에선 자신들을 메달메이커로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불만이 표출되었다.

기능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생긴 3~4년의 현장공백을 채워줄 어떤 사회적 장치도 없으며, 더군다나 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 그 모든 희생을 선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메달메이커보다는 우수기능인 대우를”,(<동아일보> 1981. 7. 4. 9면) 정부는 메달리스트에 대한 포상금을 높이고, 연금해택도 약속했지만 기능공에 대한 사회적 위상은 그리 높아지지 않았다.

금오공고의 기술하사관 배출과 기능올림픽 제패의 성과가 곧바로 한국 산업계에 큰 영향을 줬다고 보는 해석은 지레짐작에 불과하다. 실상은 정반대다. 금오공고 출신 기술하사관의 경우 당시로서는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한 상태였지만, 하급 부사관 수준의 일만을 맡게 해 인력을 낭비했다. 게다가 무려 5년이나 군장비만을 다뤄왔기 때문에 정작 민간에서 쓰이는 기술에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경우도 그들이 연마한 것이 오직 대회 입상을 위해 특화된 기능이었기에 산업전선에 곧바로 써 먹을 만한 것이 되지 않았다.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중 일부는 자기 기능직종이 아닌 분야에서 일했다.

금오공고 출신이나 기능올림픽 출신들이 훌륭한 기능공으로서 활약을 했다면 이들이 기능훈련을 함에 있어 단순히 손끝기술이 아닌 스스로 해결하는 문제대처능력을 연마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 명장들은 35.7%가 독학을 통해 배웠다고 한다.(조성재 외, <한국의 산업발전과 숙련노동>, 2013) 꽤나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들의 산업전사로의 활약이 어떤 외부의 도움도 아닌 고스란히 자기 원동력에 기초해 가능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전수받을 기술도 스승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자가 발전했던 1970년대 한국의 숙련공들은 개념상으로 손재주꾼(craft)과 기술자(engineer) 사이에 있었다. 대졸사원들이 매뉴얼을 엉성하게 번역해오면 현장의 기능공이 직접 적용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체계를 세우고, 현장에서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다. 특히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숙련공의 역할이 컸다. 그들이 증언하는 데이터를 다시 기술로 흡수하는 과정이 자주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첫걸음이었다. 기능공 중 일부는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전공교수와 논쟁을 벌이는 실력을 갖춘 경우도 있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구조 속에서 ‘기능공’은 당장 외국의 기계를 정밀하게 운용하기 위해 숙련노동을 제공하는 자로서 기획되었다. 이들은 국가나 기업의 체계적 교육을 받고 정밀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들이 단순히 국가의 지략 속에 배치된 기능공에 멈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능과 기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다소 비하 뉘앙스까지 섞여 있는 ‘기능’은 실은 손으로 자유롭게 뭔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들은 기계에 의해 닦달된 인간이 아니라 기계를 닦달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사람들이었다.

<오영진 문학평론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160229170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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