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문화일보 2020-0612]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 최유미 지음 │ 도서출판b | 303쪽, 2만2000원
책 내용을 소개하려면 제목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 과학기술사학자인 도나 해러웨이(76)가 제안한 개념인 공-산(共-産)에 대해 한국 학자인 최유미가 사유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해러웨이는 1980년대에 논문 ‘사이보그 선언’으로 페미니즘 논란을 거세게 불러일으킨 학자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산타 크루즈에서 과학사와 여성학을 가르쳤다. ‘공-산’은 해러웨이가 제안한 개념인 심포이에시스(Sympoiesis)를 옮긴 말이다. ‘공-작(共-作)’으로도 옮길 수 있는데, 저자는 굳이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공-산’을 택했다. “공산주의가 표방했던 상생적 삶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은 현실적 공산주의가 함의하는 모든 소유관계가 철폐된 그 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를 적으로 삼았다가 패배한 그 이념에 대한 경배가 아니다.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생산하며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중에 10%만이 인간 게놈을 가졌다는 것에 주목한다. 나머지 90%는 박테리아, 원시 생물, 미생물 등의 세포다. 사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농촌의 생산이 없으면 도시 생활이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공-산’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한 학자다. IT업계에서 20년간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던 그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모순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 무구’를 추구하면 프로그램 자체를 작동시키지 못할 수 있다.
그는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세미나를 통해 해러웨이의 저작물을 읽으며 기대감을 품게 됐다. 현실의 모순과 씨름하며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그 길은 1980년대의 주류 페미니즘이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테크노사이언스 직업군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새롭게 나타난 ‘집적 회로 속의 여성들’에게 과학기술이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는 이분법적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책은 공-산의 삶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문제까지 성찰한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다른 사람의 식량을 훔친 가족을 생매장한 일화를 등장시켜 ‘함께- 살기 위해 죽이기’를 선택해야 하는 공동체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예민한 낙태 문제도 다루며,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더 나누자고 제안한다. ‘정치적으로 생태적으로 극심한 피괴의 시대’인 탓에 공-산에 대한 사유가 더 넓고 깊게 퍼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