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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의 명성을 새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 유명세는 이 책을 청소년 권장도서이자 논술의 소재로, CEO를 대상으로 한 강연의 재료로, 현실정치를 꼬집는 권위적 근거로 ‘소비’되게 해왔으며, 그 내용은 ‘강력한 리더십’ 내지 ‘철저한 현실주의’ 같은 매끈한 문구로 압축되어 말하기 쉽고 듣기 편하게 유통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해 왔다. 사전에도 등재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라는 단어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라는 뜻뿐 아니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세간의 유서 깊은(!) 통념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일 것이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이러한 단면적 이해에 문제를 제기했고, 국내에도 이미 많은 연구서들이 출간되어 있다(지난겨울만 해도 퀜틴 스키너의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존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등 저명한 학자들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탁월하게 ‘해설’하고 또 ‘변호’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과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에 관한 많은 말들은 ‘오해’와 ‘이해’라는 스펙트럼을 벗어나지 못해 온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다시 쓴 고전’이라는 모토로 동서양 고전을 재조명해 온 그린비 리라이팅 클래식의 열두번째 권(시리즈 번호로는 14권)으로 출간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은 이러한 수직선 위에서 이탈하고자 한다. 그람시, 네그리, 알튀세르 등의 마키아벨리 논의를 빌려오는 한편,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통해 마키아벨리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대 정치철학의 선구자’라는 측면에서만 평가되어 왔던 마키아벨리의 혁명성을 현대적 의미에서 되살리고자 한다. 즉, 이 책은 단순히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책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그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혁명의 미래적 에너지를 발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 과연 군주정의 이데올로그인가?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최고의 정부 형태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군주 권력의 기반을 인민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언술이 『군주론』의 곳곳에서도 드러나긴 하지만, 어쩐지 기만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논고』에서 “인민에 의한 정부가 군주에 의한 정부보다 낫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가 혼합된 고대 로마야말로 가장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정체의 표본임을 설파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군주’에 관한 불후의 고전을 남겼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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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그린 로렌초 데 메디치 _ 마키아벨리는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체제란 순환하는 것이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각각 부패하면 그다음 체제로 대체되며 순환한다는 것이다(152~153쪽). 그런 그가 『군주론』에서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고대했던 것은 군주의 존재를 옹호하고 그것을 신성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정부상태라는 당대의 타락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이웃나라들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해 가고 있던 시기, 좀처럼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반목만을 거듭하던 이탈리아 반도에 ‘인민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의 구축을 꿈꾸었던 것이다. 즉, 군주를 ‘시초적 계기’로 삼아 종국에는 고대 로마식의 혼합적 공화정을 세우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표였다.

결국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강력한 군주란 ‘비상사태’에 특별히 요청되는 존재였을 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군주의 권력이란 군주 개인의 역량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수의 무리들로서 인민의 공동 역량이 군주의 권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 인민은 군주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의 원천적 힘”인 것이다(230쪽).

이렇게 우리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인민과 군주의 대립이 아닌, 양자의 결합을 읽어 낼 수 있다.

신이 부리는 운명의 파도,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역량

마키아벨리의 혁명성은 무엇보다도 정치를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왔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신의 의지’를 지상에 구현한다는 중세의 도덕적 정치 관념에서 벗어나 그것을 ‘인간의 주체적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인물로서의 마키아벨리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질서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그것들의 부딪침이 만들어 내는 동학이었다. 이는 곧 마키아벨리의 사유가 “초월주의적 정치철학의 지배에 대한 내재주의 정치철학의 반란이라는 맥락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58쪽).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표상하는 ‘비르투’(virtù)야말로 마키아벨리의 핵심 키워드가 된다. 흔히 ‘역량’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운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지 않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 내는 힘”을 의미한다(114쪽).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체사레 보르자마저 쓰러뜨린 병마, 인간의 무력함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감하게 되는 자연재해, 자신의 능력이 아닌 남들의 호의에 의해 주어졌기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권력과 부와 명예……. 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인간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 ‘운’의 영역이라면, 그 외부적 불확실성에 스스로를 맡겨 두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직하는 것이 곧 ‘역량’의 영역이다. 인간의 역량은 곧 운명의 파도를 타고 넘는 기예(tech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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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한 삽화 _ 운명의 여신이 돌리는 수레바퀴 안의 한 남자의 상태는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마키아벨리는 주체 외부의 우연적인 힘을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외부의 조건 속에서 역량을 통한 인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이자 그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마키아벨리와 후대의 혁명적 사상가들과의 친연성을 본다. 세계의 우발성과 내재성을 강조하고 그 안에서 어떤 존재(군주)의 계기적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고(177~191쪽), 외부와의 마주침에 대한 능동적 통제를 강조하면서 “도덕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의 윤리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공명한다(195~202쪽). 마키아벨리는 어쩌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이가 아니라 그 목적을 둘러싼 조건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수단을 가장 면밀하게 탐구한 사상가가 아닐까.

역량 있는 공동체, 그리고 해방의 정치학

이 책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이 주목하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군주의 역할을 맡을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자본의 전 지구적 횡포 속에서 여전히 “예속되어 있고, 억압받고 있으며, 지리멸렬해 있는 데다가,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갈기갈기 찢기고, 유린당하여, 한마디로 황폐한”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인민들은 어떻게 자유와 평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 계기가 되어 줄, 마키아벨리의 군주 역을 대체할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주체를 호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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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_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역량을 국가가 지속될 수 있는 원인으로 보았다. 인민의 역량은 그들이 자유롭고, 평등이 보장되는 제도 속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예를 그람시에게서 찾을 수 있다. 분열된 이탈리아를 봉합하여 새로운 정체를 만들어 낼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정확히 마키아벨리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는 『옥중수고』에서 인민의 요구를 실현할 집단의지로서의 혁명정당을 강조한다. “맑스주의 정치정당이라는 현대의 군주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분산된 개인들을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응고하도록 하는 촉매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8쪽)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의 군주’라는 표현은 명백히 마키아벨리적 의미의 ‘군주’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저자는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마키아벨리적 군주를 읽는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계기로서의 존재이자 스스로 그 자체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이다.
 
“억압 없는 사회, 수탈 없는 사회로서 코뮤니즘 사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자신의 지배를 통해 지배 자체를,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통해서 계급 자체를 폐지하는 데까지 나갈 것이다”(238쪽).

마키아벨리의 사상 속에 내재된 비정함을 애써 모른 척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눈감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마키아벨리가 정치학과의 강의실에만, 논술 시장의 상품으로서만, 수탈자들의 언어 속에서만 살아 숨 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은 인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신뢰와 주체적 역량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강조를 복기하고 그것을 현대의 맥락에서 부활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단순히 ‘냉혹한 군주론자’, ‘폭력의 찬양자’가 아닌 ‘해방의 기획자’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집단의지(역량)를 통해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고 자유로운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 당위와 가능성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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