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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속기.hwp

 

2012/ 2/ 21

 

제6회 국제워크숍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도시와/의 투쟁 - <뉴욕열전>을 중심으로

 

오늘은 제 발표를 어제보다 좀 줄이고 여러분과 토론시간을 길게 갖고자 합니다. 제 얘기보다 토론을 길게 하는 이유는 두가집니다. 전 제가 말하는 것보다 제 문장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말보단 문장이 항상 나아요. 그리고 이 책이 꽤나 예전에 쓴 거라 잊어버린 건 아닌가하는 공포감이.. 여러분의 신선한 독해 관점에서, 제가 제식대로 썼을 때의 읽기를 갱신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오늘 전 첫 번째 책, 뉴욕열전의 기본적(세부는 별도로) 이론적 문제를 생각나는 대로 부연해보겠습니다. 내일은 두 권 째인 유체도시구요, 형식도 오늘처럼 얘기 시간을 길게 해 보겠습니다.

 

뉴욕, 도시 시리즈의 기본적 관심은 이겁니다. 도시에 ‘말’이 있을 수 있는지의 문제. 도시가 스스로 말할 때 어떤 말을 할지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도시를 계속 사랑해 온 이유 중 하나는, 도시를 통해 비로소 세계라는 보이지 않는 관계성을 알게 됐다는 점, 세계로 부분적, 형식적으로 닿을 수 있게 됐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즘 여러 환경 위기, 후쿠시마 원전 폭파 이후를 생각하면, 세계라는 개념이 불충분한 건 아닌가 생각도 들기 시작했습니다. 세계가 불충분하단 말은, 어쩔 수 없이 지구라는 게 설정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지구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하나의 추세로서 도시화, 힘이랄 수 있는 운동이 있습니다. 그런 운동 속에 우리의 권력과의 투쟁도 포섭돼 있다는 생각. 결국 도시를 말함으로써 어디까지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가하는 점. 간단히 말하면, 이건 매우 환원적이지만, 그런 문제, 관심에서 보면 도시란 걸 고정된 장소라든지 물질적 구축물이라든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중시해온 건 그런 요소를 하나의 포인트로 인지하되, 그걸 빠져나오는 것으로서 도시를 중시 해 보게 됐습니다.

 

이를 매우 도식적으로 봤을 때 일단 시간적 의미의 운동으로서 도시의 측면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의 도시를 생각하다보면 인간이라는 이동하는 존재, 하나의 중계점을 볼 수 있습니다. <뉴욕열전> 4부 첫부분을 한 번 읽을게요. 두 번째 단락입니다.

 

“체류기간과 거주시간의 길고 짧음은 모두 다르지만, 이민은 언젠가 동일한 장소로부터 떠날 것이다. 혹은 그 어떤 장소라 할지라도 이민자들은 항상적인 왕복운동의 중계점으로 삼는다. 특정 공동체의 주거구라고 하여도 그 곳에서 영원히 정착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도시공간이란 이동하는 장소인 것이다. 사람들의 유입이동과 함께 그 물질적 소생도 바뀌고 흥망성쇠도 함께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어떤 도시도 지속적으로 변해가는 전지구적 네트워크에 있어 하나의 시공간적 결절지점에 불과하다. 체류가 시간적 장단이 있다 해도 장대한 인류 역사의 교통운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민의 이름으로 아무리 영원성을 표상하려 해도 궁극적으로 모든 민중은 이=민이다.”

 

이게 운동으로서의 도시의 시간적 측면입니다. 공간적 측면이란 건 온갖 도시는 고유의 장이면서도, 다른 도시, 비도시와의 연관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네트워크적 관계들의 점이면서도 동시에 국가에 의한 수직방향의 설정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 즉 국제관계, 정치경제뿐 아니라 전지구적 계급서열 분업의 제도화를 매우 분절화된 형식으로 표현한다는 것. 이게 두 운동으로서 도시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보탤 게, 제가 도시를 볼 때 중시해 온 점인데, 바로 도시공간, 즉 도시공간을 볼 때 그것을 시간적 착종체로 본다는 것, 시간의 층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발터 베냐민에 대한 책에서의 언급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작업[<뉴욕열전>을 쓰는 행위]의 출발점은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겪는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그것을 치마타라 보았다. 그건 발터 베냐민이 파리에 대해 행한 파사주론과 무관계한 건 아니었다. 도시공간이란 지금에 있어 복수의 과거 기억이 살아있는 장소, 복수 시간이 교차하는 장소다. 도시의 공간성이란 동시에 시간적 착종성을 지닌다. 만약 우리들이 자본과 권력이 강제하는 선(線)적인 발전의 미래상에 대해 대안이 될 상상력을 발전시킨다면, 이러한 도시적 본성을 출발점 삼을 수밖에 없다. 베냐민은 이러한 도시적 경험에 근거, 진보의 이데올로기= 역사와, 형식의 연속체=철학을 해체하는 데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 역사철학으로서의 도시론, 도시론으로서의 역사철학이라는 역설적인 계획이 출현했다.”

 

이게 하나의 도시를 볼 때의, 우리가 도시를 걷고 볼 때의 상상력의 계발의 방법론이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 제가 일관되게 관찰한, 운동으로서의 도시를 볼 때의 더 구체적인 접근방법은 두 가집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 물질적 구축물로서의 도시와 제가 거리=치마타라 부르는 특수한 교감이 일어나는 운동하는 장소성이라는 걸 여러 방식으로 말하였습니다. 그걸 가장 간단한 말하기로 하면, 이런 한자를 요즘 쓰는지 모르겠지만 ‘누각’과 치마타[거리]. 이게 하나고 또 하나는 물질적 구축과 사회적 구성, 자본주의적 개발/이민운동 혹은 민중투쟁이 또 하납니다. 여기서 거리라는 게 무슨 말이냐면,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길지 않으니 다시 읽을게요.

 

“일본의 코지엔이라는 사전에 따르면, 치마타란 본래 길이 걸쳐 있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별의 길이나 교차로를 의미한다. 돌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서양적 광장과 달리, 일본어적인 어감으로 보면 치마타란 사람이 집합하는 장소라면 어디서든 만들어질 교류, 교통 공간을 말한다. 그것은 각종 의식, 퍼포먼스, 정치적 주장, 시장의 공간이다. 그리스적 광장이 지닌 이상형은 건전한 시민사회와 공공공간이 어디까지나 올바른 도시의 물질적 구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그 이상형이 자본주의적 개발에 따라 더 이상 현실성을 지니지 못하게 됐다. 따라서 광장보다는 오히려 일본어의 치마타라는 개념이 실재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것이 도시를 볼 때, 접근의 방법적 원리로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문제적인 도시를 볼 때의 근본적 원리랄 것 생각해보면, 하나는 운동으로서의 도시화가 한 축에 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도시화 안에는 첫째 권력의 폭력으로서의 도시화, 개발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말로, 그것을 물질적으로 떠받치면서도 그와 투쟁하는 민중의 추세가 있습니다. 도시화urbanization이란 걸 말할 때 르 페부르의 생각이 하나의 힌트가 됩니다. 책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르페부르의 도시적 혁명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르페부르의 중심적 개념은 도시화이다. 이건 구체적으로 과거에 모든 변화는 산업화로 인해 추동됐지만, 산업화를 위해 이는 길을 비켜주었지만, 오늘날은 다른 차원에서 산업화를 능가해버릴만한 세계적 기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산업화를 대신할 무언가가 아니라 산업화를 다른 차원에서 통제하는 틀이다. 이것이 나의 해석이다. 지금까지 보이는 곳에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시화의 상대로 신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도시화란 생간의 사회화를 뜻하는 별도의 명칭이기도 할 거다. 르페부르에 의하면 도시화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사회공간의 전지구적이며 전체적 생산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사회에 존재해왔던 모든 도시 형태 정치, 산업, 상업도시를 집어삼키고 세계와 일체화되는 위기적이며 동시에 비판적 권력이 되고 있다.”

 

오늘 도시화의 위기적 한 극이랄 게, 오늘날 무시 못할 단계까지 왔습니다. 마이크 데이비스 등이 문제로 말하듯 메가슬럼이란 게 있고, 그 확대, 도시도 시골도 아닌 반(半)도시적 상황(교외)의 증가 등이 전면적으로 일어나게 됐습니다.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도 들 수 있겠죠. 그건 또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구축으로서의 도시개발에 있어, 그걸 여기까지 추진해온 과정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이미 하나의 요소, 도시구축에 있어 파국의 논리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한편으로 재해자본주의라고 불리듯 온갖 파괴, 재해를 다음 단계의 더 큰 발전으로 바꿔치기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폴 비릴리오의 인용을 빌어 생각해보면, 도시개발의 발전... 현상학적 불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릴리오가 말하는 건 기본적으로 구축이 하나의 현상학적 불연속성에 달했을 때, 그것이 재해를 발명해간다는, 자해를 발명, 창조한다는 역설적 논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9.11은 마천루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혹은 3.11(원전폭파, 일본)은 전력의 도시적 수요를 날조하는 군산체제의 발명이었습니다. 결국 파국의 가능성은 개발의 폭력 속에 항시 그 본질로 잉태돼 있었던 거죠. 이건 금요일 저녁 3.11 이후의 문제를 다룰 때 더 자세히 말할게요. 그것을 하나의 도시화의 불가피한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 이건 뉴욕열전엔 안 썼지만, 낭만주의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까지는 산업화, 개발화, 도시화랄 게 있어, 어딘가 밖에서 그것을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영양분을 주는 이른바 자연환경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대지, 우리에게 베푸는 어머니로서의 지구, 분노의 신 등으로 태풍, 지진으로 우리와 사회구축물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낭만주의란 건 결국 그런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거기엔 자연의 숭고란 게 있었습니다. 그 숭고란 게 다른 숭고, 다른 요소로 뒤바뀌려 하고 있습니다. 방사능적 물질이 나무, 물 등에 스며들어가 자연의 숭고가 방사능의 숭고의 분신이 돼 가는 점을 말합니다. 그 때 일어나는 건 자연/인공이라는 분리가 불가능한 상태, 절대적 연관성의 세계랄까요, 온갖 게 온갖 것과 관계되고마는 세계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오늘 뉴욕열전과 상관없으니 금요일에, 아무튼 도시화의 최악의 국면은 이런 겁니다.

 

그에 대해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화의 측면은 민중의 투쟁인데요, 그것을 도시공간과의 관계에서 민중의 투쟁을 생각하면, 그때 몇몇 기본적 포인트/전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로 민중이라는, 투쟁하는 주체라고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가 PT가 아닌 멀티튜드 개념을 통해 말한 바 있지만, 제가 보기에 민중이란 오히려 그것을 가능한 실체화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오히려 잠재력에 대한 존경을 담은 것입니다. 다중이란, 하나의 정의를 곳곳에서 비껴가게 하여 여러 측면에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측면으로 권력, 폭력과 민중투쟁과의 관계, 아까 말한 누각/치마타와의 관계로 오버랩됩니다. 이 두 가지는 존재론적 대상성을 갖지 않는, 대칭성을 안 갖는, 그래서 명사화할 수 없는, 무명자로 다뤄야 한다는 생각, 혹은 복면을 쓸 때만 얼굴을 드러내는 자, 그런 민중=치마타라는 속성으로 몇 가지 강조 해온 바가 있습니다. 그건 어쩔 땐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군중에 대비될 무리 개념을 말합니다. 군중이란 하나의 흐름에 따라 모두 같은 방향에 가는 집합이고, 이에 반해 무리란 일방향으로 갈 리 없는 흐름이고 그런 집합의 이미지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레닌주의적 정당과 비교될 수 있는 아나키들의 어피니티 그룹을 들 수 있죠. 혹은 그런 관계가 넓혀졌을 때의 이미지로서, 한편으로 이른바 넷상의 관계, 그물망 조직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도 책에서 치마타와의 관계를 통해 강조했지만, 거기에 신체적 접속의 불가피성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즉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만이 아니라 신체적 접촉도 필요, 그런 것의 토대가 될 도시공간이랄까요, 그건 동시에 가타리 방법으로 말하면 횡단 결합, 혹은 계급, 젠터, 인종, 등 다양한 권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니라 서로가 횡단적으로 교차하는 지점. 그런 것에 의해 결성될 민중이 무언가를 상상할 때, 투쟁할 때의 모델로 다종다양성의 전술이란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전술은 물론 읽어보셨듯이, 축제적 측면, 전투적 측면, 안전지대도 갖는 여러 모습이 있을 수 있겠죠. 동시에 그 다종다양성의 전술의 집합, 어제 말씀드렸듯 점거운동의 문제등도 있을 텐데요, 숙명적으로 거기서 전체적 추세를 만드는 건 주의주장이 아닌, 특종 유능한 집단도 아닌, 간-운동적, 그룹적 역능의 선행성. 그런 이미지가 민중이랄 때 내포돼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 운동으로서의 민중의 존재론, 투쟁의 존재론을 기반으로 두 가지 뉴욕론이 쓰인 거죠. 거기서 동시에 뉴욕의 고유성이란 게 중요한 토대로 있었습니다. 그여기서 하나의 강조점, 초점 전제는 미국합중국과 뉴욕이라는 도시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미합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외부로서의 뉴욕. 거기에 물리적으로 내포되면서도 사회관계로는 미국을 초월한다고 해야할 장으로서 뉴욕이란 걸 강조했습니다. 이것도 뉴욕이란 걸 하나의 주체로 생각하고, 하나의 운동으로 설정할 경우에만 이런 말도 할 수 있겠지만 뉴욕은 즉, 미합중국과 항시 투쟁해왔다는 것입니다.

 

첫째 뉴욕은 서양의 식민지의 최전방이었다는 점, 노예노동의 도입, 선주민 배제라는 두 가지 결정적 토대를 가지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자 이민자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주의적 도시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하나의 지구상의 위기 지점에서 이민자들의 유입구이기도 했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노예노동, 선주민 배제라는 두 요인이 뉴욕이라는 도시공간에서 가시적인 이상, 이 도시는 미합중국에 윤리적 도전을 계속 던질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미합중국이라는 토지는 미국민뿐 아니라 지구 전반에 열려있어야만 하는 곳이다, 즉 만일 이 지구상에서 국민국가란 게 없어진다면 일단 그것 미합중국부터여야만 한다는 것, 이는 책에서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런 전제가 이 책 안에 들어있습니다.

 

뉴욕적 체험을 통해 여러 가지 드러나는 점이 있다면, 민중이라는, 이름 없는, 얼굴 없는 잠재력의 집합으로서의 민중입니다. 이는 다양한 이민, 노예, 선주민의 집합성을 통해 형성돼 왔습니다. 그것을 이 책에서 구체적 역사적 사건으로서 썼고, 시대적으로 썼습니다. 그건 식민지 시대의 노예, 선주민, 하층민에 의한 반란이라든지 혹은 20년대 초반에는 할렘 르네상스, 미흑인, 카리브계, 빌리지의 보헤미아, 60년대 후반의 경우 블랙팬더당, 게이 등 비판적 연합등을 들 수 있습니다. 어제 점거운동에선 기술적, 분석적 개념은 아니고 레토릭한 개념으로 1%: 99%라는 말을 인용했지만, 실제 99%는 이러한 민중성, 지금까지 말한 민중성이 그 내용에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중요한 건 스쾃운동으로 대표되는 사는 것 자체의 투쟁, 그런 민중의 투쟁의 토대에 있는 거처, 먹을 것, 살아가는 것의 투쟁입니다. 다양한 젠트리피케이션, 뉴욕 내 지역적 분단, 차별정책 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분석했는데요, 결국 그것이 최종적으로 가리키고자 한 것, 틈새로부터 드러나는 것은 서양 식민지에 의해 영토화 된 대지입니다. 영토라는 건 사유화된 커먼즈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영토의 틈새=투쟁, 사건, 재해 등 이와 같은 것에서 대지, 혹은 커먼즈로서의 지구를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도시란 걸 통해 혹은 도시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지구적 레벨에 도달할 수 있을지, 민중의 곤란과 투쟁을 통해 지구에 의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하는가의 문제, 그러한 걸 바라며 이 책을 썼습니다.

 

어제 점거운동 강연에서 잊은 게 있는데, 점거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랄 것이 있습니다.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월스트리트란 실제 벽이 있었단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죠. 월 스트리트의 월=벽이란 식민지 시대 초기 식민자의 거리와 거주민을 갈라놓기 위한 벽을 말하는 거죠. 오큐파이 투쟁은 그곳을 직격한다는, 그 중추를 치는 투쟁입니다. 식민지의 출발점을 쳤다는 역사적 의의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 얘기는 여기까지이고 토론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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