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꼬꾸댁 사마의 장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전에 일본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게 다시 떠올랐어요.
작년 메이데이 때, 집회에 갔었죠.
3일간 집회였는데, 5월 2일에는 노숙자나 빈민의 주거문제 등에 대한 심포가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소개 등이 있었어요.
그날 오신 분들 가운데에는 '이상하게도'^^; 장애자가 많았어요.
일어나서 소개하고 발어하는 가운데서도 장애자가 "폐를 끼치는 자"로서 비난받고 설움 받는 애기를 많이들 하셨지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어요.
세상에 대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누가 있는가?
나는 그날 전철을 타고 갔으니 전철의 기관사나 차장들에게 페를 끼쳤고
그날 점심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었으니, 그걸 만들고 날라다 주신 분들께 폐를 끼쳤고...
어디 이게 저 뿐이겠어요?*^^*
이 글을 보는 분들도, 완전히 지 혼자 산다고 생각하는 부잣집 도련님덜도, 항상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존재자에게 페를 끼치며 살고 있지요.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자를 장애인이라고 한다면
저도, 그들도 모두가 다 장애인이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무엇엔가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으니
"모든 존재자는 장애자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단언컨대 진지한^^; 존재론적 명제입니다.
그럼에도 왜 특정인들은 자신이 장애인임을, 폐를 끼치는 자임을 잊고 있을까?
언제 우리는 장애임임을 잊게 되는가/
그건 자신이 폐를 끼칠 때, 그 대신 돈을 내는 순간일 겁니다.
돈을 냈으니 폐를 끼친 게 아니라 대가를 지불했다고, 교환을 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반면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항상 폐를 끼치는 자임을 확인하게 되지요.
그러나 돈이 많은 장애인이 장애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돈을 내는 사람들이 폐를 끼치지 않고 산다고 말할 순 없겠지요.
반대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실제 모습, 존재론적 실상을 보지 못하는 거지요.
돈은 실상을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는 도구인 게지요.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가린 돈을 툭 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란 사실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기대어 살고 있다는
존재론적 공동성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장애자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은 그 존재론적 공동성을 알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다른 장애자들과 함께, 그들이 폐를 끼칠 수 있도록 떠받쳐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존재론적 공동성에 기꺼워지는 것, 그게 공동체나 코뮨의 실천이라면
코뮨주의는 존재론적 장애학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