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여러모로 기대가 많았던 국제워크샵. 드디어 오늘 저녁 7시 반에 시작을 했었는데요. 비포 아저씨는 생각보다 사진이랑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요ㅎㅎ 정말 신기했습니다. 첫 날이기도 하고, 공개강연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었습니다. 자리가 부족해서 간이의자까지 동원할 정도로요ㅎ
세미나 첫 날이어서 그런지, 비포 아저씨는 앞으로 5일동안 세미나 할 내용을 쭉 개괄하려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너무 많은 얘기가 나와서 조금 어렵기도 했어요. 주체성과 주체화의 차이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일반지성, 맑스와 붓다, 도덕적 인간형, 착취, 정신병리학, 현재의 기호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형상, 가치결정의 난제, 초월성이 아닌 내재성, 시애틀 투쟁이나 68혁명 베트남 전쟁 등 자본주의와 얽혀있는 다양한 비극적 사건들, tangle 등등. 생각나는 것과 적어놓은 건 다 썼는데, 그래도 왠지 더 있을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나네요ㅠ 아무튼 정말 다양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조금 아쉬웠던 건,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두 시간 안에 말하려고 하다 보니, 각각의 사건이나 개념에 대해서 깊게 얘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만하면 훅훅 넘어가버려서 많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저는 질의응답시간이 굉장히 재밌었는데요. 다섯 개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상대적으로 다 구체적이어서 너무 좋았어요. 특히 자율주의와 아나키즘의 차이를 설명하는 답변이 제일 좋았어요. 아나키즘과 자율주의를 각각 정의하여 각각이 갖는 특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이라는 용어가 갖는 모호함과 애매함을 드러내어, 깔대기로서의 아나키즘을 비판하는 것. 사실 자율주의에 대한 얘기만 해도 두 시간이 훨씬 부족할 거에요. 그래서 비포 아저씨는 자율주의와 아나키즘을 따로 정의한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의 모호함을 드러낸 것이겠죠?ㅎ 아나키즘이라는 표상이 우리에게 주는 흔한 감응은 뭔가 우리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자유의 극단적인 경지이죠. 근데 비포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아나키즘을 표방하는 집단 사이에서도 굉장히 대립되는 가치관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아나키즘이라는 표현만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좌파사상들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기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주변에 그런 말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자유니 책임이니 평등이니 진보니 뭐니, 근데 그런 표현만 보면 참 멋있고, 우리가 반드시 지향해야 할 이데아인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이 개념들을 구체적인 현실 사건들에 적용시켜 보면 정말 애매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아니 오히려 그 애매함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존속시키거나 확장시키는 사람들도 많죠. 가령 민족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포괄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을 이용하여 착취를 전개하는 집단과 그 착취의 대상이 되는 집단은 분명히 나누어져 있죠. 이렇듯 많은 위정자들이나 자본가들은 이런 애매한 표현을 통해 그 배면에 가려져 있는 진실들을 더욱 묻히게 만듭니다. 고로 개념이나 표현을 무엇보다 뚜렷하게 분절되어 있는 것을 사용해야하거나, 혹은 뚜렷하게 분절시켜서 만들어야 한다는 비포 아저씨의 말을 백 번 타당합니다.
저는 오늘 비포 아저씨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지만, 뭔가 강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를 굉장히 비관적으로 보고, 지금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반지성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착취의 대상이 될 것이고, 가치와 가격의 결정은 폭력과 협잡 혹은 사기이기에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받을 것이고, 결국 이 상태로 지속된다면 파국의 도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포 아저씨는 담담하게 말하셨죠. 이것을 말씀하시는 비포 아저씨가 제게는 뭔가 심연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 같았어요. 그러면서 또 그 심연에 잡아먹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어떻게든 파국의 도래를 막기 위해 우리는 과거가 갖고 있는 수많은 급진적인 잠재성과 가능성들을 발굴해 내어 현실화시켜야 하고, 또 동시에 현실화된 사건들 중에 어떤 것들을 살리고 죽여야 할지 분별해 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으로 말은 했지만 희망은 버리시지 않으셨어요. 게다가 그 희망을 초월적인 영역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뚜렷하게 응시하는 과정에서 찾으시는 모습을 계속 보여줘서 그것 또한 멋있었어요.
여러모로 어려웠지만, 17시간 뒤의 세미나가 또 기대되네요. 비포 아저씨는 과거의 사건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얘기하실까요? 비포 아저씨는 과거의 어떤 가능성과 잠재성, 그리고 현실화된 사건들을 반추할까요? 그래서 그 가능성들이나 잠재성들을 급진화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말하실까요? 파국의 도래는 어떻게 막을 수 있다고 볼까요? 정말 궁금한 게 많습니다. 남은 사 일 동안 열심히 들어서 꼭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마련하고 싶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그렇게 강한 어조로 얘기하시는 게 참 인상 깊었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