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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콩쥐

*^ ^* 후지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물리적 폭력이 코앞에 닥친 상황을 언급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큰콩쥐입니다~

겨울밤은 깊어가고 살아남은 우리들은

'예감'이라는 감각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한 논의하지 못한 채 아쉽게도 워크샵을 마쳐야 했지요.

이렇게 쟁점이 되었던 내용을 정리해 주시니

제가 던졌던 질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압도적인 폭력에 신체가 노출되는 과정을 (그것도 상당히 몰입하여) 상상하다보니

불가피한 폭력과 마주한 찰나에 한정해서 언어의 무(기)력함을 언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에게 가해질 지도 모르는, 아니면 가해자가 될 지도 모르는 대기상태에서

'식은 땀'을 흘리는 사태는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 또한 이미 작동되고 있었을텐데 말이죠.


저항의 가능성으로서의 잠재력이, 폭력에 대한 철저한 수동성에 항상 깃들어 있다는 저자의 언급과

방어태세에서 예감된 폭력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는  저자의 의도는 

한편으로는 매우 유의미하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이런 식의 논의가 설명해 줄 수 없는 부분들, 간과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시체 '옆'이라는 위치에서 예감이라는 감각이 갖는 가능성은

살해한 쪽과 살해당한 쪽으로 찢겨지면서 거기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는 이 '또 다른 가능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감지하는 것이 두려움인 동시에 새로운 관계성이라고  저자가 말했던 부분이나

예감한 폭력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지는 부분일 수도 있겠고요. 


이러한 논의가 소거된 상태에서는 그저 '살아남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싶습니다.

방어태세를 취한 신체와는 달리, 폭력에 맞서 죽음으로 뛰어들어 찢겨진 신체도 있습니다.

육체의 최종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죽음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감으로서 진정 실존할 수 있었던 자들,

죽음으로서만 비로서 살 수 있었던 사람들,

즐비한 시체들 옆에서 또 하나의 시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에 대해 그저 '죽었으니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식의 태도는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저항의 가능성 또는 

그러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에게 생겨난 변화/저항의 가능성을 무화시켜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폭력을 예감한다는 감각만큼이나

이미 자행된 폭력에 대한 사후적인 감성(사물을 감각하는 방식)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텍스트의 논점을 벗어나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 나가면서 여러분들과 좀 더 깊이있는 논의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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