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의 초극>은 지금 것 읽은 텍스트중에 가장 수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것 같은데,
오가는 대화들 속에서 머리가 뽀글 뽀글 해 지는 것이..... '그게 아니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아나키>라는 단어와 <니힐>이라는 단어를 정리 해 보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안보투쟁이나 미이케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 되었는지를 안다면 좀 이해가 수월할까 싶기도 한데,
안보투쟁이든 미이케 투쟁이든 구체적인 것은 이 글에 소개된 이상을 알지 못해서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일단 제목으로 사용된 '정형의 초극'이라는 말이 '기성조직의 타파'를 이야기 한다고 하니
니힐이든 아나키든 그것들 모두가 혁명에 관계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확실 한 듯 합니다. ^^;;;
셈나가 진행되는 동안 정훈쌤이 혁명들에서의 <사상>의 역할에 대한 의문(?)점을 언급 하실 때
읽었던 내용들을 그런 맥락에서 정리하고 이해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니가와는 정형의 초극(기성조직의 타파) 운동에서 사상이 가지는 역할은
'기성조직의 타파'라는 목표가 갖기 쉬운(혹은 흘러가기 쉬운) '맹목성'에 대해
비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안보투쟁이 마이너스의 폭발이나 음성적 형태의 폭발을 보여주는 원인으로 '사상적 황폐' '사상적 공동화'를 지적할 때
타니가와가 지적한 한계는 맹목성을 견제할수 있을 비판적인 '사상적 기반의 부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상이 이렇게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발생기반(토착민?, 혹은 프롤레타리아?)에서 유리되어 존재와의 연관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타파해야할 기성조직을 만드는 통로가 될 수 도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미이케 투쟁에서의 자연발생적인 노동자의 무장투쟁의 경험도
토착적 에너지를 상부의 조직에까지 연결시킬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역학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부조직에 포섭되어 그 명령체계로 편입되면서 토착적 에너지와 유리되어 버리는 순간
기성조직의 재생산에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 그 예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니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참 아리송송하고 헷갈립니다.
어떤 때는 '니힐'이 혁명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기성조직에 대한 실망이나 회의, 혹은 반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아나키적인 에너지로 분출되었던 혁명이 '기성조직에 포섭되어 흩어지는 양상'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적어도 <아나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어느정도 잘 정리를 해 주고 있습니다.
" 하층 프롤레타리아트의 심정 깊은 곳에서 흘러 넘쳐 현상과 충돌하는 에너지는 늘 아나키적인 현상형태를 취한다."
라는 문장이 특히 그렇습니다.
결국 그가 혁명이나 운동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맹목적이고 공허한 운동이나 혁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상>적인 기반이 필요하지만,
이 사상이 발생기반(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토착민)에서 유리되는 순간,
그것은 또하나의 타파해야할 기성조직을 재생산 할 위험에 처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니가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민중과 유리되어 확고부동해지려는 사상(이데올로기)은
혁명의 무기이기는 커녕 적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라면,
"의사 시민주의의 재생산을 끊기위해 반복해서 존재속에 포함된 시원적 아나키로 회귀하는 운동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그렇게 적으로 나타난 사상(이데올로기)은 < 민중의 시원적 아나키를 반영하는 사상>으로서 타파(생성적 해체?)되어야 하고,
그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타니가와는 맥락이든 개념이든 뭔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어하는 제 성정과
궁합이 맞지 않는 사상가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제 조급한 호흡을 함께 하기가 좀 힘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뭔가 자꾸만 꼬물꼬물 저를 끌어들이는 매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일단 꿈틀 꿈틀 쬐끔씩 따라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