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뭐랄까 일종의 <후기 중독증>이라는 지병이 있는지라,
국제워크샵에서는 후기의 중독에서 벗어나리라 강하게 강하게 결심 하였으나......
타니가와 간이라는 이 양반의 매력이 또 제 후기를 이끌어 냅니다. ㅠㅜ
저를 연구실에 공부하러 오게한 고추장님도 그렇고, 이진경쌤도 그렇고, 얼마전 낙동강 순례를 안내하셨던 박종관쌤도 그렇고,
2007년 독서프로젝트에서 뵈었던 아름다운 마을 청년들도 그렇고, 어처구니님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 시대 최고의 감성남 변쌤도 그렇고......(콩꺼풀이 씐지라 물의를 일으켰다면 (--)(_ _) 죄송....)
제게 매력적인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타니가와 간이라는 이양반도 제 상상속에선
(사진속의 얼굴과는 연결이 잘 되지 않으나)잘 웃는 분이실것 같습니다.
타니가와 간이 응시하고 있던 변혁의 에네르기는
<민중의 힘이 지도부가 준비한 장을 밟아 부술 정도로 분출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답니다.
그 역사적인 순간과, 그 순간을 추동하는 에네르기를 느껴 내고 스스로 그 에너르기와 하나가 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강한 에너지로 <응시>해 왔을까요?
하지만, 그런 응시만으로 변혁의 에네르기가 폭발하는 흐름이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그는 당의 <노선이나 방침에 허를 찌르는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집단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 때 당자체가 새로운 범주의 조직으로 전위하게 될거라고 말합니다.
제 얄팍한 경험으로는 현장을 흐르는 새로운 에네르기들은 <응시>되지도 <추동>되지도 못한채
가볍게 허공에 흩어져 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에네르기를 차단하는 세력은 어떤 경우 기득권 세력들이 아닙니다.
현장을 맴도는 새로운 힘들과 함께 더 큰 흐름 이루어야 할 운동의 중심 세력자체가
자신들이 정한 흐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이런 현장의 흐름을 단절하고 차단해서 흩어버립니다.
물론 고의가 아니지만, 때때로 운동의 중심(?)세력 혹은 지도부들은 적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런 역할을 맡아서 합니다.
그래서 타니가와 간에게 <응시>와 <사건을 일으키는 에네르기>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힘인가봅니다.
운동의 중심은 때때로 현장의 미미한 힘들을 낚아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 존재로부터 낚아 챈 힘들로도 현장을 흐름으로 만들어 내지를 못합니다.
타니가와 같은 그때 이런말들을 던져줍니다.
현장의 힘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갖지 못하기에 기득권의 언어로 이야기 하지만,
혁명의 흐름이 되기위해서는 <씌여진 명제가 아닌, 내재하는 명제>를 읽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존의 인식 밖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명제>,
<과제로서 인식하지 못한 과제를 가장크고 가장 명확한 의문으로 제출하는 기능>등을 이야기 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작은 예를 올려보자면, 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을 평준화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작지만 졸졸 흐르는 하나의 흐름일 수도 있을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은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흐름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타니가와 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의 주관성과 느끼는 방식을 변용시켜 그 욕망과 신념, 감응을 변이시키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저항의 장을 열어 젖힐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장을 흐르는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라는 기득권의 언어로 씌여진 명제 안에 내재하고 있는 명제.
그것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서의 대학'에 입문하는 평등한 기회>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공부나 학교 자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시도였을지도 모르지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잣대로 전국의 학생들을 서열짓고, 그 서열을 통해 대학의 관문으로 인도하는 입시제도.
그런 입시제도에 연결되어 즐겁지도 자유롭지 못한, 이상한 공부공간으로서의 학교.
그런 학교에 대한 작은 물음표이자, 하고싶은 공부를 즐겁게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를 향한 아이들과 선생들의 작은 열망말입니다.
하지만 그 운동이 어떤 이유에서건, <모든 계급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문하는 평등한 기회>의 창출로 해석되는 순간,
대학도, 중고등학교도 심지어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조차도 사회적 지위를 얻는 수단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과가 아닌 운동에서 조차 학교는 기존의 공부 공간의 성격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채 갇혀버렸습니다.
아마 제 스스로가 교육현장에서 느낀 무능력의 지점도 그곳이이었겠죠.
기존의 인식 밖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타니가와 간은 시인이었답니다.
노동을 고용의 논리에서, 부를 임금의 논리에서 떼어내 그곳에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을 열어젖히는 시인.
타니가와 간을 통해 이시대 여기 이곳에서.... 나와 우리도 그런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을 열어 젖힐수 있을까요?
우연한 기회에 마음설레이게 하는 사람을.... 봄을.... 만났습니다.
절 그분으로 인도하신 소량쌤과 하지매쌤에게 땡큐를.... ^^;;;
통닭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