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시간에 <세 가지 생태학>을 읽은 상태에서
맑스코뮤날레의 메인 분과 시간에 적(노동), 녹(생태), 보(젠더)가 어떻게 연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발표를 듣고 나니, 가타리의 문제제기가 참 빨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정신, 환경, 사회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생태학을 고찰하는 가타리의 논의와
노동, 생태, 젠더라는 상이한 운동의 연대를 고민하는 논의가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문제의식에서는 만나는 게 아닐까 싶더라구요.
물론... 노마디즘도 읽고 수유너머에서 몇 년 굴러먹으면서 안 들었던 얘기는 아니지만,
실제로 상이한 영역들에 대해서 어떻게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주체성의 생산이 개인의 생산이 아니라 특이점들의 생산되는 것이고,
그러한 특이점들이 리듬을 맞추어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혹은 이질적인 것들이 차이가 배제되지 않은 채로 하나의 일관성을 이룬다고 했을 때,
그때 말하는 리듬이나 일관성이라는 것이...
주체성의 생산되는 과정에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가 사후적으로 파악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다른 것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욕망 내지는 힘에의 의지 같은 것에 의해 생산되는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인지 궁금하더라구요.
말이 꼬였는데,
리듬 내지는 일관성이 합목적적인 방향 설정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특이점들이 공명하여 하나의 개체처럼 움직이는 것과
하나의 욕망으로 특이점들이 묶여서 개체화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햇갈리더라구요.
분명 가타리가 말하는 주체성의 생산이 특정한 방향 아래 특이점들이 모이는 것은 아닐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특이점들이 어쩌저찌하여 우발적으로 모여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구성해내는 것도 아닐 것 같은데 말이죠;;
끙...
리듬이 개체화를 일루는 특이점들의 운동과정이라고 한다면,
그 리듬이 특이점들간의 상호작용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만약 그게 아니라 그러한 리듬을 구성해내는 방향이나 욕망 등을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층위를 합목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말에 허덕이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ㅠㅠ
암튼 유기체의 층위에서 벗어난 주체성의 생산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어렵고 또 고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