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들과의 조심스런 파티
윤결작가의 “창문과 음악이 없는 파티”
최유미/수유너머104
윤결작가는 “창문과 음악이 없는 파티”에 우리를 초대했다. 그는 미국 어학원에서 만났던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과의 작은 파티를 소네마리 전시실에서 다시 벌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녀들은 디지털카메라와 결합된 사이보그적인 신체로 파티에 초대되었다. 그녀들의 팽팽한 허벅지, 임신한 배, 반지와 팔찌로 치장한 통통한 손, 아이의 수줍은 눈길이 흑백 사진으로 체현되고 식탁 가운데에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있다. 그들과의 파티를 위해선 창문도 닫고, 음악도 없어야 한다. 그들의 계율이 수놓아진 커다란 장막이 쳐지고 문에는 커튼이 달린다. 우리는 매일 저녁 그녀들의 사이보그적인 신체들과 마주하고 밥을 먹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방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 방은 히잡과 니깝 아래 아름답고 치렁한 머리카락과 화려한 구두, 그리고 반짝거리는 조명이 켜져 있다.
이슬람여성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관객들은 이미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잡이 웅변하는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이거나 아니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야만의 딱지를 붙여대는 제국주의적인 오만에 대해서다. 작가는 그것을 뚫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손쉬운 문화상대주의를 취할 수는 없다. 작가가 만난 그녀들은 닫힌 창문 밖의 저 어딘가를 갈망하고 있었고 지금, 여기의 우리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시위를 해야 하니까... 현저하게 타자인 우리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중요한 타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탈식민적인 방식, 같은 말이지만, 서로가 계승한 역사와 문화의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반려종선언』에서 다나 해러웨이는, 나이지리아에서 유럽어와 영어 병용의 초등학교 산수수업을 연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진의 수학교육과 환경정책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헬렌 베렌의 실천을 소개한다. 그녀는 각각이 계승한 이질적인 역사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책임을 다했고 동시에 지극히 가능성이 낮지만 어쨌든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 설명책임을 충실히 다했다. 현저하게 타자인 그들이 서로에게 중요한 타자가 되는 길은 손쉬운 일반화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것은 매우 섬세한 현장작업을 요구한다.
작가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벌이는 파티는 헬렌 베렌의 현장작업과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그녀들의 히잡을 벗겨버리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고, 계율이 적힌 장막과 커튼을 걷어버리지도 않았다. 그건 포도송이 눈알들이 째려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저하게 다른 자들에 대해 경의의 표현이다. 경의는 무조건 적인 환대와는 다르고 차라리 외경(畏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려움을 포함한 정중함이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상대를 소중히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녀들은 떠나버릴 것이다. 호기심을 갖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반려종의 의무이다.
복합문화공간 소네마리이기도 하지만 수유너머 104이기도한 우리들은 싫던 좋던 2주간의 파티에 초대된 셈이었다. 에어컨을 가린 장막은 방을 후덥지근하게 했고, 침침한 조명은 책을 보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들의 사이보그적인 신체를 마주하고 밥을 먹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녀들의 신체를 조금 밀치면서 내 접시의 공간을 확보해야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조심스럽게 행해졌다. 현저한 타자가 중요한 타자가 되는 것은 한번 만에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오랜기간 훈련시켜야 하지만 정해진 프로토콜 따위는 없고 성공도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파티를 통해 그녀들과 반려종이 될 수 있었을까? “이슬람여성”이라는 제국주의적인 투사를 끝내 걷어내지 못했다면 그녀들은 이미 떠나버렸을 것이다.
소네마리 내부적으로 작가와의 만남 자리가 있었습니다. 이 리뷰는 그 만남의 자리이후에 작성된 것인데요. 그때 저는 작가의 작품에 조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비판적인 내용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두가지 시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이슬람여성=여성억압이라는 시선입니다. 히집이 표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시선에 근거하면 작가는 히잡의 억압성을 어떻게든 드러내고 그것을 벗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분히 식민주의적인 시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날 그 파티에 왔던 여성들은 "억압"이라는 일반성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그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작가가 거대 담론 말고 자신이 만난 그녀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하던 말이 그것인 것 같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시선은 "이슬람 여성= 억압"이라는 식민주의적인 딱지 붙이기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너무나 많은 예술 작품들이 루틴하게, 그것을 반복해왔고 그녀들을 대상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서구인인 우리는 이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화는 그들 고유의 가치가 있는 것이니 월가왈부할 수 없다는 식의 문화 상대주의로 갈 수는 없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심각한 폭력에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그래서 혼란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항으로보이기를 바란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파티에 초대한 여성들과 반려종, 혹은 자매가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작가의 작업을 반려종끼리의 만남에 필수적인 "경의"라는 주제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