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토크
일시: 2022. 7. 26(화) pm7:30
장소: 수유너머104 (1층) 소네마리 / 온오프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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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나는 서로 섞일수 없는듯 보이는 것들을 섞는것을 즐긴다. 언듯보아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것들, 이를테면 전통과 현대, 팝과 고전, 만화와 실제, 리얼리즘과 초현실, 동양화와 서양화, 심지어 평면과 입체까지도.
이중에서 서양과 동양의관계에 중점을두어 작업하는 작품이 매화 시리즈이다. 이 작품들에는, 더 아름답게 보이기위해 사람이 인위적으로 잘라놓은 매화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그림을 통해 다시 새생명을 불어넣고 여러 아이콘을 초대하여 새로운 방식의 동양화를 만드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캠벨수프 시리즈에서는 팝아트와 리얼리즘의 관계에 집중한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그래서 텅 빈, 팝아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상표와 광고와 만화가 가득한 21세기를 기록하는 의미도 가진다.
또다른 시각조소 시리즈는 평면과 입체를 융합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사실주의의 수직적 발전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은, 사진을 평면그림으로 옮기는 포토리얼리즘과는 차별화 된, 입체를 개념적 입체로 재현하기를 시도하는, 나만의 새로운 사실주의 개념위에서 이루어진다.
서양미술 역사의 대부분은, 사진처럼이 아닌, 입체처럼 보이기위한 회화의 역사였으며. 동양화는 몇백년전의 동양화와 크게 달라지지않은채, 현대적 요소들과의 결합을 회피하고있다. 점점더 서양과 닮아가는 동양의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동양화에대한 연구와, 새로운 사실주의에대한 모색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김준식의 신사실주의: 사실에 관한 패러독스
김준식의 작품을 논할 때, 우리는 먼저 자가모순의 회의적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자가모순의 상태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한다고 하자. 우리는 동시에 두가지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하나, 그렇다, 나와 거울 속의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존재이다. 둘, 아니다,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우리는 같은 한 사람일 수 없다. 이 것이 자가모순의 상태이다. 김준식의 작품이 바로 이런 상태이며, 본문에서는 김준식의 신사실주의를 통해 사실에 관한 패러독스를 논하고자 한다.
김준식의 신사실주의는 그의 캔버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캔버스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기본 회화기술인데, 사실주의에서는 공간의 역할을 최대화시킨다. 우리가 과일그림을 보면서 정말 진짜 같다고 느끼는 것은, 화가가 만들어 낸 공간에서 정말 ‘진짜’ 같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화가가 그림 속에서 물리적 세계의 사실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두 세계의 차원의 차이점을 해결해야 한다. 플라톤은 사실과 관련하여 이상세계, 현실세계, 모방세계로 나누어 논했는데, 저서[국 가론]에 이를 침대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데아 침대는 진실되고 영원한 개념으로서 존재하며, 현실의 침대는 이데아의 침대에 대한 물리적 모방이며, 그림 속 침대는 물리적 침대에 대한 모방이다. 플라톤은 예술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에 진실과 가장 동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실주의가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하지만 그 진실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갭이 존재한다면, 사실주의는 대체 어떻게 차원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게 김준식의 신사실주의에 대한 생각이다.
김준식 작가의 초기 작품을 보면, 실제 물건과 그린 물건을 함께 한 폭의 작품 안에 배치함으로써 차원의 벽을 깨고자 했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서는 마치 붙여 넣은듯 한 그림을 통해 시각효과로써 그림 속 물건을 현실세계로 이끌어 내고자 시도한다. 보는 이들은 사실주의 회화에서 사실을 볼 수 없다고 믿는 단계에서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단계로의 발전을 거친다. 이 또한 일종의 자가모순이다. 김준식 작가의 작품은 현실세계와 모방세계에 대한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를 하나로 결합시켰다. 모방세계에서의 존재를 현실세계로 끌어들여 우리와 같은 차원과 공간에 존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합은 시각적 기만을 통한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모방세계의 작품에 속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볼 때,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봐도 여전히 그린 것이 아닌 붙여 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데, 이런 의심은 비단 작가의 기술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보는 이가 작품을 보는 첫 순간부터 자신과 같은 차원에 속한 존재라고 믿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에 관한 자가모순은 그의 작품 속 매화에서도 나타난다. 작품 속 매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끊어진 가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관련 에피소드 를 알아야 한다. 작가는 동양 고전회화 속 매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매화산에 가보니 실제 매화나무는 가지가 이리저리 얽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모양이었고, 그림과 같은 매화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나무가 자라는 동안 꾸준한 가지치기를 통해 천천히 그림 속 모양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작가는 잘려나간 가지들을 주워다가 ‘이상 속 매화’의 모양으로 이어 붙였다. 작품 속 끊어진 가지들은 현실과 모방 사이 존재하는 모순에 대한 표현이다. 예술과 현실의 관계는 과거 현대사회의 ‘생활의 예술화’에서 ‘예술의 생활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생활의 심미화’로 발전해왔으며 사실상 그 경계가 이미 모호해졌다. 사람들은 고도로 심미화되고 상품화된 생활 속에서 예술이 현실에 대한 모방인지 현실이 예술에 대한 모방인지 더 이상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실을 해석하는 사실주의에게 있어 큰 도전이 되었다. 김준식 작가는 신사실주의의 대표주자로서, 진실과 모방을 자가모순과 상호작용의 세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우리에게 생각해볼만한 수많은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너와 나, 그리고 그
우리는 김준식의 작품에서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파이더 맨, 캡틴 아메리카, 마릴린 먼로... 서양에서 온 이 손님들은 동양세계를 상징하는 매화나무에 초대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일반적인 개개인으로 존재하며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소통한다. 동양세계의 서양 캐릭터들. 이것이 바로 김준식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일까? 김준식 작가의 작품 을 논할 때 중요한 점은 경계로부터의 이탈이며, 이로써 얻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듯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대답이다. 그가 중의와 양의를 예로 든 적이 있다. “양의는 아픈 곳이 생기면 그 부분만 보지만, 중의는 전체를 보며 다른 부분을 통해 그 부분을 본다.” 이는 서로 다른 2가지 보는 방식인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양의는 기계와 방사선으로 직접 아픈 곳을 들여다보지만, 중의는 눈이 아닌 맥을 통해 진단한다. 우리는 이미 눈으로 김준식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으 니, 중의의 방법으로 다시 바라보는 것은 어떠한가. 시선을 화면의 중앙에서 바깥 쪽으로 옮겨보자.
김준식 작가의 홍매시리즈를 볼 때, 진짜라고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매화,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에서 시선을 떼면, 아래쪽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참을 들여다봐도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본문의 토론은 바로 그 텅텅 비어있는 바탕에서부터 시작하고 한 다. 그림의 빈 공간은 정말 아무 의미없는 빈 공간에 불과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왜 그냥 그저 그런 빈 공간이 아닌 걸까? 아마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답은 바로 우리가 던진 그 질문 안에 있다. 그럼 이제 ‘보인다’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다시 물어보자.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왜 빈 공간이 아닐까? 아무것도 없다라는 개념이 비었다와 같은 의미라면, 보이지 않는다도 비었다와 같은 개념인걸 까? 장 보드리야르는 17세기 말 부르주아 정치혁명의 가장 큰 영향은 이데올로기의 변화라며, ‘보이는 것’을 ‘실재’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아도르노는 시각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각성의 규범은 예술에 내포된 관념을 부정하고 시각성을 물질화함으로서 불투명하고 침투하기 어려운 특성에 근거한다.” 시각과 물질의 강한 연관성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것이 바로 실존’인 인상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시끌벅적한 홍매와 캐릭터들만 보일 뿐, 남은 빈 공간은 미스터리처럼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중의의 방법으로 전체를 보게 되면, 그 빈 공간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빈 것이 아니라면, 김준식 작가의 작품의 여백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작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동서양 요소의 결합인데, 서양회화가 동양에서 각광받기 시작할 때부터 예술과 문화의 상호 융합은 필연적 결과였다.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동서양 두 문화가 융합한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까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표면적으로는 사실 그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버려야한다. 김준식 작가의 작품은 종이에 그린 유화의 형식인데, 사용한 종이는 전통 화선지이다. 동서양 재료의 결합자체가 특별한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바로 유화와 화선지가 가진 특성이 달라 서로 부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화선지는 얇고 약해서 수정이 불가능한데, 유화는 묵직한 재질로서 계속 덧입히며 수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재의 문제점을 극복한 것일까? 김준식 작가는 화선지의 특성을 변화시켰다. 겉으로 봤을 때는 일반 화선지와 다를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화 캔버스처럼 방수이며 수정이 가능하고 잘 찢어지지도 않고 세월에 따라 좀이 쓸거나 부식하지도 않는다. 즉 성질상으로 유화 캔버스와 별반 차이가 없다. 동양문화의 형식을 따르면서, 한편으로 그 특성을 바꾸는 것, 바로 그의 작품의 여백에 담긴 의미 이다. 우리가 은은히 피어난 홍매 사이에서 펼쳐지는 문화의 향연을 감상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문화의 본질이 슬그머니 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화의 본질이라는 것이 아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양문화가 들어오기 전 동양문화 안에서도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부락 간, 민족 간의 문화적 융합과 문화적 가치관과 정치관의 세대 교체가 있었다. 동양문화는 내부 갈등과 문제의 해소를 거치면서 느리지만 강인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인도불교문화등의 경우, 중국에 들어오면서 유교 및 도교사상과 결합해 중국만의 가치체계에 편입되었다. 느리게 흐르는 시내가 오랜 시간을 거쳐 강으로 흐르고 바다에 들어가듯 문화의 융합 또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 오랜 시간이 걸렸던 문화 융합에 비해, 서양문화는 동양사회에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침투한듯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이 찬란함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결합의 시점 후에는 어떠한 길을 걷게 될까? 문화계승적인 측면에서, 가장 좋은 상황은 서양 경험을 받아들인 새로운 동양의 길을 계속해서 걷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두가지 길이 하나로 조화된 글로벌 문화의 길이 될 수도 있고, 서양 주류사상에 동양사상이 흡수되어버린 길이 될 수도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만약 동양만의 촬영기술이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피부색과 얼굴 특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동양의 풍경과 대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서양의 촬영기술은 서양인의 입체적인 얼굴 특징을 부각하기 위한 것인데,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할 때, 이 카메라가 동양미학을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았는가? 아니면 아예 윤곽이 또렷한 입체적인 얼굴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저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나는 우리가 얻은 것은 보았지만, 잃은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지각은 시각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지각이며, “심지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다”고. 만약 우리가 매화가지 사이에서 뛰어 노는 캐릭터만을 보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며 여기에 만족한다면,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저 화면에 속고 말 것이다. 김준식 작가의 작품은 단지 융합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길을 보여준다. 매화가 찬란히 피고나면 반드시 지듯, 우리는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문화적 위기에 경계심을 가져야 하고, 문화 혁신과 문화 교체의 서로 다른 방향과 현지 문화 가치관의 정립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가 생활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예술, 음악, 기술은 본디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다원화를 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포화상태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야 한다. 문화의 다원화가 최대화 되어 평균치를 이룰 때, 너와 나, 그리고 그대라는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달이 빛나는 부분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듯이, 세상 만사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김준식 작가의 활기찬 붓터치에도 그만의 무게감이 존재한다. 나는 홍매에서 기쁨과 무력함, 조화와 의구심, 찬란함과 저물어감이 공존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 그리고 당신과 나 자신을 보았다.
글쓴이/리이원 Li Yiwen
준식, 우주에까지 밀고들어간 유머
1) 영토 없는 세계, 영토 없는 집
a) 영토 없는 세계 : 허공 속에 떠 있는 오브제 마냥, 대기 속을 떠도는 대상인 양.... 하지만 모호하다. 허공인데 그림자가... 매화가지가 있든, 아무것도 없든, 뒷면에 그림자가 진다. 입체적 환경을 위해 벽이 된 허공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삭제한 표면으로서의 대지일까? 분명한 건 대지라 해도 어떤 영토성도 갖지 못한 대지이고, 허공이라 해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란 점이다. 0이 된 표면, 사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대지로서의 우주다. 평면화된 우주다. 이후 매화가지는 영토를 대신한다. 최소 중력, 최소 영토성의 영토다.
b) 역전과 순환 속의 만남들 : 이 탈영토화된 우주적 대기 속에서 영토를 만드는 것은 이질적인 세계의 만남이다. 그 만남은 많은 경우 역전과 순환의 양상을 취한다. 그림과 그리는 자, 오래된 고전 속의 인물과 부재하는 환상적 인물들이 물고 물리는 순환 속에서 만나며 하나의 역설적 세계 속으로 이질적인 세계를 불러들인다. 익살과 해학을 낳는 이 유머러스한 역전과 순환은 상이한 작품들을 하나로 묶에 해주는 작가의 영토다. 그러나 영토를 갖지 않는 기이한 영토다. 창문은 자주 등장하지만, 우주나 창공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상이한 세계, 이질적 인물이 만나는 통로다. 괴델적 불완전성의 맡물린 순환, 열린 순환계.
2) 팝은 어쩌라구: 유머의 전략과 팝의 탈영토화
a) 유머 : 팝을 찌그려뜨리려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좀더 중요한 건 유머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 하라는 걸 너무 충실히 따르며 더욱 멀리가며 발생하는 마조흐적 유머다. 유머의 유혹에 말려들어가, 유머의 에이전트가 되어, 유머에 함축된 힘을 증폭시키며 가는 것 같다. 그로써 도달하게 되는 결과는 의도가 무엇이든, 출발점이 되어주고 자원이 되어준 것들을 망가뜨리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b) 찌그러진 세계, 만들어지는 세계 : 캠벨숩 깡통을 찌그러뜨린다. 그 찌그러진 깡통 속에는 찌그러진 세계가 들어가 있다. 팝의 세계가 찌그러져 들어가 있다. 아니, 깡통을 찌그러뜨리며 팝이라 불리던 세계, 모든 것을 상폼화하는 세계가 찌그러뜨리는 것이다. 팝의 능청과 유머를 팝스런 방향으로 더 밀고 나아가면서(팝적 인물이 그리는 그림으로) 팝적 세계를 찌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팝의 성분인 미키마우스는 그 위에, 마치 그걸 밝아 찌그러뜨린 양 서 있다. 물론 미키 등 팝적 인물들은 깡통과 달리 생생하다. 원래의 만화적 인물 이상으로 힘을 갖는 생생한 입체성을 갖고 살아움직인다. 그리고 만들고 연결한다. 또한 밟는다. 이질적 세계를 연결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c) 초환영의 입체성 : 입체적 환영을 깨며 허상을 자처했던 팝의 평면성을 하이퍼리얼한 환영으로 밀고 나가는 것 또한, 그린버그 식 모더니즘을 웃어넘기며 팝이 나갔던 길을 좀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팝이 평면성 안에서 구상을 되살려냈다면, 평면성으로 경향을 거슬러 입체적 환영, 공간적 환경을 만는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간다. 상품과 산업디자인에서 끄집어낸 화려한 색채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팝의 인물들에 입체적 생생함의 힘을 부가하고 깡통의 찌그러짐에 생생함을 불어넣으며 공간적 환경을 극단화한다
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