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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텐 럴러바이" 리뷰

효영 2022.05.24 20:02 조회 수 : 155

 

 

우리를 잇는 완벽한 놀이, 실잣기

<텐 럴러바이>

김효영

 

 

1

앨리스가 만난 모자장수는 시간과 싸워서 매 순간을 6시로 산다. 6시는 티타임이므로 모자장수는 계속 티를 마신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싸우고 화내는 인물처럼 다뤄진다. 시간이 인물이라면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까? 시계만큼 정확하다는 용법을 입증하듯 칼같이 분명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가졌을까? 누구에게나 똑같이 속절없이 흘러가듯 무심하고 평등할까? 실은 그리운 것을 차마 보내지 못하는 마음을 더듬어 마술을 부리는 연금술사는 아닐까? 혹은 아름다운 것에 자주 마음을 빼앗겨 영원을 순간에 붙박는 심미주의자? 타고난 본성보다는 길러진 양육과 처한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게 우리의 성격이라면 시간도 다종한 성격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유한한 인간은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 때 무한과 유한이 대쌍을 이루듯 영원은 찰나의 대개념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산다. 입이 쩍 벌어지도록 높고 커다란 나무의 느리고 긴 호흡과 모기처럼 작은 인간의 분주하고 성마른 숨은 다르다. 그처럼 각각의 신체는 시간을 상이한 리듬으로 조율한다. 우리의 호흡과 속도가 다르듯 저마다의 시간은 다르고, 그 상이한 시간들이 모여 동조화될 때 또 다른 시간은 탄생한다.

이혜진의 <텐 럴러바이>는 상상할 수 없이 오래 계속될 시간과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가버린 시간을 교차한다. 오래된 카메라는 수천 년 동안 일어난 일들과 지극히 짧은 순간을 교차한다. 그 순간 혹은 영원을 유한한 스크린에 포착한다.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고 있었다는 반복구는 그 장면들에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각각의 사각 프레임에 담긴 피사체들은 그렇게 상이한 시간을 가리키면서도 서로 뒤엉켜 어지러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2

양파 순이 자라던 한 달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9. Balance)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보다 많아지고 나도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인의 머리가 빠르게 새어가듯 아이는 무섭게 자란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아주 잠깐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4. Shoes) 아이들의 발이 방금 벗어놓은 신발보다 점점 커졌다. 신발을 벗어버린다. 맨발로 돌아간다. 인류가 이천년이 넘게 맨발로 집을 떠나야 했던 이후로 그 때부터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2. Water, salt and bread) 우리는 서로 다른 분량의 소금과 빵과 물로 몸을 살찌웠다. 아주 작은 빵 조각과 거대한 빵 덩어리. 아이는 불평등을 평등으로 배운다. 수천 년 동안 우리가 스스로 돌보지 않았음을 고백한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5. Alchemy) 우리는 분노와 호기심과 두려움과 욕망, 절망과 자만심, 질투로 허기졌다. 곧 네가 있는 세계가 시시해지면서 바다로 걸어가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7. Liquid) 내 안의 모든 액체가 굳어갔다. 그렇게 나약하고 무례하고 고집 센 이들과 잠을 잤다.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았고 내 오래된 잠옷은 더욱 축축해졌다. 그것을 말리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8. Washing) 내 오래된 잠옷보다 짧은 나의 생이 돌아갔다. 그러니 돌아간 아버지의 영혼이 거울 속에 불려나오고, 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치 않다. 오래된 카메라를 통해 그것을 바라본 지극히 짧은 순간 어떤 일이 있었다.(#1. Willow) 그리고 이어진 긴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10. Yarn) 낯선 이들을 만나 춤추고 싸우고 헤어지고 춤추고 싸우고 헤어지고…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어 어두워질 때까지 완벽한 놀이를 했던 긴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

일상은 어떤 일들로 채워진다. 어떤 일은 눈을 감은 한 순간 일어나고, 어떤 일은 수천 년동안 일어나고 있음을 지속하며, 어떤 일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술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더 이상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신발 크기처럼 어떤 일은 쫒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들처럼 어떤 일은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되며, 절망을 멈춘 고요와 비밀을 앗아간 대기 속에서 눈을 감는 화자처럼 어떤 일은 무시간을 향해 간다.(#3. Metronome)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시간이 단일 단위로 셈해지는 시계적 시간과 다른 것임은 분명하다. 이혜진은 시간을 ‘어떤’ 일들을 전개해갈 원기(原基)처럼 다룬다. 그것은 텅 비어있지만, 그래서 상이한 리듬이 들어올 자리를 허락한다. 삶의 굴곡에 따라 변형되도록 자신을 내어놓는다. 시간이 관통하는 신체마다 각이한 형상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일거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거꾸로 시간을 살아가는 것들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수의 신체 속에서만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은 그렇게 단 하나의 대문자 시간이길 그치고 복수의 시간들이 된다.

단 하나의 실패를 중심으로 돌돌 감긴 붉은 실처럼, 시간은 한 사람의 신체에 말려들어갈 것이다. 주름진 피조물들은 저마다 실패 노릇을 하며, 시간을 제 몸 안에 말아넣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의 매듭은 헐겁고, 각이한 신체들이 만날 때 실들은 쉽게 풀려난다. 춤추고 싸우고 헤어지는 몸들과 더불어 실들은 뒤엉킨다. 돌돌 말린 실패 대신 이제 어지러운 그물망이 직조된다.(#10. Yarn) 풀려난 시간은 실패 노릇을 하던 신체를 흐트러트린다. 그렇게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만나 또 다른 시간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낯선 무엇이 되어간다.

 

 

3

새로운 신체가 생성될 때, 실패는 무엇이 될까? 실패는 더 이상 감을 수 없이 뒤엉킨 실들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Willow>는 이 낯선 시선을 구도로 표현하려는 듯 마주선 분신의 형상으로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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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하듯 일렁이는 버드나무는 서로를 바라본다. 바깥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본다. 알 수 없는 실들이 얽혀있는 저 나무쪽으로 몸을 한 번 기울여볼까? 이것은 서로를 휘감은 실들을 갖고 벌이는 또 한판의 완벽한 놀이를 예고한다.

우리, 시간으로 주름진 피조물은 이제 단 하나의 실패이길 그치고, 다른 실들에 감기고 풀려나고 얽히는 복수의 삶들이 된다. 새로운 매듭을 발명할 때마다 새로운 주름을 또 하나 얻는다. 팽팽하게 실을 당길 때마다 어제의 주름이 사라지고, 실잣기가 성공한다면 또 다른 무늬가 새겨질 것이다. 이것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매번이 새로운 시작인 기이한 놀이. 이것은 너의 실과 나의 실이 만나 우리를 잇는 완벽한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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