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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영

수유너머104 [공동체의 감각놀이: 누구나-프로젝트] 놀이 소개글

효영(20.12.15)

 

 

영원한 것은 어쨌든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의 주름 장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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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점이 수많은 직선의 교차·발산지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각도가 하나의 점 속에 내속하고 공속한다. 이때 점은 매끈한 표면을 갖는 ‘단순점’이기보다 울퉁불퉁하게 굴곡진 ‘접힌점’이 된다. 우리가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접힌점’으로부터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유사하다. 벤야민은 일종의 접힌점으로서의 역사를 상상한다. 그에게 역사란 지고한 이념의 영역에 있지 않다. 오히려 역사는 어린아이가 꼭 붙들고 있는 엄마의 치맛자락에 잡힌 주름에 자리한다. 그에게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 접힌 주름의 펼침인 동시에 펼침 가운데서도 주름잡혀 있는 것의 무한한 전개를 발견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름의 접힘과 펼침으로써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한편으로 그것은 진보사관으로서의 ‘전통적인’ 변증법과의 결별을 지시한다. 진보란 어떤 변화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러나 그 척도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무비판적 수용·실체화하는 순간, 진보이론은 비판적 역사 이론과 상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의 기존의 ‘인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진단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보 이념을 자체 내에서 무효화해온 역사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방법론적 목표 중의 하나”(N 2,2)라고 말한다. 그는 진보 이념을 기각하기로 한다. 진보와 쇠망 각각은 역사의 주름이 펼쳐진 하나의 단면들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 펼쳐진 단면 아래 어떤 주름이 다시 접혀 들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화경이 매번 다른 면들을 보여 주듯 모든 시대는 각기 상이한 의미로 자신의 단면을 펼칠 뿐이다. 때문에 진보를 서둘러 찬양할 이유가 없는 만큼 쇠망을 성급히 지탄할 이유도 없다. “‘진보’ 개념의 극복과 ‘쇠망의 시대’라는 개념의 극복은 동일한 사항의 양면일 뿐이다.”(N 2,5) 그런 연유로 벤야민은 주름의 한 단면으로서의 현상이 악평에 시달리는 것만큼, 순전한 찬양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것을 막고자 한다. “현상들이 악평을 ‘얻거나’ 경시되는 상태로부터 구원해내야 하지만” 동시에 “‘유산으로 찬양되는’ 것으로 대변되는 파국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실증사관으로서의 ‘사실’로 점철된 역사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일이다. ‘사실’의 기록은 매끄럽고 연속적이며 완고하다. 이를 테면 “한쪽에는 어떤 시대의 ‘결실’이 많고, ‘미래를 내포한’ ‘생동감 넘치는’ ‘적극적인’ 부분이 놓이며, 다른 한쪽에는 쓸데없고, 낡은, 쇠퇴해가는 부분”이 놓인다.”(N 1a, 3) 특정한 양식과 관습이 작동한 결과 출현한 이 선명한 분할은 역사를 완결된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그 시대의 역동적인 전개양상을 박제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의 박제화가 “내심으로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려는” 것인 동시에 “역사의 진행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계기들을 은폐시키려고 하는 것”(N 9a, 5)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처럼 “‘실제 있던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는 이 세기의 가장 강력한 마취제”(N 3, 4)로서 이 시대에 향유된다. 바로 그러한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대항하고자 벤야민은 “시대를 물화된 ‘역사의 연속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역사 유물론”의 방식을 택한다. 역사란 언제나 매끈하게 연속선상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만큼, 그에 대한 고찰 역시 균질한 토대에서 진행될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를 관통하는 균질적 이념을 제안하기보다 옷주름과 같은 울퉁불퉁한 물질에 달라붙길 요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에게 “영원한 것은 어쨌든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의 주름 장식이다.”(B 3,7)

이런 맥락에서 벤야민에게 역사 고찰이란 연속성이 파괴된 지점에 서서, 물질로부터 각각의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감각하고 재조합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역사유물론은 한편으로 “시대의 균질성을 폭파”(N 9a, 6)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과 섬광처럼 한순간에 만나 하나의 성좌를 만드는 것”(N 2a, 3)이다. 그로써 그의 작업은 역사 속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성좌를 그려내는 일이 된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 복원’ 작업의 기저에는 어떤 시대에도 ‘쇠망의 시대’라고 폐기되어 마땅한 역사란 없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쇠망의 시대 같은 것은 없다.” 이에 기반해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복원된 것이 멜랑콜리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17세기였다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재조명되는 것은 19세기 파리다.

1822년 이후 15년 동안 만들어진 백화점의 전신인 아케이드라는 기묘한 공간. 그를 둘러싼 19세기의 삶, 즉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모든 삶(따라서 19세기에 벌어지는 모든 삶)”(N 1a, 6)이 그의 소재가 된다. ‘모든 삶’이란 결코 과장이 아닌데, 벤야민이 취하는 대단히 광범위한 소재들-아케이드라는 신유행품점의 구조, 그를 지탱하는 철골이라 는 건축자재부터 박람회, 백화점, 광고, 매춘, 사진, 자동기계, 패션, 도박, 증권 거래소, 권태, 무위, 코뮌에 이르기까지-이 ‘모든’의 범위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일종의 ‘문화사적 변증법’을 시도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신생아였을 무렵, 상품은 아케이드라는 공간 속에서 역사의 한 단면을 구성한다. 현기증이 일도록 급속한 발전을 이룬 기술과 더불어 자본주의는 “꿈을 수반한 새로운 잠”(K 1a, 9)으로서 유럽을 뒤덮는다. “감각적인 동시에 초감각적인, 거꾸로 서서 머리로부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상품이 도시를 유혹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잠에 빠져든다. 19세기 파리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꿨을까?

이 작업은 순전한 과거의 복구라기보다 과거를 현재와 어떻게 관계 맺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벤야민은 “과거의 한 단편을 현재의 현실성과 관계”(N 7,7) 맺게 하고 나아가 과거가 현재에 “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것”(N 2,2)을 원한다. 그처럼 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과거가 현재와 충돌을 벌일 때, 과거는 어느 새 현재를 삼켜버린다.(N 7a, 3) 그런 점에서 역사란 미완결을 완결된 것으로, 완결된 것을 미완결된 것으로 바꿀 수 있다.(N 8,1) 이로써 우리는 벤야민의 역사유물론이 정향하는 지점은 과거의 구원 자체이기보다 그를 통한 현재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작업을 지탱해주는 파토스 : 쇠망의 시대 같은 것은 없다.” (벤야민, N 1,6)

“우리에게는 현재를 경멸할 권리가 없다.”

(보들레드, ‘The Salon of 1846: On the Heroism of Moder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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