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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은

숨겨진 기억, 기적 같은 얼굴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하늘로 돌아간 아버지의 얼굴. 꿈에서라도 얼굴을 보고 싶지만 모르는 얼굴을 어떻게 찾을까. 70세 아이가 아버지를 그리며 한 말이란다.그날의 기억을 온전하게 갖지 못한 70의 아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70년 전 12살이었던 한 여자아이는 “아아, 그때 나는 열두 살 / 동박굴 트멍으로 / 어멍 시체 찾으러 갈 때 / 가마니 짚에 말아 / 얼기설기 토롱해서 / 남의 밭에 묻고 / 불타는 집 / 고팡 가득한 곡식 보며 / 저건 꺼내서 무엇 하나 / 어멍도 죽고 / 나도 오늘 낼 죽을 목숨”(양성자, 「열두 살」)이라고 82세가 되어 그날을 그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부적이 되었다.

 

  「섬의 얼굴」이라는 초상화 기획 전시가 ‘소네마리’에서 있었다. 제주 큰굿에서 4.3 유족들의 얼굴을 기록하던 서울내기 박선영 화가 중심으로 마이클 에반스(Michael Evans), 김준환, 박종호 씨 등이 유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했다. 네 벽을 차지한 전시 작품들은 개성들이 넘쳤다. 4.3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그들은 유족들의 사진을 통해 그때의 기억을 불러오는 주술사가 되었다.

 

  외국인인 마이클은 유족들의 얼굴에서 개성을 느끼지 못해 운동복에서 감정을 끄집어냈고, 한국화가인 김준환은 한지 위에서 안료가 번지거나 맺히면서 형상을 흐리거나 형성하는 방법을 통해 유족의 초상 너머의 모습을 표현해보려 했다. ‘잃어버린 마을’ 드로잉 시리즈를 작품화했던 박종호는 4.3 당시 불에 타 사라진 마을을 표현할 때 목탄을 재료로 했듯 유족의 초상화도 목탄 속에서 아름답게 슬픈 감정이 도드라졌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기획자 박선영의 작품은 수채화의 투명함으로 말할 수 없는 세월을 담아냈는데, 밝고 경쾌한 팝아트의 느낌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이는 주술사들의 손놀림은 결코 슬픔으로만 전달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로 경쾌하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만들어냈다.

 

  애니메이션 「메모리즈」에서 등장인물 ‘타쿠’는 “옛날,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을 때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비밀을 속삭인 뒤 흙으로 막아버렸다. 그러면 비밀은 영원히 감추어졌다.”라고 독백한다. 되살아나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구멍 속에 파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써 잊으려 하면 그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다시 그 고통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의도적 망각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저 깊숙이 감추어 둘 뿐 언젠가는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화가 박선영은 4.3유족들의 사진을 찍고 초상화를 그리면서 ‘기적 같은 얼굴’을 발견했다고 했다. 학살의 비극, 가난의 굴레, 타인들의 불편한 시선들 속에서도 짓이겨지지 않은 기적과 같은 생을 살아온 얼굴. 무고하게 희생된 4.3의 원혼들이 길러낸 기적 같은 얼굴이 사진 속에, 그림 속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삶은 지속되며,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왜곡된 기억은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어느 유족이 남긴 “잊지 않고 명심해영 잘 살크매, 거기서 편히 쉬십서.”라는 말이 떠오른다.

 


열두 살

 -어머니 82세 생일에 부쳐

양성자

 

그 때 나는 열두 살,

열다섯 만 되었다면

덜 무서울텐데

아아, 그 때 나는 열두 살

‘동박굴 트멍’으로

어멍 시체 찾으러 갈 때

가마니짚에 말아

얼기설기 토롱해서

남의 밭에 묻고

불타는 집

고팡 가득한 곡식보며

저건 꺼내서 무엇하나

어멍도 죽고

나도 오늘 낼 죽을 목숨

빈 집 무서워

외숙모 집 구석방에

밥먹을 때면

어멍숟가락, 언니숟가락 걸쳐놓고

밥숟가락 놀리다가

아이고, 우리 도새기 굶겠구나

통시(* 돼지기르는 변소)로 달려가면

꿀꿀꿀 반기며 엉겨오는 도새기

너는 어떻게 살래?

나는 어떻게 살꼬?

도새기랑 말하면 덜 외로와

빈집도 빈 마당도

덜 무서워

바다같이 넓은 밭

목청좋은 어머니

보리검질 맬 때면

남보다 앞서 나가

어랑어랑 사대소리

보리타작 끝나면

외삼촌들이 부르는

얼럴러 좁씨밟는소리

물 좋은 도두리

히야시 같은 물

대바지 허벅에 길어와

마당에 보리낭 넉넉히 깔고

톳냉국에 보리밥 펼쳐노면

아이구 착허다 내 딸 착허다

그때 들었던 어머니 칭찬이

팔십 년 사는 밑천이 되어

세상천지 다 돌면서 봐도

나만큼 전생궃은 이 있을까

좋은 전생 가리던 날에

어머닌 어디 갔다 왔나요

어멍에게 날 가라고 하면

가시덤불도 맨발로 새 날듯 가련만

어멍, 나 시집 못 살겠어요

아기업고 혼잣말 하면

어디선가 어머니 음성

‘설운 내 작은 년아....’

밑에서 샘이 올라오듯

탁탁 의견이 올라오고

귀인을 보내주고

열두 해 부모 인연

여든 두 해, 오늘까지 살아뵈고

그때 나는 열 두 살

열다섯 만 되었으면

어멍가는 길 고운 옷 입게 하고

삼춘들 성가시게 안하고

집 탈 때 세간도 꺼내고

물 그리듯 그리운 어머니 옷가지

삼단같은 머리채 담은 고리짝

타는 집 뛰어들어

바리바리 꺼냈을 걸

무자년 추운 겨울

1948년 음력 12월

그때 나는 열두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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