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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토스케치] 레비나스의 은폐된 진실, 시오니즘

박준영 2014.04.24 07:15 조회 수 : 56

 

 

레비나스의 은폐된 진실, 시오니즘

- 현진, <레비나스의 스피노자 비판을 통해 본 타자성의 윤리의 의의와 한계>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이번 주 화요토론회에서는 조현진 선생님을 모시고 스피노자와 레비나스,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숨어 있는 시오니즘의 함의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보통 레비나스라고 하면 타자성’, ‘얼굴과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무언가 종교적이고 숭고한 윤리학을 전개하는 철학자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이번 화요 토론회에서는 이러한 레비나스에 대한 선입견을 일정 정도, 사람들에 따라서는 확연히,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조현진 선생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사유를 가다듬어 보자.(아래부터는 조현진 선생의 발표 녹취를 정리, 요약 한 것이다. 화요토론회 발표를 흔쾌히 승낙해 주신 조현진 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 레비나스는 타자성의 철학을

전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상 이 철학은 유대교 철학을 배경에 깔고 있지요. 그래서 이러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사실 어떤 철학의 동기가 선하다는 것으로 인해 그것의 정당성, 현실적합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경우에 특히 중요합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하여 혹독한 반유대주의를 직접 체험한 철학자입니다. 이 반유대주의의 경험이 레비나스로 하여금 타자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역설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타자의 중요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일단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윤리적 형이상학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란, 나와 완전히다른 존재, 달리 말해 절대적 타자와의 만남을 다룬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윤리적이란 그러한 만남이 타자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레비나스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비판하면서 그것이 전체주의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또는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적 이기주의를 함축한다고 보지요. 그것에 대한 근거를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전개합니다.

 

첫째로 레비나스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타자를 거부하는 개념이지요. 앞서 말한 레비나스의 윤리적 형이상학에 따르면 이는 심각한 결함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레비나스는 스피노자의 지성과 의지의 동일성테제를 비판하는데요, 여기서 잠깐 스피노자의 이 테제를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스피노자 당대의 전통에서는 지성의 능력(파악)과 의지의 능력(파악한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분리합니다. 특히 데카르트는 오류의 근원으로 의지가 지성에 앞서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긍정하는 것을 듭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인식은 늘 아는 것만큼 긍정하고, 긍정하는 것만큼 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지성과 의지의 동일성 논제지요.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 논제가 인간의 비이성적 부분, 예컨대 정서나 욕망을 배제하는 인간관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타자의 얼굴을 볼 때 호소와 외침을 듣는데, 이때 주체에게 생겨나는 것이 형이상학적 욕망이고, 이것은 바로 정서적인 관계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이 논제에서는 그러한 정서적 관계를 찾아 볼 수 없고, 이는 곧 마비된 인간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레비나스 비판의 요지입니다.

 

셋째로, 레비나스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장에서 유대 예언자들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특히 스피노자는 해당 부분에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하는데요, 기독교야말로 신법(神法)을 따르는 종교라는 것이지요.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격분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레비나스는 스피노자를 직접적으로 배신자라고 낙인 찍습니다(스피노자의 재판).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레비나스의 주요저서가 아니라 이런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소논문들을 살펴 보면, 그가 단지 타자성의 철학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레비나스가 스피노자의 이런 유대교 비판에 대해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한다고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레비나스는 스피노자가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하고, 주변화했다고 비판합니다. 나아가 스피노자가 근대적인 세속화 과정에서 종교를 국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다고 합니다. (코헨의 논문에서 이러한 레비나스의 스피노자 비판 노선을 알 수 있습니다.)

 

3. 레비나스의 스피노자 비판에 대한 재비판으로 넘어 가기 전에 우선 레비나스에서의 자기보존 욕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레비나스는 자기보존 욕구를 사리사욕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욕구를 어떤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이때 가 세계와 마주하여 서는 것입니다. 이때 는 동일성과 내면성을 가져야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머물게 되면 모든 개인들이 서로를 도구적으로, 즉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이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존욕구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은 그것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의 극복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형이상학적 욕망이라는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이제 재비판을 해 보지요. 우선 레비나스는 홉스의 코나투스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홉스에게 생명의 목적은 단순한 혈액순환이지요. 즉 생명운동의 유지와 재생산이 그것입니다. 이때 욕망은 이를 돕습니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생명운동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살기 위해선 뭐든지 하는 것이 홉스의 코나투스인 것이지요. 이는 실천적으로 심리적 이기주의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목적인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라는 것, 생명이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에게 생명은, 또는 존재가 개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운동과 정지의 패턴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목적이 아니지요. 예컨대 심장의 박동이나 눈깜박임, 또는 장기의 운동 같은 것이 바로 이러한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정치론에서는 정신적인 면도 긍정하지요. 즉 그는 동물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부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개체성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정신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이기주의일수도 이타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이 홉스와 다른 지점이지요. 즉 반드시 삶이 이기주의로 귀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스피노자로부터 배웁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홉스적 인간은 이기적으로 비춰지겠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적 인간은 구조상 이기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인간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적인 인간을 이기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그리고 레비나스는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단서가 스피노자와 홉스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합니다. 스피노자의 경우 인간은 칭찬받기 위해 태어났고, 이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지요. 이는 감정의 모방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같은 부류의 인간들끼리 칭찬받는 것을 상상함으로써 기뻐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이기적이고, 지배하려는 계산이 없습니다. 반면 홉스에게서 인간이란 이를 통해 남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늘 숨기고 있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스피노자와 홉스에게 어떤 야망이 존재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홉스에게 이는 권력지향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보존욕구가 타자를 지배수단으로 삼는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스피노자가 아니라, 홉스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레비나스의 가장 심각한 혼동지점은 이것입니다.

 

6. 다음 재비판은 정서에 관한 것인데요, 사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정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에티카만 하더라도, 3, 4부가 정서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어쩌면 스피노자를 헤겔적으로 해석하는 당시의 학문적 관행을 레비나스가 스피노자 고유의 것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고 보입니다. 즉 목적론적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역사의 발전과 정신의 발전을 결합해서 통합적인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헤겔적인 것이라면, 스피노자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하긴 그 당시에는 브롱슈비크를 비롯한 관념론적 스피노자 해석이 주를 이루었지요.

 

7. 유대교, 기독교, 국가권력에 대한 레비나스의 스피노자 비판도 오류가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반()종교적입니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으며, 스피노자에게 종교적 복종은 노예적 상태를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즉 니체와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긍정적인 대상입니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 문제라는 지평에서 논의를 전개하자면, 당시의 칼뱅의 신정, 공화파와 항상 대립했던 왕당파와 밀접한 이 칼뱅과의 대결 속에서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스피노자에게 정치와 종교는 상호의존하는 것입니다. 예언적 정신에 충실한 통치는 오히려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신정(神政)’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신정에 대한 평가에서 시민적 기능이 거기 있을 때에는 순기능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역기능, 즉 국가를 파괴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레비나스의 스피노자 비판은 (역사적 맥락을 간과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이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이 실천적으로 어떤 패착을 드러내는지 보겠습니다. 레비나스의 인터뷰를 먼저 보도록 하지요.

 

 

 

로몽 말카: 엠마누엘 레비나스씨, 당신은 타자의 철학자입니다. 역사와 정치는 타자와의 만남의 장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인에게 타자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인이 아닌가요?

 

레비나스: 저의 타자의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타자는 이웃이고, 이러한 이웃은 반드시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당신이 타자에 대해 있다면, 당신은 이웃에 대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웃이 또 다른 이웃을 공격해서 그를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이때 타자성은 또 다른 성격을 나타냅니다. 타자성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적을 발견하거나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아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Levinas, “Ethics and Politics”, 294)

 

 

여기서 레비나스는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할만큼 동문서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가 주장하던 것과 달리, 타자를 일률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2자 관계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단 하나의 최초 도착자만 존재하는 세계에 살지 않는다. 세계 안에는 항상 제 3 자가 존재한다. 그나 그녀는 또한 나의 타자이자 나의 이웃이다. 그리하여 그 둘 중 어느 것에 우선권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 비교불가능한 인간존재들이 비교되어서는 안 되는가? .... 그러나 정의가 출현하고 나서 제차 판단과 비교를 요구하는 것은 항상 얼굴로부터,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부터이다(Levinas 2001, Is it Riteous to be, 166).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인의 타인, 타인의 타인의 타인이라는 식으로 나아가는 타자의 윤리가 실천적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게 되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정의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는 적으로서의 타자와 동지로서의 타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으며, 회피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의 타자가 어둠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적으로서의 타자와 다른 타자를 구분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이 가진 결정적인 공백이며, 이로 인해 그는 실천적으로도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질의-답변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가 쟁점이었다. 하나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타자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주체의 선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즉 주체의 설립이 타자와의 관계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강력해진 주체성의 철학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코나투스의 위상과 관련하여 그것이 반목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의 패턴이라는 논지가 더 설명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레비나스, 이 두 철학의 산맥을 접속시키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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