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화요일에 있었던 <화요토론회> 후기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토론회의 제목은 “아버지 제가 불타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 : <꿈의 해석>에 대한 라캉의 오마쥬였고,
김현석 선생님께서 발표해주셨습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7장에 소개되는 흥미로운 꿈의 사례 하나를 가지고
현석샘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이 꿈에 대해 프로이트와 라캉은 각각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화요토론회 사회를 맡아 주신 최진석 선생님,
"오늘 화토는 토요인의 맛뵈기로 신청 안 하신 분들은 오늘 강의 듣고 신청할 수도 있고
신청하신 분들은 뺄 수도 있고...", 화요토론회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을 해주셨습니다.)
이 꿈 사례가 담고 있는 생각은,
9년 전 현석샘께서 라캉과 프로이트를 처음 접하셨을 때 큰 충격을 주었던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만나시기 전부터도 개인적으로 오래 고민하신 주제라고 하시네요.
이날 참고한 책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7장과 라캉의 <세미나 11>이었습니다.
현석샘은 이 책들을 제일 좋아하고 또 많이 읽고 계십니다.
(화요토론회 발표자이신 김현석 선생님입니다.
토론회 시작하기 전에 멋진 포즈로 사진 한 컷 부탁드렸습니다.
왼손을 주머니에 걸친 채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감동적'이군요.)
이 꿈은 <꿈의 해석> 7장의 서론에서 소개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죠.
어떤 아버지가 있다. 아들이 병에 걸려서 병간호를 했는데 결국 아이가 죽었다.
아들 시신이 있는 방 앞에 있는 방에 가서 잠시 쉰다. 그리고 시신은 어떤 나이든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꿈을 꾸었다. 꿈에 아들이 나타난다. 아빠의 팔을 잡고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불타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 그래서 잠에서 깨서 시신이 있는 옆방에 가보니까 진짜 불이 나서 아들의 옷에 옮겨 붙었다.
프로이트는 세 가지 해석을 내놓습니다.
첫째, 외부의 자극에 대한 꿈의 반응.
밝은 불빛이 문을 통해 새어나와 잠자는 아버지의 눈에 자극을 줍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이 불빛을 보고 아들 시신이 있는 방에 불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교과서적인 해석이고 프로이트 역시 <꿈의 해석>에서 많이 시도했던 방식이죠.
둘째, 소원성취.
프로이트는 꿈의 본질을 소원성취로서 정의 내립니다.
이 꿈 역시 죽은 아들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소망이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죠.
셋째, 편의(便宜)꿈.
꿈은 형상화 작업을 통해 우리의 잠을 더 자게 만들어 줍니다.
예컨대, 목이 말라 물을 마셔야 한다면, 꿈속에서 물 마시는 장면을 만들어 잠을 더 잘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참으로 ‘매끄러운’ 해석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해석될 리는 없겠죠?
프로이트도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뭔가 해석될 여지가 더 남아 있을 거라고 찜찜해 합니다.
(독일어 원문에 보면) 아들은 ‘비난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속삭입니다.’ “안 보여?”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이 나직하게 속삭이듯이. 섬뜩한 광경이죠. 앞의 세 가지 해석은 이 섬뜩함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를 라캉은 아버지의 죄악을 단죄하는 아들의 목소리라고 해석합니다.
현석샘은 좀 과격하게 해석하십니다.
‘내가 몰래 즐기는 건 그렇게 잘 찾으면서 이렇게 불에 타서 죽는 거는 못 봐?’
‘당신 소원대로 내가 불에 타서 죽으니까 좋냐?’
물론 현석샘이 평소 이런 생각을 하신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화요토론회의 전체 풍경을 담은 사진입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죠?
특히 우측 하단의 진경샘께서 스마트폰 가지고 '실패의 반복'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라캉은 아들의 말이 사실은 프로이트의 말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가족의 반대에도 아버지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렀는데, 그 후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반영된 꿈을 꾸었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고 소망해서 돌아가신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 말이지요.
이렇게 그는 자기 분석을 통해 결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중요한 발견을 대놓고 주장하지는 못하였죠.
‘너만 그래!’라고 욕 들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욕이란 욕은 다 듣고 살았던 인물이라 굉장히 조심했던 거죠.
어쨌든 <꿈의 해석> 7장에 와서 프로이트는 망설입니다.
수많은 꿈을 탁!탁! 해석해내는 이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가 해석하지 못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표상이나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증자 프로이트는 그런 흉터, 구멍, 간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해석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거세 콤플렉스를 동원하여 그 구멍을 메우려고 하고,
기억할 수 없는 무의식의 원-장면을 ‘재구성’하여 그 간극을 채우려고 하죠.
무의식의 정체를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이 강렬한 프로이트의 신경증적 욕망이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는 프로이트의 욕망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욕망을 드러내고 다시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놓을 필요가 있겠죠.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의 네 가지 개념으로 새로운 토대를 놓겠다는 것이 라캉의 기획이었다고 하네요.
이들 중 ‘반복’을 논의하는 곳에서 불 타는 아들의 꿈이 나옵니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이전의 자기 관점을 비판합니다.
더 이상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어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구조의 반복’에서 이제 ‘실패의 반복’으로 이행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꿈속에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직접 보려 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도피한 것이죠.
꿈이 소원성취라면, 꿈이 쾌락원칙에 지배되는 영역이라면,
바로 그 성취와 원칙이 실패하는 어떤 요소가 무의식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 곧 ‘실재’라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실재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실재와의 만남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죠.
실패의 반복.
이 실재는 ‘대상 a’로도 불립니다.
원래는 나와 한 몸이었지만, 어떤 이유로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이제는 나에게 영원히 상실된 대상이 되어버린 어떤 것.
우리는 그 영원한 상실을 메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구멍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죠.
실패의 반복.
프로이트가 이러한 구멍, 결핍, 실패를 오이디푸스와 거세로 열심히 채워 넣으려고 했다면,
라캉은 실재와 ‘대상 a’로써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사진 속에는 '대상 a'가 숨겨져 있습니다. 같이 찾아보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 될 듯해요.)
<세미나 11>은 ‘실재’에 관하여 라캉이 처음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럼 현석샘의 광고 들어갑니다.)
“<세미나 11>은 정말 좋은 책이에요. 그러나 혼자 읽기는 굉장히 어려운 책이죠.
2달 뒤에 <라캉 번역하며 읽기> 세미나를 할 텐데, 거기서 이 책을 읽을 거에요. 꼭 참석해 주시고요.
근데 이 책을 읽으려면 프로이트를 알아야 해요.
4월 23일부터 <프로이트 토요인문학>을 하는데, 토요인 강의를 들어야 라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캉을 이해하면 사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중략)
정말 좋은 책입니다. 이거 안 읽으면 후회하십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바라고, 토요인문학 강의도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토요인의 반장을 맡으신 재림님도, <프로이트 토요인문학>을 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거들어 주셨죠.
하나 유익하다. 둘 친절하다. 셋 재미있다.
첫째, 인간의 심리와 정신분석학에 호기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유익한 시간이 될 겁니다.
둘째, 강의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강의안을 챙겨드리는 친절함이 있습니다.
셋째, 현석샘은 어려운 내용도 재미있고 알기 쉽게 풀어내시는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이번 토요인문학의 미래를 책임져주실 반장님입니다. 유익하고 친절하고 재미있는 모습이네요.)
아무쪼록,
이번 주 토요일 4월 22일부터 시작하는
[토요인문학] 시즌 2-1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위한 10개의 기본 개념'에
많은 성원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