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특강 :: 화요토론, 시민강좌, 심포지움 게시판입니다!


화요토론회는 수유너머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이나 외부의 연구자 혹은 활동가를 초청하여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하는 시간입니다. [화요토론회 스케치]에서는 화요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의 논지를 간략히 요약하는 한편, 발표자와 토론자의 사유가 겹치고 분기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실어 나르겠습니다. 

-코너 소개-



들뢰즈는 왜 수학을 공부했을까?

- 김충한, <알베르 로트망의 수리 철학에 대한 고찰>

 

 

 

 

의현/ 수유너머N 회원

 

 

 

 

3월 11일. 이 날은 (내가 알기로는) 화요 토론회 사상 처음 있는 수학에 관한 글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로트망이라는 이름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어본 이가 아니라면 매우 생소할 것이다. 알베르 로트망(Albert Lautman)은 20세기 프랑스의 수리철학자이다. 수학자도 아니라 수리철학자라니, 대체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의 관심사는 수식을 풀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실제적인 수학활동이 아니라, 수학의 "형이상학"을 만드는 일이었다. 즉, 로트망은 각양각색의 수학활동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을 그려내고 싶어 했던 사람인 것이다. 그의 이론은 동시대의 수학자 힐베르트로부터 출발한다. 

 

 

 

 

 

 

점, 선, 면이 아니라 테이블, 의자, 맥주잔?

 

힐베르트는 수학자였지만, 로트망처럼 수학의 토대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당시 수학계에서는 몇가지 개념들이 말썽을 일으켜서 "정말 수학이 확실하고 완전한 학문인가?"에 대한 질문이 다시 던져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움직임은 몇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있었는데, 그 중 힐베르트가 만들어 낸 것이 "형식주의"이다. 먼저 그는 "하나의 특정한 수학 체계 내에서 그 체계의 완전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수학적 논리주의의 입장에 반대한다. 대신 "M-공리계"라 불리는 하나의 체계를 상정하는데, 이 체계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체계가 도출될 수 있는 절대적 체계라고 정의된다. 

 

모든 수학이론들의 토대로서 그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렇기에 그들의 완전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수학들 위로 솓아난 하나의 수학, 메타-수학이다. 이로 인해 각각의 체계와 기호에 담긴 의미들은 모두 지워진다. 기호의 의미조차 지워진다고? 수학의 체계와 기호라는 것도 애초에 정말 "확실"하고 "중요"한 것만을 남기기 위해 현실에서의 현상이나 이미지들로부터 추상해낸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이들의 확실성조차 의심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제각각인 수학적 대상들 모두를 보증해 줄 수 있는 메타 수학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한번의 추상이 더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제는 더 "확실"한 것, 그 "형식"들만이 고려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이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 보자. 형식들만이 고려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수학적 대상들, 예를 들어 점, 선, 면과 같이 우리에겐 그 의미가 너무나 자명하게 들어오는 개념들조차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가지는 의미는, 그 개념이 어떤 공리체계에 들어가게 되느냐에 따라서 정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통 점, 선, 면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의미들은 단지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유일한 기하학인 유클리드 체계 안 에서만 통하는 얘기라는 것이다. 즉 각각의 개념들은 자기 특유의 "형식"만 유지한다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무궁무진하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저들을 구지 점,선,면이라고 불러야 할 필요는 없다. 힐베르트는 이것을 테이블, 의자, 맥주잔으로 바꿔불렀고, 들뢰즈는 테이블, 쟁반, 둥근잔이라고 바꿔불렀다. 당신은 뭐라고 부르고 싶은가? 막회, 딸기, 소주 뚜껑?

 

 

수학에도 이데아가 존재할까?

 

로트망은 형식주의의 구도를 끌어오되, 그로부터 몇가지 변형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탄생시킨다. 이 두 이론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메타 수학"에 대한 위치 설정에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힐베르트의 메타수학은 다른 수학들보다 상위의 차원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부터 출발해 두 번의 추상작용을 거쳐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로트망의 메타수학은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찾아 낼 수 없다. 즉, 수학적 이론들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트망의 메타수학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여기서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플라톤이다. 로트망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빌려와서 자신의 메타 수학에 ‘변증론의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하지만 그가 "이데아"를 사용했던 방식은 통상적인 해석인 어떤 "불변의 실체"는 아닌 듯 하다. 로트망은 자신의 메타수학이 힐베르트의 M-공리계처럼 하나의 완성된 체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변증론"은 "정-반-합"으로 표상되는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이는 개념은 오히려 그리스 고대 철학에서 발견되는 것에 더 가까운데, 당시 변증론이란 어떤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답하는 일련의 과정을 뜻했다. 이 과정은 헤겔의 경우처럼 "합"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물음과 대답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또 다른 물음으로 계속 이어져 나간다. 자, 그럼 이를 토대로 "변증론의 이데아"라는 표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변증론의 이데아" 또한 하나의 "이데아" 이기에, 실질적인 수학이론들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또 다른 체계의 형태나 고정된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수학활동에서의 문제제기들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변증론적" 과정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구조들, 단편적인 "스키마"들을 포착하는 것 뿐이다. 

 

 

"수학의 형이상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옆의 그림은 토론문1에서 발췌한 것인데, 로트망의 이론을 도식화한 것이다. 이 도식에 대해서는 토론회 도중 두 가지 수정이 가해졌는데, 첫 번째는 ‘변증론의 이데아’라는 개념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 도식 전체가 뒤집어 져야 한다는 점이다. 로트망에게 있어서 각각의 수학이론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은 현상이 아니라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수정은 도식 오른편에 그려진 ‘스키마 의존적 재설정’이라고 쓰여있는 화살표를 삭제해야한다는 점이다. 문제가 제기되고 해답이 제시되는 과정들을 통해 ‘변증론의 이데아’가 드러난다고 해서, 그 포착된 구조가 다시 새로운 문제가 만들어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이데아는 잠재적인 차원에 존재하며, 문제에서 문제로 이어지는 일종의 ‘선험적 지향성’ 같은 것을 형성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구조를 포착해 낸다고 해서 실질적인 수학 활동에 이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포착된 스키마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로부터 로트망이 설정한 수학과 철학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로트망은 철학자들이 수학에서의 ‘변증론적 이데아’의 스키마를 포착해서 철학 이론으로 구축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철학이론으로부터 실질적 수학활동으로의 영향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앞서 본 "스키마 의존적 재설정"이 불가능한 이유와 같다.

 

그럼 실질적으로 "변증론의 이데아"로 부터 구성된 철학 이론은 무엇이 있을까? 발표자가 푸리에 급수를 통해 국소적인 것과 전역적인 것의 독특한 관계 설정의 예를 들며 제시한 인물은 "들뢰즈"이다. 실제로 들뢰즈의 책 <차이와 반복>에서는 로트망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수학의 이데아가 어떻게 철학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차이와 반복>을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

 

 

 

 

☞ 발표문 및 토론문 보기

 

0311_발표문_김충한.hwp

0311_토론문1_단감.hwp

0311_토론문2_문한샘.hwp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2 [21회 화요토론] 성폭력 ‘피해자다움’ 강요와 2차 피해에 맞서기 file lectureteam 2018.09.05 518
101 [8월 열린강좌] 8월 26일 일요일 19시, <프루스트와 감각의 예술> 강사: 권용선 (무료) [3] 꽁꽁이 2018.08.15 1924
100 [20회 화요토론] 학병과 국가 (김건우) file lectureteam 2018.08.15 1370
99 [19회 화요토론] 영화는 타자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 - 김경묵감독 작품상영회 lectureteam 2018.08.03 974
98 [18회 화요토론] 유엔 인권 그리고 우리의 삶 (안윤교 UN인권관) file vizario 2018.07.13 1033
97 [17회 화요토론] 한국에서 한국의 SF하기 (이지용) file lectureteam 2018.07.05 772
96 [16회 화요토론] “나는 왜 이렇게 못 쓰는가?” -(권여선) file lectureteam 2018.06.14 1449
95 [15회 화요토론] 아름다운 현존의 순간적인 삶―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송승환) file lectureteam 2018.06.05 731
94 [14회 화요토론]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5] file lectureteam 2018.04.30 1467
93 [13회 화요토론] "위장취업자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의 문제의식으로 한국지엠 사태를 바라본다 file lectureteam 2018.04.14 1310
92 [12회 화요토론] 인도주의 활동에서의 도덕적 딜레마 file lectureteam 2018.04.05 2202
91 [2018심포지움] 비트코인과 공동체: 후기 file lectureteam 2018.04.03 608
90 [2018심포지움] 비트코인과 공동체 file lectureteam 2018.03.23 2200
89 [2월 열린강좌]당신이 지젝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레닌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 2월 22일 목요일 저녁7시 | 무료강연 | 강사 최진석 file lectureteam 2018.02.08 2378
88 [11회 화요토론] 혐오발언 대 대항발언 (유민석) file vizario 2018.02.06 964
87 [1월 열린강좌] 증언자와 기록자, 함께 말하다-시베리아 일본군 내 조선인 포로 이야기 I 1월 20일(토) 저녁 7시 무료강연 I 강사 문용식과 심아정 file 큰콩쥐 2018.01.15 2170
86 [10회 화요토론] 주체화의 문제설정 (김현경) file vizario 2018.01.01 1019
85 [9회 화요토론] 예술노동 논쟁은 무엇을 놓쳤나? (오경미) file vizario 2017.11.29 673
84 [9회 화요토론] 예술노동 논쟁은 무엇을 놓쳤나? 발표자: 오경미선생님, 12월 12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참가비 없음 file vizario 2017.11.29 612
83 [12월 공개강좌]다나 해러웨이와 함께 생각하기 - 최유미 | 12월 2일 토요일 오후 7시 00분 | 참가비 무료 [1] lectureteam 2017.11.25 139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