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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인권들에 대하여

- 정정훈,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화요토론회 토론문

 

 



박기형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왕의 법이 금지한 오빠의 매장을 그 법보다 더 상위에 있다고 믿는 법에 호소하여 끝까지 요구하였던 안티고네의 고집.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하면서 현실을 지배하는 법들보다 더 근본적인 법적 정의의 실현을 호소하였던 그녀의 집요한 고집.......한국 인권운동의 고투가 보여주는 바가 바로 안티고네적 집요함이 아닐까?”(p.280~281)

인권과 인권들.......

 

 

1.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권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그리고 익숙한 단어이다. “인권을 보장하라.”, “인권침해가 아니냐?” 등등. 그런데 왜 다시금 인권의 의미를 물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최소한의 권리가 위협 받는 난민들부터 안락한 삶이라는 허상 아래에서 끊임없는 불안정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마땅한 권리들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마땅한 권리들은 허공에 뜬 구름과 같이 추상적이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인권만능주의. 이는 인권의 무의미성에 다름 아니다. 인권은 이미 모든 곳에 있지만, 또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것이 오늘날 인권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인권의 위기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식화한다. 첫째, 신자유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사회적 배제의 일상화. 둘째, 신자유주의적 경쟁 사회가 심화됨에 따른 인권에 대한 대중적 감수성, 즉 공감능력의 쇠퇴. 마지막으로 인권담론의 이론적 위기. 구체적으로 말해 인권담론이 다양한 형태로 분화·심화됨에 따라 오히려 그 효과가 약화되는 것과 더불어 인권이 보편적이게 됨으로써 어느 누구든 인권을 전유하게 되는 사태. 나아가 기존의 인권담론에 대한 비판과 인권담론 자체에 대한 거부.


인간이 아닌 좀비가 되는 삶, 생명이 절대화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조건이 앞의 두 가지 원인에 따른 것이라면, 마지막에 언급한 인권담론의 이론적 위기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인권담론을 점차로 약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한마디로 저자는 인권과 인권들의 논의를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투쟁과 저항에 지속적인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며, 이를 위해 인권담론의 이론적 위기에서 인권을 건져내어 정당한 이념, 정치의 원점으로 승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인권운동에 힘을 부여하는 또 다른 작업을 수행한다. 기존의 인권개념은 근대적 인간관을 따르는 바,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개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인권개념이 아닌 스피노자주의적 인권개념을 통해 연대성의 원리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적 보편성이 아닌 관개인적 권리로서의 인권 개념을 통해 인권운동에 연대의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권과 인권들은 인권운동에 정당성과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한 두 가지의 작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저항담론과 같이 인권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인권이라는 개념과 인권운동을 해방의 정치의 원점으로서 설정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적 인권담론이 설정하는 개인주의적·소유권적 인권 개념이 갖는 한계를 넘어 관개인적 인권 개념으로 전환함으로써 인권운동의 연대성과 보편성을 확립하는 작업 말이다. 그러나 두 작업들이 외따로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관개체적 인권 개념에 바탕을 둘 때에야 비로소 정치의 원점으로서의 인권 개념에 바탕을 둔 인권 운동은 자신의 역량을 연대를 통해 획득 및 확대 해 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제 감히 인권과 인권들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 두 가지로 구분한 작업들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첫 번째 작업은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인권의 도덕화야말로 인권의 불온성을 잠식하여 인권을 무력한 것으로 만드는 담론적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이 도덕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정치적 권력관계의 문제를 삭제하는 효과를 가진다. 나는 오늘날 인권의 정치에 요구되는 중요한 과제 중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권을 탈도덕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p.68)

 

인권의 정치성을 복원하는 작업.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인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크와 페인이 논쟁을 벌였던 문제적 사건인 프랑스 혁명으로 말이다. 프랑스 혁명의 통념을 바로잡는 과정을 통해 인권의 기원을 검토함으로써 저자는 인권은 처음부터 해방적 이상으로서 정치적, 구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실천 속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요컨대, 인권은 기원에서부터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개념이었지만, 규범적 이념이 됨에 따라 도덕화 되었고, 그로 인해 인권은 정치적 투쟁 과정의 산물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탈각된 채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금 정치적 성격을 복원시키기 위해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논의를 경유하며, 마지막 순서로 데리다를 불러냄으로써 영속적인 혁명의 계기, 즉 끊임없는 해방과 저항의 출발점으로서 인권의 정치성을 복귀시킨다. 이는 인권과 인권들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문자 인권(HUMAN RIGHT)와 소문자 인권(human rights)의 관계라는 도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말 인권은 정치적이기만 한가? 인권의 도덕성은 제거 가능한 요소인가? 인권의 정치성과 도덕성은 양자택일의 대상인가? 오히려 인권의 본질은 정치성과 도덕성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결정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안티고네적 집요함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크레온: 네가 감히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 그러나 제우스 신이 그 을 내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의의 신은 그런 을 사람이 사는 세상에 강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확고한 하늘의 법이 있다고 믿 습니다. 비록 그것이 글로 쓰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안티고네.......

 

안티고네적 집요함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크레온이 정한 법이 아닌 제우스 신 또는 정의의 신이 정한 법, 확고한 하늘의 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안티고네의 저 대답은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긴장관계, “인권은 주어지는 것이냐, 구성되는 것이냐?”라는 전통적인 인권 담론의 문제를 정확히 보여준다. 신이나 하늘에서 부여하는 또는 인간의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자연권으로서 인권을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투쟁이나 시민들 간의 상호합의 속에서 형성되는 구성적 권리로서 인권을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 그 자체에서부터 이미 제기되고 있다.(이는 right權利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길준과 니시 아마네가 보였던 이해의 차이에서도 확인 가능하다.[각주:1]) 인권에서의 ‘right"는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권리, 다른 하나는 정당한 것 또는 올바른 것. 결국 안티고네의 집요함과 ’right‘의 양의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의 정치성과 도덕성의 관계는 양자택일이라기보다는 상호긴장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3.


여기서 우리는 앞서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저 도식에서 벗어나 어느 하나만을 온전히 승인할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저자는 여전히 이념으로서의 인권이 갖는 규범성과 도덕성은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맞다. 하지만 그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저자가 수행하는 인권의 탈도덕화 작업은 인권만능주의에 따라 인권이 도덕으로서만 이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더욱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주체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도덕으로 이해하고 전유하는 사태에 대해 비판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저자가 인권의 정치성을 복원시킨다는 의미는 도덕성의 삭제가 아니라 인권만능주의, 인권의 도덕화, 인권이 오용되는 사태에 맞서 인권의 규범성을 정치적 맥락 속에 다시금 위치 짓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저자의 해결방식이 기존의 인권담론과 어떤 점에서 의미를 갖는지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5장과 6장의 관계. 이를 어떻게 설정해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한편으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인권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한국의 인권운동사를 검토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인권이 얼마나 정치적인 저항과 투쟁 속에 녹아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민주화 투쟁, 노동권 투쟁,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인권운동사는 그 자체로 인권의 정치성을 보여주지 않는가?


다른 한편으로 사회계약론자와 같은 근대의 인권사상가들뿐만 아니라 롤즈와 같은 현대의 자유주의 인권사상가들에서도 인권의 정치성을 긍정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양자 모두 인권을 자연법 또는 자연권으로 파악하고는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법적 제도화의 과정을 논의하는 과정을 정치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욱이 현대의 자유주의 인권담론은 인권의 경계를 넓혀가는 과정 속에서 로크적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사회경제적 권리 개념을 수용하는 등 인권의 정치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이들 또한 인권의 정치성과 도덕성 사이의 긴장,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권과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인권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하는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인권과 인권들이라는 도식, 즉 이념으로서의 인권과 현행화 되는 인권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는 방식과 유사한 형태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혹자의 의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수행한 정치성의 복원 작업, 구체적으로 말해 발리바르와 랑시에르 그리고 데리다를 거침으로써 도출하는 대문자 인권과 소문자 인권의 관계와 이를 통해 복원해낸 인권의 정치성이 갖는 의미가 이전의 논의들에서 말하는 바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가 중요한 지점이지 않을까?


 


5.


아마도 혹자의 이러한 의문은 저자가 인권을 위기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수행한 비판 작업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인권이라는 단어,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기존의 저항담론들로부터 인권을 구출하는 작업. 이것이 바로 3장과 4장을 통해 수행되고 있다. 인권을 부르주아지의 권리로 치부해버리는 맑스. 인권을 시민권으로 등치시켜 이해함으로써 인권과 시민권의 관계를 근대 국민 국가 속에서 한정지어버리는 아렌트. 주권론과 생명관리정치논의를 통해 주권국가가 보장하는 인권은 결국 호모 사케르에게만 귀속되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아감벤. 저자는 인권을 탈동물화(재인간화)하기 위한 권리로 설정함으로써, 생명유지를 위한 권리가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권리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인권을 구해내고 있다.


그러나 저항담론 속에서 인권을 정치의 원점으로 복원시켰다고 해서, 인권의 정치성이 기존에 인권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전통에서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바로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과 해방의 기제로서 인권의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인권을 구출하는 것을 넘어 인권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해서는 저항담론 밖에서 인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과 대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에서도 인권의 정치적 성격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인권운동 사이의 연대를 가능케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의 문제점과 한계를 논하지 않고서는 앞서 제기한 물음, 해방의 정치를 위한 인권 개념으로 저자가 내놓은,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그리고 데리다를 경유해서 풀어낸 저 답이 과연 어떤 차이점을 갖는가? 그리고 왜 그러한 답이 정당한가?”라는 의문에 충분히 답하기 어렵지 않을까?

 

 

6.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는 저자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인권 논의들에서도 인권의 정치성을 이야기하고 있잖아라는 식의 비판이 아니라 인권의 정치성을 이야기하더라도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라는 식의 의문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인권과 인권들에서 복원한 인권의 정치성이 다른 논의들과 갖는 차별성은 두 번째 작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5장과 6장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관개인적 권리와 양태의 권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두 번째 작업은 인권 개념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종래의 인권개념은 경제적인 소유권에만 기반 하거나,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로 작동하거나, 인간중심주의에 머무르거나, 인권 자체가 자기보존만을 위한 삶의 의미로 쓰여서 무의한 것으로 치부되는 등 한계를 보였다.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인권의 주체, 즉 인간의 권리에서 권리의 주체로 규정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는 이러한 한계에 맞서 인권의 개념을 재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기존의 인권담론들에서는 제3세대 인권, 지구적 인권또는 다문화 인권이나 집단 인지적 인권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인권 정의를 통해 인권을 단순히 국가가 보장하는 영토적 시민권에 국한시키거나 인권운동 하나하나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물론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인권담론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가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권리는 부여받지 못했으므로 인간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식의 논의를 통해 이른바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를 확립하고자 노력해왔다.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확대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을 승인함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연대의 가능성을 인권 자체의 개념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했고, 여전히 휴머니즘적 인간관에 머무름으로써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권리 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설정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관개인적 인간관을 통한 인권 개념 논의는 인권운동 사이의 연대를 인권 개념 그 자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이 단순히 인간의 권리에 국한되지 않고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와 같은 문제까지도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다시 말해, 저자는 인권이 단순히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히 인간에게 주어지거나 귀속된다는 식의 소유의 의미, 정적인 개념에서 벗어난다. 대신 한 인간이 다른 인간 또는 집단 및 사회와 그리고 인간이 다른 개체들 나아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자신의 인권이 형성·확대·보장되는 식의 역량의 의미, 동적인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요컨대, 역량으로서의 권리. 하지만 양태의 한계 내에서 갖는 인간의 권리. 오직 타인과의 연합의 관계를 구축함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는 권리. 그러나 그렇기에 정치적 실천 속에서 어떤 개체와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 역량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갖는 권리. 그것이 바로 인권과 인권들에서 재정식화 한 정치의 원점으로서의 인권 개념이다.

 

 

7.


맑스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부르주아지의 권리라고 쳐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철폐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해방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인권을 중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맑스주의적 전통 속에서 등한시 되었던 인권이라는 단어 그 자체.


하지만 인권이라는 고유명사를 붙들고 처절한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수사보다도 인권이라는 단어, 인간이라면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라는 명제가 중요한 버팀목이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저항의 주체들에게 인권을 정당한 어떤 것으로 되돌려주기 위한, 기존의 저항담론 속에서 인권운동을 정당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 그 산물인 인권과 인권들은 그 누구보다도 엄혹한 현실 속에서 한국인권운동이 벌이고 있는 고투에 절실하게 응답하고자 한다.


어떤 휘말림에 대한 기록이지만, 휘말림은 저자에게 강력하고도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해방과 변혁을 위한 정치철학 속에서 어떻게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에게 제기한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 이 대답이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주체화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기를.





  1. 『인권의 정치사상』. 「제10장 서구 ‘권리’ 관념의 수용과 변용: 유길준과 니시 아마네의 비교」. 김봉진. 2010. 이학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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