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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토론회를 다녀와서





허민/인문학협동조합


 



 수유너머N에서 열린 이진경 선생님의 신작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꾸리에, 2015)의 서평회에 다녀왔습니다저는 이 날 처음으로 수유너머N에 방문해 보았습니다.기대만큼 흥미진진한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그럼 생각 나는대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행사는 지정 토론자 세 분이 신작에 대한 각자의 감상을 발표하고, 저자에게 궁금한 내용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토론자들 질문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심아정 (수유너머N 회원) : 정치라는 것은 고유한 장소를 가진다기보다는"정해진 자리""거기서 이탈하는 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모든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나 정치투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작은 운동들도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그러한 소규모의 운동들을 고유하게 볼 것이 아니라, 외려 "반복될 수 있는 특이성"으로서 사유해 내는 것일게다. 결국 국가로 귀속되지 않는 정치의 가능성이 중요할 텐데, 이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감각의 혁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10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비실재 청소년"에 대한 움직임은 주목을 요한다. 도교도에서는 만화에 등장하는 청소년 캐릭터를 규제하려 했는데, 이는 실제로 피해자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비실재 청소년"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고, 이는 표현의 자유 혹은 공교육의 문제까지 가닿는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엔 어떤 난점이 있다. 이 사례처럼, 비실재청소년의 권리를 주장한 측이 정부일 경우, 우리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한 주체가 정부나 국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감각을 변혁시킨 주체가 국가나 정부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 고혁주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 이진경 선생님은 이번 저서에서 자신이 그 동안 주장해왔던 코뮨주의를 "멩거의 스펀지"에 비유했다. 그가 말하는 코뮨은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만들어 내야 할 "외부"임을 드러냄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구멍을 내자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구멍이 무수히 많아진다면, 자본주의 입체의 체적은 0에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스폰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본주의의 입체가 스폰지처럼 된다해도, 바로 그러한 상태로나마 자본주의는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에서 발생하는 비자본주의적인 구멍이 어떻게 유의미할 수 있겠는가

 

3. 한영인 (인문학협동조합) : 일단 신작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와 이진경의 대결이라니. 하지만 이러한 서사전략이 얼마나 유효했는지는 의문이다. 가령 "정치적 예술""예술에서의 정치"를 구분하는 저자의 사유를 살펴보자. 이진경 선생님은 (맑스의 입을 빌려) "정치적 예술""정치를 주제로 한 예술"로 정의하는데, 이럴 경우 자연히 정치적 선언문, 삐라, 정치포스터가 가장 예술적인 작품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는 진정으로 중요한 건 예술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포착하고 정의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구도 안에서라면, "예술 자체"에 대한 어떤 상이 전제되어버려, 선언문과 삐라 등은 손쉬운 정치적 예술성으로 폄훼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삐라가 삐라일 뿐이라도, 그것은 아주 특정한 국면에서 예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국면이란 정치적 혁명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삐라나 선언문이 "본질적으로" 예술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삐라나 선전문이 예술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저자의 말처럼 대중이 흐름이라면 예술도 흐름아닌가. 이진경 선생님은 1980년대 혹은 그 시대로 대표되는 레닌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해 너무 쉽게 미학적 모더니즘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에 대한 이진경 선생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진경: 우선 (심아정 선생의 질문은) 난감한 질문이다. "비실재 청소년"의 사례는 처음 들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최근 한국시(와 그것과 상통되는 이론)의 두 경향이 떠올랐다. 한편에서는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려는 시도가 있다. (진은영과 랑시에르?) 다른 한편에서는 부재하는 것의 존재를 사유하려는 시도가 있다. (김경주나 라캉?) 비실재 청소년의 경우는 부재하는 것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부재의 장소로부터 새로운 감각의 거점이 형성되고, 현실정치에서의 중요한 의제까지 제시되었다. 이처럼 감각의 혁명이 중요하다. 감각은 언제나 이성에 앞서기 때문이다. 스폰지의 비유도 그렇다. 자본주의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이 망상으로 간주되는 시대이다. 흔히 오래된 맑스주의에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다음에 온다고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다음이다. 이처럼 공산주의는 그저 유예된 가능성일 뿐이어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가능한 공산주의적 삶과 감각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체를 폐기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바로 그 내부로부터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킬 계기를 만들면 된다. 그런 계기에선 결국 감각이 중요하다. 공산주의의 구멍을 만들고, 대중에게 그 특이점을 노출시켜야 한다. 대중은 군중과 달라 감각이 마비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흐름이다. 그 흐름의 방향성을 공산주의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감각의 혁명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문제도 중요하다. 식민지기때처럼 그저 정치적인 내용을 다룬다고 해서 그 작품을 고평해줄 순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수기의 예술성을 인정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적 예술은 그외의 다른 어떤 예술도 허용할 수 없기에 예술을 억압한다. 가령 러시아 혁명은 예술방면에 있어서는 반동에 가까웠다. 그들은 피카소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감각의 혁명을 야기하는 예술. 물론 그것의 효과가 대중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기 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전위는 원래 당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전위아닌가. 자본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의 구멍을 뚫고 감각을 변혁시키야 한다. 예술 자체의 정치성을 사유해낸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이후 추가적으로 계속 전개되는 질문과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1)예술의 혁명이 현실 정치에서의 혁명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아울러 정치혁명 없는 감각혁명이 가능한지, 혹은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혁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2)예술가들에 의해 가능해진 감각의 혁명이 대중적인 차원으로 확장되는 가능성도 의문이지만, 실제 사례는 외려 그 반대가 더 많은 것은 아닌지, 또한 이러한 발상이 함의하고 있는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3)감각의 혁명이란 논의틀 자체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진경 선생님은 1) 실제 정치혁명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구체적인 삶의 변화는 정치적인 방면보다는 감각적인 측면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에서의 변혁과 실제 대응되는 정치변혁의 사례를 찾는 방식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것. 이 둘은 따로가면서도 언젠가 합치되는 순간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 다만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에 내기를 걸 필요가 있으며, 실제 사례들도 많다. 2) 그런 의미에서 예술로부터 가능한 감각의 혁명이 엘리트주의 아니냐를 규명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엘리트주의면 어떤가? 변화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3)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수용가능한 변혁만을, 다시 말해 돈이되는 것들만 허용하기에 그것은 감각의 혁명 모두를 포섭할 수 없다. 체게바라가 티셔츠로 프린트 된다 해도 그가 자본주의자가 되진 않는다. 자본주의자들은 혁명이 돈이 된다면, 그것을 감내할 것이다. 위의 질문 자체가 몇몇 사례에 한정된 결과론에 치우쳐 제기된 것 아닌가 한다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서, 특히 이진경 선생님의 답변은 많은 것들이 빠졌을테지만, 그래도 중요한 논점은 되도록 정리하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토론이어서 후기 작성도 나름 재미나는군요. 개인사정으로 행사가 끝난뒤 뒷풀이에 참석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후기를 좀 상세히 적는다고 적어봤습니다덧붙여 사실 이번 토론회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분위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진지할 땐 진지하고, 재미날 땐 재미나더군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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