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2014년 9월 23일 화요토론회 발표자 유일환 회원의
‘칸트의 『판단력비판』의 제 1편 59절의
<윤리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에 대하여>에 대한 정합적 해석’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정합적인 것의 안정감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그러니까 수유너머N이 ‘영덕막회’ 건물 2층에서 ‘엉터리생고기’ 건물 4층으로 이사를 하고 열흘이 지난 뒤, 새로운 공간에서의 첫 화요토론회가 열렸다. 아직 이삿짐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가스도 설치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연구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나날이 치솟는 연희동의 월세 때문에 평수를 줄여 급하게 이사온 차에 반듯한 삶을 살았던 칸트의 글을 정합적으로, 이가 안 맞는 것들을 조신하게 맞추며 읽겠다는 유일환 회원의 발표는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마침 전날인 월요일에는 <인문사회과학원>의 강좌 ‘감성의 계보’에서 고봉준 선생님과 함께 『판단력비판』의 서론을 읽었던 터라 많은 수강생들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아직 읽지 않은 59절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 있었다. 책의 처음만 읽고 책의 결론 부분을 더듬어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토론회의 사회자를 맡았던 나는 발표문의 난해함에 경악했다. 나도 이 책의 첫 부분을 수업에서 읽었지만 발표문의 서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스케치를 그리기 위해 칸트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그 까닭에 ‘화토스케치’는 한 달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눈앞에 있는 것의 윤곽을 거칠게 그리는 스케치치고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나는 칸트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글을 스케치하기 위한 연필 조차 가지지 못했었다. 칸트의 책 제 1편을 대강이나마 읽어본 지금에서야 스케치할 용기를 내게 되었다.
미적인 것은 자율적이다!
수유너머N에서 ‘칸트 미학 세미나’를 이끈 경험이 있고 대학원에서도 칸트를 전공하는 유일환 회원의 발표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판단력비판』의 여러 곳에서 칸트는 미와 윤리성을 서로 연관시킨다. 특히 제 1편의 59절 <윤리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에 대하여>는 특히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취미판단은 무관심적이고, 일체의 목적과 무관하므로 윤리성으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었던 윤리성은 관심과 결합되어 있고, 의지(Will)의 대상이며, 윤리적 판단은 목적을 전제하므로 미와 윤리성은 서로 상이한 성격을 지녔다. 윤리성은 좋은 삶이라는 목적을 전제하고 그 좋은 것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기에 우리는 윤리성을 의지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아름다운 대상을 갈구하지 않고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순간적으로 ‘아름답다!’고 판단한다.
결국 각자의 성격상 미와 윤리성은 직접 연결될 수 없으므로 칸트는 ‘상징’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둘을 간접적으로 결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상징은 어떻게 매개 역할을 할까? 상징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있게 만든다. 윤리성 역시 보고 만질 수 없는 ‘이성이념’이다. 시인은 상징을 통해 그 이성이념을 구체적인 사물들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시인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가로 막혀 있음’을 ‘보랏빛 베일’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세계가 현상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논리는 ‘보랏빛 베일’이 이곳과 저곳을 가로막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보랏빛 베일 역시 무언가를 아스라히 보여주기는 하지만 분명히 두 공간을 가로막고 있다. 이렇게 상징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감각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윤리성에서 문제가 되는 관심과 의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윤리성의 논리적 구조가 상징이 존재하는 방식과 유사하면 아름다움은 발생할 수 있다.
러시아 상징주의 화가 미하일 브루벨의 <라일락>(1900, 유화)
그런데 문제는 칸트가 이러한 윤리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와 취미판단의 연역을 종합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적인 것은 윤리적으로-좋은[선한] 것의 상징이며, 그리고 또한 (…) 이러한 관점에서만 미적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요구함과 함께 적의한(gefallen, 마음에 드는) 것이다.”(59절) ‘취미판단의 연역’이란 내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게 정당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낳는 것은 바로 “그리고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만”이라는 말이다. 크로포드(Donald. W. Crawford)라는 칸트 연구자는 “미적인 것이 윤리적으로-좋은 것을 상징한다는 점 때문에, 취미의 흡족이 (의무로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미적인 것은 윤리성을 띠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편, 앨리슨(Henry. E. Allison)은 “순수한 취미판단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를 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미적인 것이 윤리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크로포드와 다르게, 그는 취미판단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요구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니기 때문에 미적인 것은 추가적으로 윤리성을 덧입지 않아도 된다. 미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59절의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고 두 연구자들의 입장들을 검토한 뒤, 앨리슨의 해석이 더욱 정합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발표자가 크로포드의 해석을 비판하는 지점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취미의 연역에 필요한 공통감 자체가 윤리적 당위와 유사하다는 점을 크로포드가 간과했다는 데 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의 40절에서 ‘감정의 순전한 보편적 전달가능성’, 즉 공통감이 취미판단에 요구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 공통감은 ‘보편적’ 전달가능성이라는 성격 때문에 윤리적 당위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취미판단에서 작용하는 공통감 역시 윤리성과 연결될 수 있다. 취미판단은 그 자체만의 활동을 통해 윤리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 발표자에 따르면, 앨리슨은 칸트의 비판철학을 체계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미적인 것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칸트는 서론에서 『판단력비판』은 이론철학(『순수이성비판』)과 실천철학(『실천이성비판』)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지성(이론철학)이 자연의 인과법칙을 따지는 일을 관장한다면, 이성(실천철학)은 자유의 영역을 다룬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매개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무언가, 즉 판단력이 필요하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따지는 일을 넘어 자유와 의지의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이 어떠어떠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크로포드는 취미판단에 윤리적인 것을 섞어야만 유용하다고 본 반면, 앨리슨은 취미판단 그 자체의 작용만으로도 인간 사회의 실천을 위한 무언가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정합 이후...
유일환 회원의 발표는 여기서 마무리 되었다. 스케치를 위해 발표문을 여러 차례 읽은 나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당시 청중들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칸트의 심오한 철학, 그리고 대표적인 칸트 연구자들의 갑론을박을 목도한 청중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했고 약간은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이 얕게 깔린 피로감을 뚫고 인사원 수강생들은 전날 읽은 서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질문들을 내놓았다. 주로 낯선 개념들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어떤 회원은 발표자가 정합적 해석으로 앨리슨의 의견을 채택하고 글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청중들 대부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질문이었다. 발표자는 차차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사회자였던 나도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칸트의 철학을 일단 제쳐두었을 때, 발표자는 미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과 어떤 관계를 맺기 바랍니까? 발표자가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믜쉬킨 공작처럼 “미가 세상을 구원하리라.”라고 외쳤더라면 어땠을까? 게임을 하며 발표내용을 따라 듣던 어떤 회원은 발표자에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고전의 해석은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현대의 발달한 인지과학,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전이 내놓는 결론은 비과학적이다, 고전은 그 당시에 할 수 있었던 사고의 첨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발표자 유일환 회원은 칸트 비판철학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그가 남겨놓은 애매한 구절들을 최대한 정합적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두 연구자들이 벌이는 해석의 결투를 묘사하여 칸트 미학 연구의 지형도를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서로 반대되는 두 해석들이 실제 예술과 윤리의 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들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면 어떨까? 또, 역사 속에서 두 입장이 발현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미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이 되어야 소통될 수 있다는 입장과 미적인 것 그 자체가 이미 소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은 각각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인지과학을 알면 더욱 좋겠지만, 일단 칸트에 대한 두 해석으로부터 생생한 상황들을 꾸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