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토스케치]
들뢰즈의 타자론을 위하여
-문한샘, <들뢰즈의 타자론 연구 : 기호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화요토론회
하얀/수유너머N 회원
타자란 무엇일까. 타자는 나 아닌 다른 대상들을 말하는 것일까?
후기 구조주의 이후 타자는 동일성의 철학을 깨기 위한 핵심 개념이 되었다.
타자란 무엇일까.
플라톤에게 타자란 원본을 끊임없이 모방하는 것이거나 원본이 아닌 시뮬라크르들일 것이다. 초월적 이데아와 원본을 중시했던 플라톤이라면 당연한 귀결이다. 동일성을 중시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흐름에서 타자는 플라톤의 설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와 달리 계보학적 연구를 했던 푸코에게 타자란 오히려 동일자 혹은 정상인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에피스테메의 담지자다. 들뢰즈의 타자론은 플라톤이 아닌 푸코적 사유 방식과 가까이 있다.
타자가 철학사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그것이 플라톤 이래로 이데아의 동일성을 비껴가거나 해체하는 위협적인 생성 자체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세계해석의 토대로 확고하게 작동한 것도 이러한 철학사적 맥락의 확증과정이 사전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이 철학사적 주류 흐름의 저변에 생성하는 반동일성을 포착한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타자성 또는 구조의 빈칸이다.
들뢰즈의 타자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점은 들뢰즈에게 타자는 주체의 대당이 아니고 그 모두를 종합하는 (물론 이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다.) 사건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있어 타자론은 기호해석일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건의 철학에 잇닿아 있는 셈이다. 화요토론회에서 발표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타자론을 기호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점검하려 시도한다.
들뢰즈 철학에서의 타자
들뢰즈의 타자론을 정리하기 위해 발표자가 점검하고 있는 텍스트는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이다. 여기서 ‘타자’는 직접적으로 ‘인격적인 타인’이 아니라 그것(chose)로 지칭되며, ‘선험적 구조’라고 밝혀진다. 다시 말해 타자는 주체와 타인을 가능하게 하는 ‘타인-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구조적으로 어떤 ‘가능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가능세계는 타자 안에서 표현되며, 또는 표현되지 않는 여분을 남긴다.
그런데 여기서 발표자는 독특한 주장을 한다. 즉 들뢰즈의 타자론 ‘기획’이 타자-구조의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타자-구조의 붕괴를 통해 해방되는 ‘원소들’은 (들뢰즈의 논문에서는 ‘위협’과 ‘공포’로 경험되는데) 곧 사유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발표자가 다루는 ‘타자’는 곧 ‘동일자’에 다름 아니다. 즉 “타자의 구조는 곧 동일자의 구조”인 것이다. 깜짝 놀랄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발표자는 곧장 ‘사유의 해방이라는 기획’으로 넘어간다. 여기서는 더 이상 타자론이 아니라 기호론이라고 불릴 법한 사항이 전개된다. 논지의 방향은 ‘기호해독’이야말로 ‘타자-구조’라는 동일성의 마지막 편린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발표자는 들뢰즈의 프루스트 연구를 빌려 온다. 여기서 예술의 기호, 즉 진실이 표현되는 그 기호해독은 사랑의 기호가 가지는 부박함을 초월하면서 사유를 진정 해방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이 해방의 결과 생성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이제 ‘차이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발표자는 올바르게도 들뢰즈가 겨냥한 본질과 진실이 차이 자체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면서 논문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기호해독 외에 다른 사유의 길이 있는지도 타진한다.
들뢰즈는 <미셀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에서 이를 주목한다.
남은 문제들
발표자는 들뢰즈의 타자론에서 시작하여 철학의 기획인 ‘사유의 해방’까지 논의를 확장한다. 하지만 이는 최종목적이라기 보다 언제나 좌절하거나 실패하면서 단련되는 ‘배움’(apprentissage)의 과정이지 않은가. 기호해독이라는 것도 사실상 이 배움의 과정이라고 들뢰즈는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도 주체의 주체성도 아니며, 그것이 구성되는 역동적인 사건의 세계에 놓여야 한다. 사실상 들뢰즈에게 ‘문제’는 곧 사건이며, 사건은 ‘의미’다. 주체성과 타자성, 또는 동일성과 타자라는 구분은 사건 이후에 또는 그와 더불어 구성되는 것이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발표자의 “타자의 구조는 곧 동일자의 구조”라는 주장은 파격적인 만큼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거리를 남겨둔다. 그것은 ‘구조’라는 측면에서 맞아 떨어지지만, 타자든 동일자든 사건의 차원에서는 그보다 더 생각해야할 어떤 여분을 남기는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가 본질을 진실이라고 보고, 예술의 기호를 해독함으로써 그것에 다가가는 과정은 그래서 어떤 지성적인 과정만으로 수렴될 수 없다.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통해 드러내려고 한 것은 잠재적인 차원에서 들끓는 사건들, 곧 동일자와 타자라는 ‘분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 시뮬라크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셀이 알베르틴의 죽음을 통해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그 수백의 알베르틴에 대한 신체적 각인(기억)들은 그런 시뮬라크르들의 신체적 효과다. 중요한 것은 이런 효과들이 마르셀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동일자의 구조 안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경계가 이미 무화된 정황을 직관하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는 사건 안에서 해석되며, 그것은 본질을 표현하지만, 다만 본질의 흔적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혹시 사건을 통해 동일자와 타자 그 너머를 향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