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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토스케치] 아감벤의 유효성을 찾아서

전성현 2014.07.16 09:46 조회 수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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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의 유효성을 찾아서

-김상운, <랑시에르와의 "교전"을 통해 본 아감벤의 "한국적" 유효성 모색>, 화요토론회




전성현/수유너머N 회원




   언제부터인가 곳곳의 강연, 이러저러한 책 등에서 아감벤의 개념들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외상태’, ‘벌거벗은 생명’, ‘무위’ 등은 그의 책을 읽지 않았어도 한번쯤은 들어본 개념이 되었다.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니 아감벤의 책을 읽지 않아도 그의 개념들이 대강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우리는 아감벤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 익숙함은 한국의 독자들이 아감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특히 아감벤의 개념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이는 그의 이론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만이 아감벤의 이론이 유효성을 가질 것이며, 그에 대한 제대로된 비판적 거리 형성 역시 가능할 것이다. <랑시에르와의 "교전"을 통해 본 아감벤의 "한국적" 유효성 모색>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김상운의 포인트는 바로 이점이었다.

   발표자가 진단하기에 국내에서 아감벤에 대한 담론은 다소 편향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감벤에 대한 담론 중 일부가, 그의 저작에 대한 직접적 대면이 아닌 다른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형성되었다는 점으로부터 기인한다. 발표자가 이러한 담론의 형성에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는 이는 자크 랑시에르이다. 랑시에르가 아감벤의 ‘정치’에 대한 논의를 분석하며 가한 비판과 이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감벤에 대한 오독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이러한 오독을 교정하기 위해 아감벤의 저작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수행한다.

 

 

분할과 배제를 넘어서

   발표자가 교정하고자 하는 주요 지점은 “순수 정치의 영역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가진 “전도된 아렌트”가 아감벤이라는 비판이다. 아감벤은 그의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벌거벗은 생명’의 산출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흔히 “포함적 배제(ex-ceptio)”라고 불리는 이 메커니즘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다른 개체와 자신을 분할하고 거기에 위계를 부여해 착취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과정으로 설명되곤 한다. 이러한 포함적 배제의 적절한 예가 고대 그리스 시절의 폴리스(polis)와 오이코스(oikos) 사이의 분할이다. 폴리스는 정치적 시민의 영역으로 그곳은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들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좋은 삶(eu zen)"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의 삶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필요를 해결해주는 여성과 외국인 및 노예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시민들의 놀이터인 폴리스는 오이코스를 담당하는 하위계급을 착취함으로써만 지탱할 수 있었고, 이렇게 폴리스로부터 배제된 오이코스가 폴리스의 지속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포함된다는 기묘한 역설은, 분할을 통해서만이 폴리스(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렌트는 이러한 분할의 논리를 긍정한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점차 확대 재생산되고 정치적 공간에 먹고사는 문제들이 개입함으로써 정치의 종언이라는 비극이 탄생됐다고 본다. 고로 그녀는 이러한 분할의 논리를 고대처럼 엄격하게 사수하여 한정된 정치의 영역을 극진히 지키고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아감벤은 이러한 분할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긍정한다. 오히려 이러한 긍정 이후 아감벤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아렌트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의 논의는 분할의 논리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서로 위계적으로 보충적일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 각각의 것들을 그 자체로 ‘관조’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의 지형도

   그렇다면 이러한 이분법의 폐지를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역량을 무엇인가. 아감벤은 이러한 역량에 ‘무위’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때 ‘무위’는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가령 폴리스에서의 시민은 정치적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권리로서 인정받는다. 이때의 권리는 소유물이자 목적이다.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소유물이자,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현실화되는 권리라는 점에서 목적이다. 하지만 아감벤의 무위는 이러한 권리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이 자신의 자격을 바탕으로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음을 하는 것"(prefer not to) 을 말한다. 이러한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실천을 통해 시민이라는 권리는 작동하지 않게 되고(비-작동), 그럼으로써 시민이라는 지위는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새로운 권리를 정초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부정 그 자체에 머물고자 하는 시도이다. 아감벤은 이를 “완전히 새로운 정치, 즉 더 이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ex-ceptio)에 기반하지 않는 정치”(13)라고 일컫는데, 이때 이 시도는 비록 정치라는 이름으로 코드화될지라도 기존의 정치와는 완전하게 다른 ‘정치’일 것이다.





   발표자는 이러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의 지형도를 고려하지 못한 것에서 랑시에르의 오독이 나왔다고 말한다. 이때의 ‘정치’는 위에서 언급한 한정된 영역을 사수하고자 하는 아렌트식의 정치와도, 혹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이 공동체 전체의 몫과 같다고 역설하며 기존의 공동체적 합의와 질서에 파열음을 내는 랑시에르식의 정치와도 다르다. 아렌트와 랑시에르의 이론은 소유와 목적이 선명하다. 아렌트에게 정치는 시민의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정치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몫 없는 자들의 것이고 그것의 목적은 이들의 몫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저 ‘사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어떤 제도나 법 혹은 권리를 후견인으로 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지 않은 채, 그저 공동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분할의 논리 바깥에 사물을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아감벤의 ‘정치’이자 그가 말하는 “무위”이다.

 


남겨진 질문들

   이렇게 발표자는 한국적 상황을 통해 형성된 아감벤에 대한 오독들을 걷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발표를 통해 아감벤의 민낯과 가장 가까운 것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감벤과 직접 대면을 해도 그의 사상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자들뿐만 아니라 발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감벤의 ‘정치’는 기존의 분할과 배제를 작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권력에 힘을 실어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정치’를 역설했기에, 권력 안에서 그것의 작동을 멈추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고로 그의 ‘정치’의 목표(이러한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는 어떠한 것의 구축이 아니다. 아감벤에 의하면 구축은 필연적으로 ‘포함적 배제’를 낳는다. 다시 말해 구축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생산해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축을 피할 수 있는가? 아감벤의 말을 따라 기존의 분할과 배제의 선을 정지시켰다면, 그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한 과연 이러한 “무위”가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발표자의 말마따나 톈안먼 사태에서의 중국 인민들은 아감벤의 “정치적 주체”에 가장 걸맞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 군대의 탱크 아래 무참하게 짓밟혔다. 과연 폭력과 금지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에 폭력을 배제한 채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그저 부정에 머물며 기존의 분할과 배제의 선을 더듬거리게 만든다고 해서 권력이 정말로 무너질 수 있을까? 아마 권력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지 않을까? 비록 불온한 것들이 자신에게 아무러 폭력적인 작용을 가하지 않은 채 중국 인민들처럼 톈안먼 앞에 앉아있을지라도 말이다. 아감벤의 비-작동은 분명히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정치’이다. 하지만 그것의 현실적 효력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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