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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권력, 자본축적=권력축적(차등화 축적)

- 박형준, <자본축적의 새로운 지평 : 권력자본론>, 화요토론회






박기형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자본그리고 자본의 축적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이것만큼이나 학문적으로 정의 내려지기 어려운 단어,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단어 그리고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데 있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자본이란 것이 축적되는 과정, 즉 경제가 성장과 위기 사이에서 부침을 겪으면서 발전(?)해나가는 과정[각주:1]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박형준은 이 두 과제를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지평을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자본론이 열어주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의아했을 테다. “권력자본론이라니. 권력에 대한 것이면 권력론이고, 자본에 관한 것이면 자본론일 텐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그렇다면, 권력과 자본 양자를 모두 논하겠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우리는 흔히 권력과 자본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하여 생각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정치인이고 자본을 가진 사람은 자본가-한국에서는 재벌-라는 식으로, 나아가 자본으로 권력을 사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부를 축적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론의 이름부터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형준이 화요토론회에서 소개했던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자본론은 이러한 이분법을 완전히 깨버린다. 이른바 그들이 썼던 책의 부제처럼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경제에 국한되어 이해되었던 자본의 정의를 정치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자본론에서는 자본과 자본축적을 무엇이라 정의하는가? 바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본=권력, 자본축적=권력축적이라고.



박형준이 화요토론회에서 소개한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자본론>(삼인, 2004)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에 대한 색다른 비판

 

권력자본론은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일까? 닛잔과 비클러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틀이 근대 사회 사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질과 정신의 구분. 경제와 정치의 구분. 자본과 권력의 구분. 이러한 분리는 자본의 물질적 측면만 너무 강조되고, 권력의 측면은 전적으로 무시되는 사태를 낳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서부터 현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예외가 있다. 맑스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여부에 따른 계급 갈등으로 자본주의를 설명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닛잔과 비클러는 그 놀라운 혜안, 즉 자본을 경제적 권력으로 보았던 진일보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맑스(또는 맑스주의 경제학)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여타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 질서를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맑스가 잉여가치론을 주장하면서, 자본의 개념을 노동 시간, 노동 가치 등으로부터 이끌어 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닛잔과 비클러는 자유주의 경제학이든 맑스주의 경제학이든 양자 모두 자본의 물질적 측면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각주:2]. 그들이 보기엔, 자본은 물질적 생산에서 축적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이 착취와 억압의 형태로 작동한다는 맑스 식의 설명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후 진보적인 경제학들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권력이 여전히 경제 외적인 요인 또는 자본 분석에 추가로 덧붙여지는 식의 논의어서도 안 된다. 한마디로 자본 그 자체가 권력이며, 그 힘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재생산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진: 비클러(왼)와 닛잔(우)


자본: 사회적 관계를 재구조화 하는 권력, 사회의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 권력

 

권력자본론은 크게 2가지 논의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는 베블런이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주장했던 산업활동과 영리활동의 구분이며, 다른 하나는 루이스 멈포드가 이야기했던 민주적인 기술과 권위주의적 기술의 구분이다.


우선 베블런은 산업활동과 영리활동이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 생산은 공동체 지식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며, 여기서 벌어지는 산업활동은 공동체의 생계와 욕구에 복무한다. 하지만 영리활동은 분배의 영역에 국한된 활동으로서 이윤을 얻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따라서 이윤은 산업활동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윤의 크기는 분배과정에서 누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가에 그리고 공동체의 산업의 작동 여부에 얼마나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런 구분에 입각하여 베블런은 자본주의에서는 산업이 영리활동의 목적에 복속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전의 사회에서는 생산에 따라 분배가 결정되었다면, 자본주의에서는 분배가 생산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부재소유(absent ownership)제도 및 주식회사제도가 생기고, 영리활동과 산업활동의 분리가 확산됨에 따라 자본의 성격 자체가 변한 것이다. 이제 자본이란 사실 생산 그 자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생산에 투입되는 물적 자재와 장비에 대한 소유권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가들이란 생산 과정 자체에 대해서 어떤 지식도 없이 그저 주식이나 채권 등의 유동화 된 소유권을 손에 쥔 부재소유자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소유권을 가지고 자본가들은 이윤을 획득 및 축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가들은 자신이 소유한 생산 수단과 장비를 생산과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빼내어 사회적 생산 과정에 깽판’(sabotge)을 놓는다. 이를 통해 남들에 비해 차등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산활동의 전략적 제한이 바로 ‘(전략적)사보타주이며, 차등적 축적의 원리이다. 나아가 닛잔과 비클러는 멈포드의 기계와 상징적 행위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 앞선 베블런의 논의와 연결 짓는다. 즉 전략적 사보타주가 사회 조직 내에 자리 잡는 과정, 제도화 되어 하나의 거대한 자본축적 기계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닛반과 비클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차등화 축적 전략에 기반 하며, 자본은 차등화 축적을 위한 제도화 된 권력이다[각주:3].



과연 권력자본론은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이 될 수 있을까?

 

현대 자본주의를 가리켜 혹자는 금융화 된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변화하였다고 하면서, 자본주의를 구분해서 보고자 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격렬한 논쟁이 있다. 하지만 금융의 산업에 대한 통제가 영리 활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점은 현 상황을 둘러보아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영배의 노래 <자본주의>는 권력자본론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몇몇 사람의 난폭한 결정~ 우 워 어~ 자본주의.”


따라서 권력자본론이 현대 금융 시스템이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분석하고, 부재소유자인 대금융자본가들의 형성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다 상세히 설명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과연 권력자본론은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지평, 정치경제학의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자본=권력이라면, 자본이 아닌 권력은 없는가? 토론회에서 질문이 제기 된 것처럼 국가나 시민사회 등의 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러한 권력들에 대해 권력자본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등등.

 


요컨대, 다음과 같은 의문-프레시안에 게재한 박승호의 서평에서 제기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권력자본론은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한 게 아닌가? 권력자본론은 자본을 권력으로 이해함으로써 경제를 정치로 환원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정치는 사라지고 경제만 남은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닛잔과 비클러가 정의한 자본은 시장에 대한 독과점적 지배력, 생산 과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독점적인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자본론은 자본을 권력으로 보고자 하였으나 결국 권력을 경제 영역에 국한시켜 이해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맑스가 중요시 여겼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다시 말해 계급갈등과 같은 요소를 삭제함에 따른 문제일 수도 있다. 정치와 경제의 형식적 분리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치를 삭제시켜버린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분명 권력자본론이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본론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진정한 정치경제학이라고 보기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렇다면, 아마도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정립 중이지 않을까? 아니면 정치와 경제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계속해서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물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도대체 자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1. 경제가 발전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말 발전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경제성장론’에 따르면, 경제는 등락을 거치지만 일정한 방향, 즉 경제규모가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비판을 가했던 맑스 또한 생산관계의 변혁을 주장했지, 생산력 자체의 증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통상 사용하는 의미로서 경제가 발전한다고 표현하였다. [본문으로]
  2. 닛잔과 비클러에 따르면, 자본이론에 있어서 신고전파 경제학과 맑스주의 이론 모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그들이 오로지 생산에만 기반 하여 자본과 자본축적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자본을 양으로 측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물질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자본재들을 화폐로 가치 측정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자본재의 화폐 가치와 자본의 물질적 수량 사이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상황,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순환논리를 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이 고정된 물질적 양을 가지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 논쟁들로는 스라파의 재전환 사례들, 캠브릿지 논쟁 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이론도 자본을 양적으로 접근함에 따른 한계에 부딪힌다. 전형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노동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 생산가격에서 시장가격으로 전형하는 문제 말이다. 개개의 노동의 투입과 산출에서 사회적 노동의 총량을 구하기, 생산과정을 노동력(시간)과 같은 수량들의 함수관계로 확인하기 등등. 여기서도 이론적·내재적 한계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권력자본론](삼인)을 참조하길 바란다. [본문으로]
  3. 이제 밝혀야 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차등화 축적을 통해 자본주의를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차등화 축적이라는 틀로 경제의 성장과 위기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차등화 축적에 대한 조작상의 정의가 필요하다. 차등적 권력은 그것을 소유한 집단 전체의 자본화 정도(가치 성장률)와 평균적 자본 단위의 자본화 정도(가치 성장률)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측량되어야 한다. 전자에서 후자를 뺀 것이 곧 차등화 축적의 속도가 된다. 그리하여 축적을 하고 있는 것은 이 값이 0보다 큰 값을 갖는 자본가 집단들뿐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해, 지배적 자본의 자본화된 소득이 전체 경제의 평균과 비교하여 팽창해가는 비율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렇게 이윤을 축적하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밝혀야 한다. 즉 자본가 계급의 형성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닛잔과 비클러는 차등화 축적의 여러 양식들을 구분한다. 피고용자 수를 늘려 조직을 확장하는 넓이지향과 피고용자 1인당 평균 이윤을 끌어올려 현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는 깊이지향이라는 구분. 산업 간 또는 산업 내의 문제라면 내부, 경제 전체의 외양의 문제라면 외부라는 구분. 이 각각의 2가지 기준을 통해 4가지 범주를 만든다. 이에 기반 하여 여러 현상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권력자본론](삼인)을 참조하길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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