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인문학연구소의 화요토론회는 삶과 앎의 새로운 전환을 추구하는 열린 배움의 장소입니다.
사회와 문화, 예술과 정치, 일상과 세계를 아우르는 모든 주제에 관해 경청하고 질문하고 응답하며,
사건의 시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2018년 트랜스인문학연구소 제 14회 화요토론회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우리는 오늘날 증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분노는 조절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누군가가 내 분노의 과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 것일까?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줄리엣 미첼은 [동기간: 성과 폭력]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수직적 관계를 모델로 해서 정립된 정신분석 전통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동기간이나 또래 같은 측면 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그곳을 증오 발생의 유력한 현장으로 지목하면서. 위아래가 아니라 옆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세상은 어떻게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곰 세 마리와 골디락스의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를 알아보자.
장소 : 수유너머104 1층 카페
일시 : 2018년 5월 8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대상 : 발표 주제에 관심있는 분들 모두 (무료)
발표자 : 이성민
철학자. 도서출판 b 기획위원. 저서로는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철학하는 날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줄리엣 미첼, <동기간> 등이 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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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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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안녕하세요. 참석 신청 절차 없이 바로 토론회장으로 가면 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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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별도의 신청절차 없이 당일에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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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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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메모
우선 주목하고 있는 작가 중 한 분이신 이성민 선생님을 뵈어 반가운 마음으로 경청했습니다.
이하는 archiving(과) 공유 목적으로 첨부하는, 질의응답에 대한 매우 짧은 보충 메모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선생님께서 직접 추가 답변을 해주신다면 그 이상 감사할 수가 없겠고, 즉시 답변이 어려우시다면 다음 좋은 기회에 좀더 숙고되고 준비된 답변을 들을 수 있어도 좋겠습니다.
총론적으로는 토론회에서도 직접 말씀드렸지만 Mitchell의 연구는 매우 훌륭한 통찰과 착안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문화인류학적 접근에 가장 충실하고, 정신분석적 확장을 도모하고 있는 단계여서 사회과학적, 특히 정치철학 및 정치경제학적 도약과 보강도 시급하다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Freudo-Lacanian blindspot(의 원인)에 관한 첫 번쩨 질문은 이후 좀더 치밀한 전기적, 문헌학적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관점에서 Julliet Mitchell과 동기관계 분석이론이 아직 극복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새로운 맹점이라 부를 만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사회(과학)적 실천 및 활동과 연구를 위해서도 그만큼 핵심적이라 할 것입니다.
즉 동기/수평 관계 일반 속성의 자연발생에 그치지 않고 Cain : Abel 관계로 적극 훈육해내는 ("악신")의 대량생산장치로서 (의자(뺏기)놀이 모형) 지배구조 해명이 문화인류학적, 정신분석적 가족 관계 이론에서 사회과학 이론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핵심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약간의 오해 소지가 있었던 셋째 질문은 먼저 [우정의 정치학]에서의 Derrida 주장과는 달리 Aristoteles의 어떤 저작을 뒤져봐도 실제로는 그 인용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mystery인데 이것이 의도된 고도 계산인지 단순 기억 착오와 실수인지조차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원래 Frienemy를 넘어서는 순수 친구의 존재론적 부재와 그 필연적 결과로서의 '우정'의 본원적 (불)가능, 그래서 궁극적으로 반복되는 Postcommune Paradox의 근원과 Commune 자체의 (불)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그럼애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우정과 Commune의 구성 실천에서, 그러나 단순히 Commune의 표방과 "오~친구여"라고 친구를 부르는 소환과 초대 행위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문제 하나도 저절로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그 어려움과 난점에 대한 환기로, 그래서 결국 친구도 우정도 생산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각고의 집중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충언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도 우리의 모든 고민이 집중되어 나아가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 Postcommune Paradox는 의외로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로 이것이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실패는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생각해 온 저의 대안 중 하나는 Zizek이 통합해낸 Derrida 등 차이 철학의, 비적대적 모순 변증법에 대한 재고와 재발견에서 하나의 해법이 도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관계 상 드리지 못한 넷째 질문은, 정치철학과 깊이 관련된 것인데, 선생님이 발표에서 제기하신 대안과 Deleuzian 정치노선 간의 차이와 관계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었습니다.
원래 Deleuzian Plan은 Michel Tournier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에 붙인 서문에서 집약적으로 명시된 바와 같이 한 마디로 요약하면 '대타자 살해' 노선이라 부를 만한 전형적인 (post-)anarchism이라면, 선생님의 대안은---이것도 아직 실제적 대타자 살해가 불가능한 문화인류학적 가족 관계 이론틀에 갇혀 있는 단계이기에 발생하는 필연적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수직관계및 부모 지도 하 놀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셔서 정치(철학)적으로 번역될 때는 궁극적으로 특히 '자애로운 Leninism' 등까지를 포함하는 paternalism으로 정위될 소지가 커 보이는데, 이는 어떠한 평가의 의미도 없는 말 그대로 순수한 번역 맥락에서 드리는 질문이고, 오히려 '대타자 살해'만으로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거라 믿어왔던 경향이 있는 anarcho ccommun(e-)ism의 실패를 정정할 수 있는 잠재성도 가지고 있을 수 있어 보이기에 더욱 중요한 질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설적이지만, 이 셋째와 넷째 질문은 상호 밀관 상태일 수 있는데, 우리가 목격해 온 anarcho commune들의 계속 반복되는 실패와 폭발이 실은 사회주의 제2 세계체계와 연방 해체 후 동유럽을 휩쓴 Post-socialist ethnocidal civil war들의 대폭발과 동일한 뿌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유사 현상과 징후들이며, 따라서 이러한 증상들 모두 anarchism의 낭만적 환상에 대한 실재계의 처절한 반격이자 반증으로 독해될 수 있는 여지도 여전히 열려 있기 때문이며, 이 경우 오히려 모종의 자애로운 대타자를 상정하거나 부활시키는 'ideology'의 재발견도 완전히 무용하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William Golding의 [Lord of the flies]도 이런 동일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겠습니다.)
ㅋㅋㅋㅋ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