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를 비판하기 전에 ‘칸트에게 공감하고 좋아하는 게 먼저’라고 하셨던 쌤의 말씀이 생각난다. 니체를 오래 공부하셨기 때문에 칸트에게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느끼기도 하지만,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공부법은 ‘어떤 사유를 넘어설 자원을 그 사유 안에서 찾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도 닿아있는 맥락이다.
칸트의 인간중심주의가 어떤 인간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런 규정 속에 장애가 어떻게 배제적으로 포함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보고, 더 나아가 ‘적극적 비이성’이나 ‘비사회적 사회성’ 같은 칸트의 개념들을 통해 장애가 품고 있는 사유의 잠재성을 탐색하기. 아울러 그 과정을 통해 ‘정상성으로서의 근대의 인간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해 온 인문학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쌤의 이번 공부의 목표라고 나는 이해했다. 물론 스승님의 목표는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나 역시 ‘이 공부를 왜 시작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제를 가지고 이 수업에 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정리는 필요할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요즈음의 나는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의 생각과 느낌, 말과 행위’가 대체 어떻게 결정이 되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알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제 어느 정도나마 그 의문을 풀게 되었다. 그런데 궁금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 감수성 내지 감각 역시 변화했고 점차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겨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하다가 누군가가 하는 얘기에 대해 무심코 나온 나의 반응이 그들을 당황시키거나 화나게 한다든지, 가족들이 내게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어할 때에 적절하게 응답하지 못해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물론 그들을 모두 만족시켜서 안정되고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혹시 내가 ‘원래 인간은 이러저러한 게 맞다‘는 또 하나의 전제를 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생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현재의 역사적 조건을 완전히 인정하고 난 후에 ’적극적 비판‘으로서의 (현재를 존재하게 한 논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듯이, 나 역시 ’나의 모습‘이자 ’근대적 인간의 현주소‘인 ’인간주의‘를 충분하게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칸트에 대해서는 제대로 책 한 권 읽은 적이 없으면서 니체나 들뢰즈의 말이 주는 이미지로 멋대로 칸트에 대해 떠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머릿속에서나마 칸트를 폄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이미지들을 단번에 지우는 건 물론 가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런 선입견으로서의 이미지들을 알아차리면서 칸트를 새롭게 맞이하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해야 마땅하리라. 칸트의 ’인간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곧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할테니까.
20230325
*정리가 잘 되지 않고 혼란만 가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쌤의 말씀처럼 조금씩 생각을 모아가기는 해야할 것 같아서...
1. 두 번째 수업과 이후에 읽은 약간의 내용들을 통해 칸트가 생각한 인간(인간이 타고난 권리 및 그로부터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서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얻게 된 게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특별한 種이며, 인간이라는 種은 진보하고 또 반드시 진보해야 한다는 데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놓지 않았던 분이라는 느낌?!
“인간이 자기의 표상 안에 ‘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지상의 여타의 모든 생물들 위로 무한히 높이 세운다.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며, 그에게 닥치는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통일성’에 의해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다.”(1)
“인간의 내적 완벽성에서 핵심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기 통제 아래 사용하고 그리하여 그 모든 능력을 자신의 자유로운 자의에 종속시킨다는 점이다.”(8).
“1798년의 ‘인간학’에서 실용적인 것은 ‘할 수있음’과 ‘해야만 함’ 간의 연결이라는 특정한 양태가 된다. 명령에 의해 선험적으로 보증되는 실천이성과 인간학적 상찰 간의 관계는, 일상활동의 구체적 운동, 즉 ‘유희함’을 통해 보증된다. 이 ‘유희함’이라는 개념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인간은 자연의 유희(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유희는 인간이 즐기는 것이며, 인간 스스로 그것을 향유한다. 만약 인간이 유희의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감각적 환영에 빠진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유희의 희생자인 양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희의 주인이 되는 것과 의도적인 책략을 통해 스스로 유희를 되찾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권한이다. 따라서 유희는 ‘인위적인 유희’가 되며, 인간이 연기하는 겉모습은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푸코,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p.64)
*인간에게는 ‘선험적 통각’이 부여되었고, 그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 내지는 사물과 구분한다. (선험적 통각; 외부의 온갖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감성, 그 잡다로서의 데이터를 각각 개별화해서 표상하는 직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표상을 재생하는 상상력, 더 나아가 추상-차이가 나는 것을 떼어내기-하여 범주화하고, 공통된 표상으로서의 개념을 만드는 지성, 여타의 표상들을 그 개념하에 분류하는 판단력까지의 인식능력)
*인간은 자연의 유희함의 산물(일상의 구체적 운동)이지만, ‘선험적 통각’이 주어져 있기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그것을 겪는 상태를 넘어서서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지만 자연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것은 세계를 획득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유희의 세계에 대한 이해, 즉 ‘세계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규정과 규칙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학습을 통해 획득한) ‘도덕적인 이성의 명령’에 의해, 선험적으로 보증된 통각을 충분히 잘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지배하는 것(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통제 아래 자의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 이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기도 할 듯)이 가능하며, 그것이 곧 인간의 내적인 완벽성이고 지향해야 할 바이다. (저 ‘완벽성’이야말로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닐까?)
*칸트가 얘기하는 ‘도덕’의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
2. ‘의식의 통일성’
“인간이 자기의 표상 안에 ‘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지상의 여타의 모든 생물들 위로 무한히 높이 세운다.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며, 그에게 닥치는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통일성’에 의해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다.”(1)
그런데 인간이 저 ‘내적 완벽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통일성’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칸트가 보기에 ‘선험적 통각’이라는 인간의 특권도 ‘의식의 통일성’을 통해서만 그 능력이 발휘되며, 자연의 유희함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사용자가 되기 위해서도 ‘의식의 통일성’이 반드시 요청된다. 그 예로 칸트는 ‘습관화’를 ‘동일한 종류의 감각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 감각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버릇’은 ‘동일한 행위를 생각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면서 둘 다 ‘도덕적인 가치’가 없거나 ‘동물성’이 ‘인간성’보다 우위에 있는 상태라고 여기고 있다. “덕은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게 되는 도덕적 힘이다. 덕은 결코 습관이 되어서도 안 되며, 사고방식에서 항상 전적으로 새롭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솟아나야 한다.”(홍,p55)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나에게 언뜻 떠오르는 구체적 인간의 이미지는 이런 모습이다. 한순간도 ‘자기 자신으로서의 나’에 대한 의식을 놓치지 않고자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경험들을 구분하고 분별해서 깔끔하게 정돈하고, 목표와 현재와의 간극을 잘 살펴서 해야 할 바를 결정하고,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자. 그 목표가 의도대로 완수되었을 때 기쁨을 느끼고, 목표와의 간극이 클 때는 가책을 느끼거나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탓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인간. 물론 칸트는 ‘의식의 통일성’을 ‘무의식적인 자의식’과 구분하고 있고, 내감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상태를 경계하고 있으므로 칸트적인 인간은 적어도 내가 그린 이미지보다는 훨씬 고급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무겁고 긴장된 이미지’는 벗겨지지가 않는다. 이런 걸 인간이 최종목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자연의 산물로서의 인간이 과연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의식의 통일성’ 자체를 부인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의식의 통일성’을 통해서 이런 글도 쓰고 있으며 공부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내가 도달하는 지점은 언제나 ‘내가 먼저 있어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로서 즉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배치의 결과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일 뿐이었다. ‘나의 완성으로 모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꾸로 내가 점점 풀려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상태에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자유’를 느낀다. 환갑의 나이를 지나고 점차 노화되어가는 자신의 신체를 느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만약 나에게도 치매라는 것이 온다면 그때 나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인가? 그 자유를 ’통일된 의식‘을 통해 느낄 수 없다면 자유가 아닌 것일까?’
칸트는 ‘모호한 표상’의 영역, 즉 ‘통일된 의식’안에 담아낼 수 없는 광활한 영역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그 영역은 명확하고 판명하게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칸트가 ‘의식의 통일성’(그리고 이것을 이용해 선명하게 구분짓고 분별하고 떼어내고 정리하는 능력)을 여타의 생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조건’으로 요청하고 전제했기 때문에 이 실재성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 모호한 영역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면? 동물이나 지적장애인들, 혹은 치매상태의 인간의 표상의 영역이 인정된다면? ‘나’라는 통일된 의식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다른 방식의 자유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