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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와 가치이론

 

          1. 힘에의 의지에 대하여          

 

① 심리학의 통일구상에 대한 비판

우리의 통념 “여러 형식의 형성이 통일성있는 기원에서 유래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 나의 이론 “힘에의 의지는 원시적인 욕정형식이며, 그 밖의 모든 욕정은 힘에의 의지에 의하여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생물이 추구하는 개체의 ‘행복’을 대신하여 ‘힘’을 확립한다는 것은 중대한 계몽이 된다. 즉 “모든 생물은 힘을 향하여, 힘의 증대를 향하여 노력한다.” 쾌감(*행복감정)이란 달성된 힘감정의 증후(차이의 의식성)에 불과하다. 모든 생물이 쾌감을 추구하여 노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추구하는 것이 달성될 때 쾌감이 생기는 것이다. 쾌감은 수반하는 것이지, 쾌감이 동기는 아니다. 모든 몰아붙이는 힘은 힘에의 의지이며, 이것 이외에는 어떠한 물리적ㆍ역학적ㆍ심리적 힘도 없다.

원인-결과라는 개념이 동등관계로 환원되어 동일량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현대과학은 몰아붙이는 힘(*힘에의 의지)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힘이 갖는 내용에 관하여, 현대과학은 동등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변화가 “정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이다. 그 자체로는 “어떤 변화에 다른 변화가 잇달아 발생해야 하는” 근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 반대이다.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의욕하지 않는 능력이 없다”고 하면, “자기 자신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듯”이 보인다. ‘자기보존’에 관한 스피노자의 명제는 변화를 정지시킬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 (*코나투스 :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구 <······> 자기를 관철하려는 사물의 현행적 본질. 인간의 경우에는 충동ㆍ의지ㆍ욕망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멀지 않은 개념이다. 고병권)

 

② ‘힘에의 의지’와 인과론

‘원인’이라는 개념은 의욕에 관한 우리의 힘감정이다. ‘결과’라는 개념은 이 힘감정이 움직이는 것인 힘 자체라는 미신이다. 어떤 사건에 수반하고, 그것 자신이 그 사건의 결과인 상태가 이 사건의 ‘충족이유’로서 투영되는 것이다.

우리의 힘감정의 긴장관계(힘감정으로서의 쾌감), 초극된 저항의 힘감정, 이것은 환상일까? ‘원인’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규정(*의욕에 관한 힘감정)으로 판단한다면, 힘에의 의지가 없이 어떠한 변화도 생각할 수 없다! 다른 힘에 대한 힘의 침해가 생기지 않을 때, 우리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변화는 다른 힘에 대한 힘의 침해를 말한다.)

역학이 나타내는 것은 결과에 불과하여, 그것도 운동이라는 비유로서이다. 중력은 기계적 결과에 대한 근거이기 때문에, 어떠한 기계적 원인도 갖고 있지 않다.

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는 삶의 현상에 특유한 것이다. 영양ㆍ생식ㆍ유전에, 사회ㆍ국가ㆍ습관ㆍ권위에 특유한 것이다. 화학이나 우주의 질서에서도 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를 동력원인으로 상정할 수 없을까? 단지 에너지의 불변뿐 아니라, 최대한으로 경제적인 낭비. 그 때문에 모든 힘의 중심에서 발하는, 보다 강해지려는 의욕이 유일의 실재성이다.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지배하고, 보다 더한 것이 되고-보다 강한 것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유일한 실재성이다.

어떤 일이 이와 같이 발생하고 달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에는 어떤 ‘원리’도ㆍ어떤 ‘법칙’도ㆍ어떤 ‘질서’도 없으며, 그 결과 야기되는 것은 (다른 모든 힘의 양을 향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 속에 그 본질이 있는) 힘의 양이다.

우리는 쾌/불쾌의 감각 없이도, 힘의 상승/감퇴의 감정 없이도, 힘을 추구하는 노력을 상정할 수 있을까? 기계론이란 투쟁하고 초극하는 의지의 양의 내면적 사실계에 대한 암호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질ㆍ원자ㆍ무게ㆍ압력ㆍ충돌이라는 기계론의 모든 전제는,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허구의 도움을 빌어 행해진 ‘해석’이다.

우리에게 숙지된 존재형식으로서의 삶은 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이다. 삶의 모든 과정은 여기(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에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 그 어느 것도 보존하고자 의욕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집적되고 축적되어야 한다. 삶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생존의 총체적 성격에 끼칠 수 있는 가설)로서 힘의 극대감정을 추구한다. 힘의 극대감정을 추구하는 것은 힘의 증대를 추구하는 노력이며, 노력이란 힘을 추구하는 노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가장 깊고 가장 내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힘에의 의지이다. 역학은 단지 결과를 보고 판정하는 증후학에 불과하다.

 

          2. 힘에의 의지와 쾌/불쾌          

 

① 힘에의 의지와 쾌/불쾌

존재의 내적인 본질이 힘에의 의지이며, 쾌가 힘의 모든 생장이고 불쾌가 저항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이라고 하면, 쾌/불쾌를 근본사실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쾌를 느끼는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힘을 의욕하는 것은 누구인가? 생물 자체가 힘의지이며, 따라서 쾌/불쾌를 느끼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극히 불합리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이ㆍ저항이, 그러므로 상대적으로는 침해하는 통일체가 필요하다.

그것을 지배하기 위하여 힘이 저항에 따라 증대한다. (저항으로 유발되는 실패나 재난의 양도 증대한다.) 따라서 모든 힘이 저항에 대해 방출될 수 있는 한, 모든 작용 속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가 내포되어 있다. 오직 이 불쾌가 삶의 자극으로서 행동하고, 힘에의 의지를 강화한다!

 

② 힘에의 의지와 데카당스

힘에의 의지 : 증대의 차이 > 쾌/불쾌가 힘의 감정에 연관되어 있다면, 삶은 힘의 생장을 틀림없이 나타내며, 그 때문에 이 ‘증대’의 차이가 의식에 떠오를 것이다. 힘의 수준이 확정하고 있다면, 쾌는 힘의 수준의 저하에 있어서만 측정된다. 즉 쾌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불쾌의 상태로 측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증대에 대한 의지는 힘이 생장하고 그 차이가 의식에 떠오른다는 쾌의 본질 속에 있다.

데카당스 : 쇠약의 차이 > 데카당스에 있어서는 ‘쇠약’(증대와 반대되는 차이)이 의식에 떠오른다. 이전의 강한 순간의 기억이 현재의 쾌감을 감퇴시키는 것이다. 비교함으로써 현재의 쾌가 약화되는 것이다.

 

③ 고통은 쾌와는 다른 무엇이지만, 쾌의 반대가 아니다.

의지의 만족이 쾌의 원인은 아니다. (이와 같은 피상적인 이론에 대해 나는 싸우고자 한다. 가장 가까운 사항의 불합리한 심리학적 위조이다.) 의지가 전진하는 것을 의욕하고 앞길을 막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쾌의 원인이다. 쾌감은 의지의 불만족 속에 의지가 적수ㆍ저항을 결여한 까닭에 아직 충분히 만족되지 않는다. ‘행복한 자’란 가축떼의 이상에 다름아니다.

굶주림ㆍ성욕ㆍ운동 같은 우리 충동의 정상적인 불만족은 결코 그 자체 속에 낙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충동의 불만족은 격렬하게 생명감정에게 행동을 유발한다. 우리 충동의 불만족은 삶을 혐오하게 만드는 대신 삶의 자극제이다. (쾌는 작은 불쾌의 율동이라고 특징지워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쾌快와 고苦의 본성에 관하여󰡕 1781년. 베리백작의 명제를 나는 확언한다. 즉 인간의 유일한 원동력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모든 쾌에 선행한다. 쾌는 적극적인 것에 있지 않다.”

고통은 쾌와는 다른 무엇이지만, 쾌의 반대가 아니다. ‘쾌’의 본질이 힘의 증대감(비교를 전제로 하는 차이의 감정)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불쾌’의 본질은 정의되지 않는다. 민중이-언어가 믿고 있는 그릇된 대립이야말로 진리를 방해하는 위험한 착오였다. 게다가 작은 불쾌한 자극이 쾌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이로써 힘의 감정ㆍ쾌의 감정이 급속히 증대되는 것이다. 예컨대 성교행위 때의 성적인 가려운 통증이 그런데, 이와 같이 불쾌가 쾌의 요소로 행동하고 있다. 작은 저지가 극복되면, 잇달아 작은 저지가 발생하고, 이것 또한 극복된다. 저항과 승리의 이 같은 놀이가 쾌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 넘치는 힘의 총체적 감정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다. 이와는 반대로, 작은 쾌의 자극에 의하여 고통의 감각이 증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쾌와 고통은 결코 정반대의 것이 아니다.

고통은 하나의 지적 사상이며, 여기서는 어떤 판단이 결정적으로 공공연해진다. 어떤 판단이란, 오랜 동안의 경험이 겹쳐 쌓아온 ‘유해’라는 판단이다. 유해 자체로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상해가 아니다. 유해는 어떤 상해가 유기체의 총체에 심각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경험이며, 이 경험이 깊숙한 마음의 격동이라는 모습을 취하고 나타나 불쾌라고 불리는 것이다. 옛날에는 없었던 새로운 유해한 약품의 경우, 우리는 고통의 암시도 없이 의식을 잃는다.

고통 본래의 특유한 것은 마음이 오랫동안 격동을 입는다는 것, 신경계통의 두뇌중추부에서 무시무시한 충격의 전율이 나중까지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고통의 원인(예컨대, 무언가의 손상)에서가 아니라, 충격의 결과 발생하는 오랜 평형장해에서이다. 고통은 뇌신경중추의 질병이지만, 쾌는 결코 질병이 아니다.

고통이 반대운동(*반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게다가 철학자의 선입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 반대운동(*반작용?)이 고통의 감각보다 이전에 일어난다. 우리가 발을 디뎠을 때, 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의도가 타전되어 오기까지 기다린다고 하면 낭패를 맞을 것이다. 먼저 넘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발의 반대운동(*반작용?)이 일어나고, 이어서 일정한 시간이 걸려 고통이 이마에 느껴지게 되면 명료하게 구별한다. 그러므로 반작용은 고통에 대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통은 나중에 가서야 상처입은 국부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부적 고통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국부적 상해가 일어났는가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것은(*국부적 고통은) 어디에서 상해가 일어났는가를 나타내는 단순한 기호이며, 이 기호의 강도와 음조는 신경중추가 이 기호로부터 감지해둔 상해에 알맞게 되어 있다. 그 충격의 결과 유기체의 근육 힘이 상당히 저하한다는 것이, 고통의 본질을 힘감정의 감소 속에서 구하는 실마리는 아니다.

되풀이하면, 반작용은 고통에 대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불쾌가 행위의 ‘원인’은 아니다. 고통 자체가 하나의 반작용이며, 반대운동(*반작용)은 고동과는 다른 고통 이전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양자(*고통과 반대운동)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다.

 

④ 쾌와 불쾌는 원인이 아니다!

고통이 그 자체로 표시하는 것은 “그 순간에 상해를 입은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개체 전반에 관하여 그 상해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개체가 아니라, ‘유類’가 겪는 고통이 있는 것일까?

“불쾌의 총계는 쾌의 총계를 능가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가 존재하는 것보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쪽이 나음에 틀립없다.” 세계는 합리적으로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감각의 주체에 대해서는 쾌보다 불쾌를 야기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다스러움이 오늘날 페시미즘(*염세주의, 비관주의)이라 불리고 있다니!

쾌/불쾌는 부대사항이지 아무런 원인도 아니다. 쾌/불쾌는 어떤 지배적 가치로부터 나오는 2급의 가치판단이다. 쾌/불쾌는 감정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는 ‘유용/유해’라는 것이며, 따라서 일시적이고 의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용/유해’에 있어서는 다양한 무엇을 위하여? 개연(蓋然. 확실하지 않으나 그럴 것 같은 상태)으로서 질문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나는 이와 같은 감수성의 페시미즘을 경멸한다. 이것 자체가 삶이 심하게 빈곤화되어 있다는 징후이다.

인간은 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쾌를 피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주장이 어떤 선입견에 반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쾌/불쾌는 단순한 결과-단순한 수반현상이다, 인간이 의욕하는 것, 생명있는 모든 유기체의 최소부분이 의욕하는 것, 그것은 힘의 증대이다. 힘의 증대를 추구하는 노력 속에서 쾌도 생기도 불쾌도 생긴다. 힘에의 의지로부터 인간은 저항을 탐구하며 대항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불쾌는 스스로 힘에의 의지를 저지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정상적인 사실, 모든 유기적 사건의 정서적 요소이다. 인간은 불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쾌을 부단히 필요로 한다. 모든 승리, 모든 쾌감, 모든 사건은 극복된 저항을 전제로 한다.

원시적인 영양작용이라는 가장 단순한 경우를 예로 들면. 원형질은 스스로에게 저항하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위족을 뻗치는데, 그것은 굶주림에서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서이다. 잇달아 원형질은 저항물을 극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동화하려고 시도한다. 즉 영양이라는 것은 보다 강력해지려는 근원적 의지에서 결과하는 현상이며, 힘에의 의지의 유효한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쾌는 우리의 힘감정의 감소를 결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극으로서 이 힘감정으로 행동을 유발한다. 저해는 이 힘에의 의지의 자극제인 것이다.

불쾌는 불쾌의 일종이라는 초췌라는 것을 오해되어 왔다. 초췌는 힘에의 이지의 깊숙한 감소ㆍ저하를, 힘이 입는 현저한 손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a) 힘을 강화하는 자극수단으로서의 불쾌가 있다. 또한 b) 힘이 탕진되어 버린 후의 불쾌가 있다. a)의 경우에는 하나의 자극제이며, b)의 경우에는 과도한 자극의 결과이다. 저항할 수 없는 무능함이 b)의 불쾌에 고유하며, 저항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a)의 불쾌에 속한다. 초췌의 상태에 있어서만 감각되는 쾌는 혼수(昏睡)이며, 다른 경우에 있어서 쾌는 승리이다.

심리학자들의 오해는 이 2가지 쾌(혼수의 쾌와 승리의 쾌)를 구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초췌한 자들은 안식ㆍ휴식ㆍ평화ㆍ정적을 의욕(니힐리즘적 종교ㆍ철학의 행복)하고, 부에 넘치고 생기에 가득찬 자들은 승리를-극복된 적수를-보다 광대한 영역의 힘감정을 의욕한다. 유기체의 모든 건강한 기능은 이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유기체는 힘감정의 생장을 추구하여 격투하는 복합체이다!

 

          3. 힘에의 의지와 가치이론          

 

① 인간의 행복과 식물의 의지

심리학에 있어서 근본신조가 심한 왜곡이나 화폐위조인 것은 어째서인가? 예컨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여 노력한다” 도대체 이 주장에 참된 것이 있을까?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어떤 종류의 노력ㆍ긴장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공식은 동물이나 나무나 풀에도 타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식물은 무엇을 추구하여 노력하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있지도 않은 허위의 통일을 허구한다. 자기 스스로의 절반은 자기 스스로의 발의(發意)를 가지고 있는 복잡한 생장은, ‘식물’이라는 몰취미한 통일을 앞세울 때에는 거부되고 있다. 최소의 궁극적 ‘개체’는 ‘형이상학적 개체’나 원자라는 의미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개체의 힘영역은 부단히 추이(推移. 시간에 따라 변함)한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각각의 개체는 변화할 때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자기를 확장ㆍ혈육화ㆍ생장하는 행동은 저항하는 것에 역행하고자 노력하는 행동이다. 운동은 본질적으로 불쾌상태와 결합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불쾌를 의욕하는 한, 어쨌든 행복과는 다른 것을 의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무엇을 둘러싸고 원시림의 수목은 서로 투쟁하고 있는가? ‘행복’을 둘러싸고 인가? ‘힘’을 에워싸고 있다!

자연의 맹위를 지배하는-자신의 야성ㆍ방자함을 지배하는 인간(욕망이, 복종하는 것을ㆍ유용하게 되는 법을 배우고 만 것이다)은 인간 이전의 생물에 비하면, 거대한 ‘힘’의 양을 나타내고 있다. ‘행복’의 증대를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해왔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까지 인류의 최고영감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오류라는 쥐의 거대한 꼬리가 숱한 별에 섞여 나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 “모든 행복은 덕에서 생기고, 모든 덕은 자유의지에서 생긴다”니!

우리는 가치를 역전시킨다. 즉 모든 유능성은 유기화가 성공한 결과이며, 모든 자유는 유능성의 결과이다.(*유기화 (결과) ······> 유능성 (결과)······> 자유)

삶의 가치. 삶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이며, 모든 생존이 시인되지 않으면 안되며, 삶만이 시인되어서는 안된다. 삶을 시인하는 원리는 삶을 설명하는 원리와 같다. 삶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즉 삶은 힘의 생장형식의 표현이다.

 

② ‘객관적’ 가치정립의 필연성, ‘의식된’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된 세계’가 가치의 출발점일 수는 없다. 즉 ‘객관적’ 가치정립의 필연성.

모든 유기체의 총제적 삶이 나타내는 서로 돕고 서로 방해하는 거대하고 다양한 행동에 비하면, 이 유기체의 감정ㆍ의도ㆍ가치평가의 의식된 세계는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이 한조각의 의식저 삶의 총체적 현상에 대한 목적이라고, 왜? 라고 간주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오히려 의식작용삶의 발전이나 힘의 확대에 있어서 한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쾌ㆍ정신성ㆍ도의심 같은 의식의 개별적 영역을 최고가치로 설정하고, 게다가 ‘세계’를 이것으로부터 시인한다는 것은 유치하다.

이것이 모든 철학적ㆍ도덕적인 우주와 신의 변호론에 대한, 지금까지의 철학ㆍ종교철학의 모든 왜Warum에 혹은 최고가치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이의이다. 수단의 한 종류(의식작용)가 목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반대로 삶과 힘의 상승이 거꾸로 수단으로 격하된 것이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넓게 확립하고자 의욕하면, 삶의 목적의식적 삶의 범주와 합치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삶의 목적의식적 삶의 범주를 스스로를 위한 수단으로 설명해야 한다!

‘삶의 부정’이 삶의 목표ㆍ발전의 목표라니! 생존이 거대한 우둔함이라니! 그런 불합리한 해석은 삶이 의식(쾌/불쾌, 선/악)을 통해 측정되는 것에서 산출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수단이(‘거룩하지 못한’, ‘부조리한, 특히 불유쾌한 수단이) 목적에 대하여 유력하게 된다. 그러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목적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오는 그런 수단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목적 대신에, 그런 수단을 배제하는 목적을 전제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떤 수단(쾌적한, 합리적인, 덕망있는 수단)에 관한 원망(願望. 원하고 바람)을 규범이 되게 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총체적 목적이 바람직한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근본적 과오는 의식성을 총체적 삶의 도구이며 개별성이라고 풀이하는 대신에, 삶의 기준으로서-최고 가치상태로서 설정하는 것이다. 즉 부분을 전체에 끼치게 하는 그릇된 투시법이며,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은 어떤 총체적 의식을, 발생하는 모든 것과 공통된 어떤 의식적 생명ㆍ의욕을, 어떤 ‘정신’을, ‘신’을 공상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꾀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일로써 생존은 괴물이 된다, ‘신’이나 총체적 감각중추 때문에, 생존은 단죄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목적과 수단을 정립할 총체적 의식을 소거해 버렸다는 것에 의해 우리는 홀가분해진다. 이 일로 우리는 페시미스트(*염세주의자, 비관주의자)가 되는 입장에서 도피하게 된다. 생존에 대한 우리의 최대비난은 신의 현존재였다.

 

③ ‘생성’의 가치에 관하여

만약 세계의 운동이 하나의 목표상태를 갖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달성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일한 근본사실은 “세계의 운동이 어떤 목표상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목표상태가 필연적인 철학이나 과학적 가설(예컨대 기계론)은 저 근본사실에 의해 논박당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에 적합한 세계구상을 추구한다. 생성은 그런 종국적 의도로 도피하는 일 없이도 설명되어야 한다. 즉 생성은 시인된 것(혹은 가치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서 모든 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가 미래를 위하여, 과거가 현재를 위하여 시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필연성’은 침해하고 지배하는 총체적 위력이나 첫째가는 원동력이라는 모습이 아니며, 무언가 가치있는 것의 조건이 되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언가 가치있는 것의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감정지식을 함께 하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의욕하는 일이 없는 존재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포착하지 않기 위하여 생성의 총체적 의식신을 부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은 무엇인가를 의욕하지 않으면 쓸모없고, 반면 그 신을 통해 ‘생성’의 총체적 가치를 저하시킬 우려가 있는 불쾌와 불합리가 총계된다. 다행히도 그런 총계를 행하는 힘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고뇌하고 개관하는 신ㆍ‘총체적 감각중추’ㆍ‘만유정신’은 존재에 대한 최대의 이의이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때 생성은 가치를 상실하고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는 환상이 생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존재하는 것이라는 가설은 모든 세계비방의 원천이다. ‘보다 선한 세계, 참의 세계, 피안의 세계, 물 자체’

(1) 생성은 아무런 목표상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존재’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없다.

(2) 생성은 아무런 가상상태도 아니며, 존재의 세계야말로 가상일지 모른다.

(3) 생성은 모든 순간에 가치를 동등시하고 있으며, 가치의 총계는 고정불변이다. 바꿔 말하면 생성은 아무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생성은 생성으로 측정될 수 있고, ‘가치’라는 말은 생성과의 연관 안에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세계의 총체적 가치는 그 가치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철학적 페시미즘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원망(願望)’을 존재에 관한 심판자가 되지 않게 하자! 우리는 또한 발전의 궁극형식(예컨대 정신)을 다시금 ‘그것 자체로의 것’으로서 발전의 배후에 두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인식은 수와 양을 적용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과학적이 되었다. 가치의 과학적 질서는 힘의 수ㆍ양의 단계에 기초하여 구축해서는 안 될까? 이것 이외의 모든 ‘가치’는 선입견ㆍ유치함ㆍ오해이다. 이들은 모조리 힘의 수ㆍ양의 단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이 단계에 있어서 상승은 각각의 생장을 의미하며, 이 단계에서의 하강은 가치의 감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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