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리는 생존오류이며, 인식은 생존수단이다
“진리는 생존을 위한 오류이며,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가치이다”
진리란 그것 없이는 특정종의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오류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가치이다.
“우리의 인식활동은 삶의 보존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활동이 삶의 보존에 충분할 정도를 넘어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각ㆍ신경ㆍ두뇌는 영양결핍(*생존조건)과 비례하여 발달한다.
“진리의 감각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는 힘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진리의 감각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도덕성이 아니라, 인간보존의 수단으로서 권력의지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도 마찬가지로 형성하는 의지이다. 진리의 감각과 아름다움의 의지 같은 현실적인 감각은 사물을 우리의 기호에 따라 형성하기 위해 힘을 손에 넣는 수단이다. 형성하는 일이나 변형하는 일에서 느끼는 쾌감은 근원적인 쾌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만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방식은 ‘인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하여 설계되어 있다.”
지식ㆍ인식의 방식은 그 자체가 이미 생존의 조건 하에 있다. 그때 “우리를 보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종의 지성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이 생존조건이 아마도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닐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장치가 ‘인식’을 위하여 설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진리라면, 얼마나 희한한 추론인가!”
가장 강하게 믿어져온 선험적a priori인 ‘진리’는 우리에게는 당면한 상정이며, 인과성의 법칙처럼 신앙의 길들여진 습관이며,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몰락하기에 이를 만큼 혈육화(*신체화ㆍ내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면, 얼마나 희한한 추론인가! 마치 인간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진리가 증명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 또한 우리의 생존조건의 귀결이다”
우리가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지성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2] 사고ㆍ지각ㆍ기억은 과거에 대한 유사화이다
“우리의 사고는 새로운 소재를 낡은 모형에 끼워넣는 행동이다”
유기체 이전의 원시상태에 있어서의 ‘사고’는 형태화작용의 관철이다. 우리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소재를 낡은 모형에 끼워넣는 행동(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즉 새로운 것을 동일한 것으로 조작하는 행동이다.
“우리의 지각은 ‘과거의 유사화’의 결과이며, ‘인상에 잇달아’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투영된 감관지각. 즉 ‘안과 밖’ 거기서 명령하고 있는 것은 육체인가? 유전형질 속에 지배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힘(동일화하고 질서를 세우는)이, 외계를 혈육화(*신체화ㆍ내화)할 때에도 지배한다. 우리의 감관지각은 과거의 유사화의 결과이며, ‘인상’에 잇달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것으로 조작하는 것은 반동적 활동이며, 차이의 보존은 능동적 활동이다”
[비교작용 :: 반동적 활동] 비교작용으로서의 모든 사고ㆍ판단ㆍ지각의 활동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ㆍ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 동일한 것으로 조작한다는 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 소재를 아메바가 동화하는 것과 동일한 활동이다.
[차이의 보존 :: 능동적 활동] 나중에 ‘회상’하는 것은, 여기서는 동일한 것으로 조작하는 충동이 이미 제어되어 나타나는 한에서이다. 즉 차이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분류하고 정리하는 활동으로서의 회상하는 활동. 능동적이지만, 누가 그러한가?
“기억은 재생산ㆍ재인식하는 ‘영혼’을 상정한다”
기억에는 시간에 상관없이 재생산ㆍ재인식하는 ‘영혼’을 상정하는 유혹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체험된 것은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어서, 기억이 ‘도래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의지가 활동할 여지도 없다. 무엇인가가 발생하여, 그것을 내가 의식한다. 하지만 그때 무엇인가 그것과 유사한 것이 도래한다. 그것을 불러모으거나 환기시키는 것은 ‘영혼’이 아닌가?
[3] 지각은 가치판단(유용/유해, 쾌/불쾌)으로 수행된다
“인식장치는 ‘사물의 인식’이 아니라 ‘사물의 획득’을 겨냥한다”
인식의 모든 장치는 추상화ㆍ단순화의 장치이며,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목적과 수단’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본질에 탐닉하는 일이 없다. ‘목적과 수단’으로써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과정’이기는 하나, 그러나 ‘개념’으로써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이 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물’인 것이다.
“의식은 생물학적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지만, 생물학적 중심에 끊임없이 접근하는 과정이다”
의식이란 ‘인상’의 병렬이나 의식화로서, 외면적으로 발단을 계속한다. 의식은 최초에는 개인의 생물학적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지만, 스스로를 심화하고 내면화하고 생물학적 중심에 끊임없이 근접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지각은 가치판단(유용/유해, 쾌/불쾌)으로 수행된다”
우리의 지각이란, (우리에 대해서도ㆍ전체 유기적 과정에 대해서도) 유용한 지각의 총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정선된 지각에 대해서만 감관을 갖는데, 그것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우리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지각이다. 의식은 의식이 유용한 한에서만 현존한다. 모든 감관지각이 가치판단(유용/유해, 따라서 쾌/불쾌)으로써 수행되고 있다.
개개의 색체는 우리에 대한 어떤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일은 드물며, 감옥의 죄수나 광인처럼 동일한 색채가 오랜 기간 영향을 끼친 후에라야 비로소 그럴지라도, 색채는 가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다른 색채에 대한 곤충의 반응 역시 다른데, 이를테면 개미의 경우 어떤 것은 이 색채를 좋아하고 다른 것은 저 색채를 좋아한다.
[4] 긍정이 최초의 지적 활동이며, 믿음이 진리의 본질이다
“믿음이 감관인상의 원초적인 것이며, 긍정이 최초의 지적 활동이다”
[심상 ······> 낱말 ······> 개념 :: 발생과정] 먼저 ‘심상(Bilder)’이 어떻게 해서 정신 가운데 발생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어서 ‘낱말Wort’이 심상에 적용된다. 최후에 ‘개념’은 낱말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 다수의 심상은 무언가 직관될 수 없는, 오히려 듣고 파악할 수 있는 낱말 아래에서 총괄하는 활동이다. ‘낱말’을 듣고 파악할 때, 그것들을 표현할 낱말이 하나뿐인 듯한 유사한 심상을 직관할 때, 생기는 변변치 못한 한 조각의 정서. 이 어렴풋한 정서가 공동적인 것이며, 개념의 기초이다.
[믿음이 감관인상의 원초적인 것이며, 긍정이 최초의 지적 활동이다] 어렴풋한 감각이, 동일한 것으로 확립되고 동일한 것으로 감각된다. 그러므로 인접한 감각을 인식할 때 혼동한다. 믿는 것이 모든 감관인상 가운데 이미 들어있는 원초적인 것이며, 긍정이 최초의 지적 활동이다! 처음에 ‘참이라고 굳게 여기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째서 ‘참이라고 굳게 여기는 일’이 발행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참’의 배후에는 어떤 감각이 도사리고 있는가?
“믿음이 진리의 본질이다. 우리의 신앙이 참의 세계를 생성이 아니라 존재로 조작했다”
[믿음이 진리의 본질] “이러이러한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는 가치평가가 ‘진리’의 본질이다! 가치평가 속에는 보존ㆍ생장의 조건들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인식기관이나 감관은 보존ㆍ생장의 조건들에 관해서만 발달하고 있다.
[이성ㆍ범주ㆍ변증법ㆍ논리학은 삶의 유용성을 증명하지만,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그 범주에의 신뢰, 변증법에의 신뢰, 그러므로 논리학의 존중은, 이러한 것들이 삶에 대하여 경험을 통해 유용함을 증명할 뿐이며, 이러한 것들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 판단, 본질적 가치가 생명과 삶의 전제이다] 일군의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판단이 내려져도 좋다는 것, 본질적 가치에 관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 - 이것이 모든 생명있는 것과 그 삶의 전제이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참이라고 굳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무언가가 필연적”인 것이어서, “무엇인가가 참이다”라는 법은 없다.
[우리의 신앙이, 참의 세계를 생성이 아니라 존재로 조작했다] ‘참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 이 대립은 나에 의해 가치관계로 환원된다. 우리는 우리의 보존조건을 존재일반의 술어로 투영해왔다.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안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참의’ 세계는 ‘생성하는 세계’가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조작하고 만 것이다.